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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청정한 법수(法水) 청산이 그립다

사람들, 고려 명종때 전주 승려 일엄(日嚴)’의 세수 · 양치하고 목욕한 물을 법수(法水)’라 하다

 

1448년 고창 무장현 염전이 치료 목적의 목욕탕이 있었다

 

1448년 고창 무장현 염전이 치료 목적의 목욕탕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목욕탕, 목욕으로 보는 한국의 생활문화 보고서'를 통해서다.
‘전라도 감사가 아뢰기를, ’무장현(茂長縣)의 염정(鹽井)에 목욕간(沐浴間)을 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하여 병을 낫게 하기를 청하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全羅道監司啓 茂長縣鹽井 請設浴室 令人沐浴療病 從之. 세종 30년 무진(1448) 2월 12일 무진)
세종 30년(1448) 염정(鹽井)에 목욕간(沐浴間)을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해 병을 낫게 하기를 청하자 이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염전에 치료목적의 목욕탕을 만들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방법들은 아프거나 제사를 앞둔 특정한 시기에 제한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일상적인 목욕으로 더러워진 신체 일부를 닦아내는 부분욕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케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일부 양반들만, 그것도 명절에나 겨우 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전신욕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목욕탕에 간 조선인들은 온탕 안에 들어가 불린 때를 그 자리에서 바로 미는 행동이 ‘매너 없는’ 행동임을 알지 못했다.

 

부녀자들이 덕진 연못에서 반나체로  단오 물맞이 하다

 

 전주 덕진연못은 바닥에서 용천수(龍泉水)가 솟는 천연못이다. 덕진연못은 주변의 숲이 울창하고 연못의 깨끗한 물은 항상 넘쳐흘렀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경관으로 연못 속에는 용이 머물고 있다는 신성(神聖)관념이 생겨났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덕진연못의 용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성수(聖水)로 물맞이를 즐기는 관행이 전승되어 왔다. 기우제는 용왕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는 의례이고, 물맞이는 단오일에 목욕으로 부정을 털어버리는 정화의식(淨化儀式)이었다. 고려시대 밀교신앙의 영향을 받은 부녀자들이 연못의 성수로 목욕하는 관행이 태동하였고, 그러한 전통은 조선 후기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 기녀들이 단오일에 반나체로 목욕하는 그림으로 묘사됐다.

 

부녀자들이 덕진연못에서 반나체로 목욕하는 단오물맞이 광경이 1938718일자 동아일보엔 소개됐다.

 

조선 후기는 열녀여성상(烈女女性像)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기여서 덕진연못에서 반나체의 물맞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녀자들의 반나체 목욕은 고려시대 전통의 물맞이 관행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성적(性的) 억압에 대한 性的 충동의 반작용으로 보인다. 여성의 신체 노출은 신분제 해체와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자연스러운 현상이 덕진연못의 단오물맞이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이 신문은 호남지역 3만명의 인파가 덕진연못에서 물맞이 목욕을 즐겼다고 보도했다.

 

앞서 192768일자 동아일보, 193411일자 동아일보, 1935611일자, 1961616일자 경향신문, 1972615일자 동아일보 등에 덕진연못 단오 물맞이 기사가 보인다.

 

1974626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근대화로 인해 점차 민속과 풍속이 사라지고 있지만 전주만 남아있다고 나온다.

 

단오 물맞이는 교육을 받는 처녀들이 속신이라고 하지만 남의 눈을 피해 새벽에 몸을 씻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남의 눈을 개의치 않고 대낮에 몸을 씻어 혹은 갠지스강의 힌두교도들을 연상케 한다면서 단오 부채가 유명하다고 했다. 전주 덕진공원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전통과 관행이 조선시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 지속됐다.

 

 

 ‘일엄(日嚴)’의 세수 · 양치하고 목욕한 물을 ‘법수(法水)’라 하다

 

일엄(日嚴)은 고려 명종 대 전주에서 활동하던 승려이다.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져 명종이 일엄을 개경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그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전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생몰년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일엄(日嚴)은 고려 명종 대 전라도 전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승려이다. 생몰년이나 구체적인 활동 사항은 알 수 없다. 일엄은 장님과 귀머거리도 치료할 수 있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설파하며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일으켰다. 1187(명종 17) 음력 9, 전라주도안찰사(全羅州道按察使) 오돈신(吳敦信)에게서 일엄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명종은 금극의(琴克儀)를 보내 개경으로 초빙했다.

일엄은 개경에 와 보현원(普賢院), 천수사(天壽寺), 홍법사(弘法寺) 등에 머물며 설법을 했는데,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몰려들어 가르침을 받고 제자가 되었으며, 여성들은 머리를 풀어 일엄의 발밑에 깔아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임민비(林民庇), 문극겸(文克謙) 같은 조정의 중신들도 사찰로 일엄을 찾아와서 예를 갖추어 존경했다고 한다.

 

당시 일엄(日嚴)이란 승려가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스스로 선전하기를 눈 먼 사람을 뜨게 하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내시 금극의(內侍琴克儀)를 보내어 영접하여 오게 하였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그는 머리에 채색한 면사(綿絲)로 짠 두건을 쓰고 얼룩말을 탔고, 비단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제자 중들이 전후 좌우로 옹위하여서 일반 사람들은 그를 바로 볼 수도 없게 했다. 보현원(普賢院)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서울 사람들로서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노인, 어린이들을 물론하고 모두 달아가서 일엄(日嚴)을 보려하므로 동내가 텅 비었다. 무릇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등 여러 가지 병신이 그의 앞으로 밀려들어 왔다. 일엄이 부채로 지휘하여 불구자들을 천수사(天壽寺)로 맞아들여 놓고 자기는 그 절 남문 문루(南門門樓) 위에 올라 가서 앉으니, 재상(宰相)과 대신들도 그 앞에 공손히 뵈였고, 사대부(士大夫)의 부녀들은 다투어 가며, 머리털을 풀어 놓고 중의 발로 자기 머리털을 밟기를 원하였다. 일엄이 그들에게 아미타불을 부르게 하니 그 소리가 10리 밖에까지 들렸다. 그리고 일엄의 세수한 물, 양치한 물, 목욕한 물을 한 방울만 얻어도 천금이나 얻은 듯이 귀중히 여기고, 마시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것을 법수(法水)라고 하면서 이 물을 마시면 무슨 병이든지 고쳐지는 약수라고 하였다. 그래서 남자와 여성들이 밤낮으로 한 곳에서 섞여 있었으므로 추잡한 소문도 전파되었고, 머리를 깎고 일엄의 제자로 된 자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어느 한 사람도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간언(諫言)을 하여 제지시키려는 자가 없었다. 명종이 점차 일엄의 거짓을 징험(徵驗)하여 깨닫고서 그 중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일엄의 당초 사람을 속일 때에 말하기를, "만 가지의 법은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렸다. 내가 만일 염불을 부지런히 하면서 내 병은 이미 완치되었다고 생각하면 병은 즉시 저절로 완치될 것이니, 아예 병이 완치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님은 눈이 벌써 보인다고 말하였고, 귀머거리도 말이 들린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홀리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서시랑 문극겸(中書侍郞文극겸)도 사복(私服)을 입고 찾아가서 예()를 드리었고, 임민비(林民庇)도 문루(門樓) 아래에서 배례(拜禮)했. 임민비는 1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평장사에 올랐다. 지득금(池得琴)이란 자가 그의 후임으로 태상 복야(太常僕射)로 임명됐다. 지득금이 아직 그 자리에 있을 때, 그는 벌써 평장사(平章事)로 등용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승진과 등용이 빠른 것을 부러워했다. 그는 상()으로 되어 특출하게 옛날 재상의 풍도를 가졌고, 세 번이나 공거(貢擧)를 장악하여 인재를 가장 많이 얻었다. 그는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돌봐주고, 착한 일을 좋아 하였으며, 일에 실속이 있고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므로 무관(武官)이나 사나운 병사(兵士)들까지도 그를 우러러 볼 줄 알았다. 나이 73세 때에 왕에게 글을 올려 은퇴할 것을 청하니, 왕이 특별히 수사공 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올려주고 치사(致仕)케 하였다. 1193년에 죽으니, 아들은 없었다

 

 일엄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 후기 사회에 계속 전해져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엔   변산과 고창 지역에서 호랑이와 승려의 이야기호승지설(虎僧之說)로 남아 있다. 변산 지역 고승이 고창에서 만났던 함정에 빠져 죽은 호랑이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승려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환생한 호랑이가 바로 일엄사(日嚴寺)의 승려로 비밀스런 주문을 닦아 자신의 법력을 더해 사람들이 믿게 하다가 왕명을 받아 경기의 어느 사찰에 부임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최자는 이것이 일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하나 믿기 어렵다고 평하였다. ‘보한집의 전승은 일엄이 입적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전설이 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한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엔 일엄의 사건이 명종의 지혜로움을 보여 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일엄이 세수 · 양치하고 목욕한 물을 법수(法水)’라고 일컬어 천금같이 귀하게 여겨 마시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그를 알현하느라 마을이 텅 비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일엄은 사람들에게 아미타불을 외게 했고, “만 가지의 법()은 오직 마음에 달렸으니 너희가 부지런히 염불하며 내 병은 이미 나았다고 생각하면 병은 나을 것이다. 절대 병이 낫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명종은 결국 그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법수(法水)’’번뇌의 때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물이라는 뜻으로, ‘불법을 달리 이르는 말로 우리말로 샘이다. 불법(佛法)이 중생의 번뇌를 깨끗하게 씻음을, 물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부정 비리, 정치 투쟁, 불법 시위 등 끝없이 이어지는 사회 불안에 대한 언론 보도는 갑갑한 소식뿐이다. 어두운 세상 갑갑한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주는 청정한 법수(法水)가 그리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