1555년 전주부윤 이윤경 전남 영암서 광대 이끌고 왜구 물리쳐
조선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에서 왜적을 물리친 광대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그해 5월 왜선 70여 척이 해남을 함락시키고 영암으로 몰려들었다. 토벌대장으로 임명된 전주부윤 이윤경이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에 나섰다.
이때 알록달록한 색깔 옷을 입은 400~500명의 무리가 함께 들어갔다.
군사가 아니라 광대들이었다.
성 밖에서 구원군으로 온 남치근이 왜구를 공격했으나 사상자만 내고 물러났다. 이윤경이 왜구들이 오는 길목에 마름쇠를 뿌리고 광대들이 그 위에서 재주를 부리면서 왜구들을 유인했다.
광대들이 뾰족한 마름쇠를 피해가면서 재주를 부리는 것은 쉬웠으나 왜구들은 마름쇠를 피하지 못했다.
광대들이 왜구를 유인해 향교로 들어가 놀이판을 벌이자 왜구들도 추격을 중단하고 신기한 공연에 빠져 들었다.
처음 보는 공연에 정신이 빠져 있을 때 군사들이 공격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때 광대들로 구성된 창우대를 이끈 의병장 양달사와 광대들이 큰 전공을 세웠으나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292년이 지난 1847년에 가서야 양달사는 좌승지에 추증됐다.
양달사는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왜구와 격전을 벌였다.
양의병장은 왜구의 숫자나 병기 등으로 보아 신묘한 전술만이 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양의병장은 왜구를 현혹하기 위해 꽃 패랭이와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광대들로 창우대(倡優隊, 農樂隊)를 조직, 왜구의 진 앞에서 온갖 희롱을 부리면서 일부 무장병을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변복하여 창우대에 합류시켰다.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왜구를 역고개 넘어 매복해 있던 병사와 의병이 일제히 공격하여 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앞쪽에서 광대들도 협공했고, 성안의 노소 백성들도 징 등을 두드리며 왜구의 뒤를 추적, 대승을 거두니 죽인 자의 수효가 100여 급이었으며, 양달사도 10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양의병장은 병사를 모아 잠시 쉬게 하였는데 왜구들이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양의병장은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매 양 의병장은 이를 피하였으나 그만 말이 이에 맞아 거꾸러지고 말았다.
양의병장이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 박천추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하니 적이 쫓아왔다.
양의병장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도망치다 금교(金橋)의 진흙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이를 지나니 적들은 쫓아오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양 의병장이 말을 돌려 한칼로 모두 죽였다. 비로소 정부군이 이르러 함께 적들을 섬멸하는데 합류하였다.
장사들이 전주부윤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하고 원망하면서도, 3일간 결전하여 왜구 100여 명의 머리를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했다.
영암전투가 끝나고 평정을 되찾자 조정에서는 영암전투의 공과를 논했으나 양달사 의병장의 공은 온데 간데 없고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전라순찰사 이준경에게 공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장흥부의 원벽에는 당시의 전황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양달사 의병장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관군이 왜적과의 접전을 피하는 비굴한 행태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붙였다.
양의병장은 왜구를 평정한 공에 대해 “상중에 나서서 군무에 종사한 것이 임금의 명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공을 자랑하며 상을 구함은 내가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겸양을 갖추었다.
그 뒤 상처의 독이 병이 되어 1년 만에 별세하였으니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영암군민들이 눈물을 흘리고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그때 양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어육이 되었을 것”다고 했다.
“왜구 침입이 있은 이래로 을묘년 호남의 승첩 같은 일이 없었는데 만약 공이 몸을 내던져 육박전을 벌여 먼저 그 예기를 꺾지 않았다면 아무리 원수와 방어사의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전승의 공을 한쪽의 반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영암 군민들은 말했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고 을묘왜변이 평정된 지 290여 년이 지난 헌종 13년 1847년 10월 19일 양달사는 좌승지에, 동생 참봉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됐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계의 처우는 열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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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19권, 명종 10년 7월 6일 무술 3번째기사 1555년 명 가정(嘉靖) 34년
전주 부윤 이윤경이 서장을 올리다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이달 7일 삼가 받든 유지(有旨)와 서장(書狀)에 의하면, 신이 영암(靈巖)의 전투에서 약간의 공로가 있다 하여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加資)하시어 포유(褒諭)하셨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본래 어리석은 자질로 외람되이 누조(累朝) 의 은혜를 입어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먹고 지냈는데, 갑자기 당상(堂上)에 승진되었습니다. 모든 생활이 국은(國恩) 아닌 것이 없으니, 신이 비록 분골 쇄신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난들 보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침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주장(主將)이 함몰되고 한 지방이 소요스러울 적에 본도 관찰사가 신을 영암 진장(靈巖鎭將)으로 삼아 군병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서(部署)도 정하기 전에 적병이 점점 밀고 들어와 해남(海南)을 핍박하고 강진(康津)으로 들어왔는데,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두 고을에서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모두들 의심하면서 구원에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신을 장수로 삼고 의심하여 저상된 백성을 군사로 삼았으니, 어떻게 저쪽을 구원하고 이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앉아서 그 위급함을 듣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군사 3백을 선발, 전 내금위(內禁衛) 은세인(殷世仁)을 장수로 삼아 이들을 데리고 우선 강진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나 1식(息)쯤 되는 곳에 이르러 길이 막혀 나아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군사를 추가하여 더 보내려할 때 방어사(防禦使) 김경석(金景錫)이 마침 도착하였으므로, 군사 2백을 추가하여 전 현령(縣令) 장응규(張應奎)와 전 봉사(奉事) 정윤(鄭倫)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아 파견하였더니 군사만 죽였을 뿐 끝내 도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장수가 노숙하지 못한 데다 사졸도 모두 오합(烏合)이니 어떻게 뜻대로 지휘하여 전적(戰績)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당초 김경석이 도착하기 수일 전에 성안의 사람들을 위무하여 각자 안심하고 지키게 하고 함몰될 리가 전혀 없다고 효유했으며, 군졸들에게 민가(民家)의 물건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 오직 한 번 죽어 국은에 보답할 생각만 했을 뿐 욕되이 살 계책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용렬한 신으로서는 단지 지키다가 죽을 줄만 알았고 달리 적을 제어할 계책이 없었으니, 승패(勝敗)의 수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한갓 국가의 욕됨만을 더하였을 뿐인데,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순찰사 이준경이 형제간이라서 절제(節制)에 어려움이 있다 하여 대장(代將)을 보내어 신을 초환(招還)할 즈음에, 김경석과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이 모두 신을 보내려 아니하였고 신도 위난(危難)에 임하여 떠난다는 것은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날 낮에 적병이 이미 성 아래에 이르렀으므로 출성(出城)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의 말달리고 활쏘고 공격하는 일은 여러 장수가 있고 호령하고 명령하는 일은 주장(主將)이 있었으니, 신은 노쇠하고 진부한 선비로서 참여된 것이 무엇이 있기에 이같이 비상한 특은(特恩)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공로가 없는 상을 신이 어떻게 버젓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약간의 힘써 찬조(贊助)한 일이 있다고 하나 바야흐로 포위된 상황 아래에서는 부득이한 일이었으므로 공이라 지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 장수에 앞서 외람되이 은명(恩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아둔하나 여러 번 유악(帷幄)에 입시(入侍)하였었으므로 임금 섬기는 의(義)를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어찌 은전(恩典)의 유무 때문에 마음씀을 가감하여 배운 바를 저버리겠습니까. 명을 받은 이후로 침식(寢食)이 달지 아니하고 무안스런 생각이 계속되어 감히 어리석은 말씀으로 우러러 천청(天聽)을 더럽히오니, 은전을 거두시어 편한 마음으로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년 이래로 재이(災異)가 계속되어 기근에 시달리던 끝에 갑자기 참혹한 변을 만났으므로 내가 매우 두려워하고 근심하였다.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군령(軍令)이 해이 되었기 때문에 변경의 일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힘써 싸우는 자가 없어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간절하였었다. 그런데 영암의 싸움에서 경이 잘 조처하여 적을 포획하였으니,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다. 한 자급을 높여주는 것은 내 마음에 오히려 미흡한 바가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더욱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全州府尹李潤慶上書曰:
卽於本月初七日, 祗受有旨書狀內, 以臣於靈巖之戰, 與有微勞, 特加一資, 以示褒諭者。 伏念, 臣本以庸鄙陋劣之資, 濫荷累朝之恩, 優游哺啜, 遽陞堂上。 一寢一息, 無非國恩, 臣雖齏粉, 能效萬一乎? 適因倭寇犯邊, 主帥陷沒, 一方騷擾, 本道觀察使, 以臣爲靈巖鎭將, 付以軍兵。 部署未定, 寇賊漸迫, 逼海南入康津之境, 聲勢鴟張, 四散刦掠。 兩縣請救, 人懷疑阻, 莫有應援之慮。 當此之時, 以臣爲將, 以疑阻之民爲兵, 則安能救彼而守此乎? 雖然, 不可坐聞其急而莫之救也。 卽抄兵三百, 而以前內禁衛殷世仁爲將, 使之領率, 先赴康津, 則行至一息之地, 以路梗難進爲報。 添兵追送之際, 防禦使金景鍚適到, 加兵二百, 以前縣令張應奎、前奉事鄭倫二人, 爲將而遣之, 則徒殺軍兵, 竟不達而空還。 將非老宿, 卒皆烏合, 安能如意指揮, 以成其績乎? 臣當初金景錫未到前數日, 撫循城中之人, 俾各安心以守, 喩以萬無陷沒之理, 嚴禁卒伍, 無得剽掠民家之物。 臣亦自分, 惟有一死, 以報國恩, 更無偸生之計。 然以臣庸劣, 但知守死, 而無他計策, 可以制敵, 則無益勝敗之數, 而徒添國家之辱, 亦何補於涓埃之萬一乎? 巡察使李浚慶, 以兄弟之間, 節制之難, 送代將招還之際, 金景錫及從事之人, 皆不欲臣之去, 臣亦以爲臨危而去, 義有所不可拒而不從, 而其日之午, 賊兵已到城下, 則雖欲出城, 亦不可得矣。 自餘馳射擊刺, 則有諸將, 發號施令, 則有主將, 臣以衰老腐儒, 何與於萬一, 而受此非常之特恩乎? 無功之賞, 臣亦何心安受之乎? 雖曰少有勉力贊助之事, 方於圍中, 亦非得已, 不可指以爲功。 何必濫加恩命於諸將之先乎? 臣雖駑下, 屢參帷幄之侍, 粗知事君之義, 則豈以恩典之有無, 而有所加損, 以負所學哉? 受命以來, 寢食無甘, 俯仰慙靦, 敢陳愚陋之說, 仰瀆天聽, 乞收回恩典, 俾得安心, 以終餘齒。
答曰: "近年以來, 災異連緜, 飢荒之餘, 遽遭慘酷之變, 予甚惕然。 昇平日久, 軍令解弛, 當邊事危急之時, 未有力戰者, 方切南顧之憂, 而靈巖之戰, 卿能措置捕獲, 其功不小。 一資之增秩, 於予心猶有所未洽。 卿其勿辭, 後益盡心。"
【태백산사고본】 13책 19권 3장 B면
【국편영인본】 20책 2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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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양달사는 해남 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하자 현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하던 중 왜구가 침입하자 의병을 자청, 영암성에 들어가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10여 군데의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설명: 장은영 작가의 '광대 특공대'능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주 부윤 이윤경이 광대들을 통해 왜구를 무찔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창작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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