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
생강과 순창고추장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지난 3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한국인의 기본 양념인 장을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는 문화가 세대 간에 전승돼 오며 가족 간 유대감을 강화한다”며 “장 담그기라는 공동의 행위가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고 평가했다.
이번 등재 결정으로 한국은 모두 23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갖게 됐다
향신료는 음식에 풍미를 주거나 맵고 향기로운 맛을 더해 주어 식욕을 촉진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향신료는 겨자, 고추, 후추, 생강, 파, 마늘 등이 있다. 본래 향신료의 사용은 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유목민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고기가 쉽게 부패하는 것을 막고 고기의 좋지 않은 냄새를 막는다.향신료가 조미료로 보급되기 전에는 약재로 사용되었음은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현상이었다. 영어로 향신료를 뜻하는 ‘스파이스(spice)’는 본래 라틴어에서는 ‘약품’이란 뜻이 있다. 이를 통해 본래 향신료는 음식의 조미료이기 전에 약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 문헌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는 마늘, 부추, 파, 생강 등 향이 있는 식물을 약재로 기록했다. 본래 전통 향신료의 쓰임은 오늘날에 와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지, 과거에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향신료는 그 자체로 약용으로 쓰기도 하지만, 고기의 누린내를 잡거나 식재료가 쉽게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마늘, 생강, 고추 등의 향신료는 귀한 식재료였음은 분명하다. 향신료가 우리의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그리고 향신료는 K-Food의 대표격인 김치와도 일정 부분 관련성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3일 '전통 향신료와 농민문화(글 윤경식. 조윤수. 사진 전성근)'를 펴냈다.
귀한 선물로 쓰였던 봉동 생강
생강은 다른 작물과 다르게 매년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강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심는다고 반드시 그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작물도 아니다. 생강은 다른 작물과 달리 같은 땅에서 연작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므로 해당 밭에 다른 작물을 재배해서 휴지기를 가져야 했으며, 그 재배 토질도 까다로워 물 빠짐이 좋은 땅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재배지도 한정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전주부, 지금의 전주와 완주 일대에서 재배가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재배지도 한정적이고, 재배도 어려웠으니 귀한 대접을 받을 만했다. 이 때문에 생강은 귀한 선물 중 하나였다.
‘왕자의 난’ 관련자 중 한 명인 이방간이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전주부로 귀양 갔다. 이방간은 심종에게 생강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방간과 심종은 처남과 매형 사이였으나, 이방간은 중죄를 저질러 귀양 갔고, 심종은 공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방간이 심종에게 귀한 생강을 몰래 선물했다는 것은 뇌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태종실록'에 1414년(태종 14) 4월 19일에 ‘방간이 보낸 생강’이란 내용이 있다.
남행과 흔하지 않은 생강을 언급한 것은 전주부의 봉상생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종 14년(1414년) 4월, 사헌부가 청원군 심종을 탄핵한 것이다. 태종은 1413년 9월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돌아본다.
이때 완산에 유배중이던 회안대군 방간이 심종에게 생강을 선물한다. 태종 이방원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지만 심종은 방간과 친분이 깊었다. 심종은 방간이 보낸 생강 선물을 덥석 받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문제는 몰래 받았다는 것이다. 더하여 내용을 임금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생강 선물 후 3년이 지났다. 이에 태종이 직접 나서서 “심종의 죄가 있다고 하나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다. 유배를 보내기는 하나 목숨에 손을 대지 마라”고 특별히 지시한다. 심종은 자원안치(自願安置)된다. 자원안치는 유배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유배형 중에서는 비교적 가볍다. 심종은 유배생활 끝에 황해 토산현에서 병으로 죽는다.생강 선물은 빌미일 뿐이다. 생강이 국왕의 매제를 유배 보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중종 때에는 세자가 동궁의 관원들에게 생강을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세자는 관원들에게 정신을 맑게 하고 입 냄새를 없애는 데 좋다고 생강을 권했다. 그리고 명종도 시강원 관원들에게 생강을 하사하기도 했다.
봉동생강은 1597년 이순신장군도 드셨음이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주판관 '박근'이, 백의종군때 이순신장군에게 선물한 것이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 오늘날 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왔다’
이는 정유년(1597년) 4월 22일(양력 6월 6일, 임오, 맑음)자 ‘난중일기’ 기록이다.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했다.
조선 말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전주(全州) 봉상면(鳳翔面)에서 나는 생강은 초가을에 연한 것을 캐어 정과(正果)를 만드는데, 천하의 진미이다.
판서 김교근(金敎根)이 전라도관찰사가 됐을 때 풍고(楓皐)가 이것을 요구하니, 김공이 힘써 달여서 보냈는데 풍고가 너무 늦었다고 책망했다. 김공이 뒤에 들으니 한 아전이 선수를 쳐 올려 보냈다고 하므로 매로 다스려 죽이고자 했는데, 양일(兩日) 간에 청탁하는 서찰이 갑자기 이르렀다. 그 내용에, “일찍 이 맛을 보게 된 것은 역시 감사(監司)의 공입니다” 했으니, 권력 있는 아전이 본관(本官)보다 나은 것이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도 나온다.
여기서 풍고는 조선 후기 순조의 장인이며 노론 시파(時派)의 핵심이었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말한다.
현재 옛날과 반대로 설탕이 흔해지고 꿀이 비싸져서 꿀로 절인 것이 더 비싸다. 중국에 탕후루라는 비슷한 요리가 있다.
이 탕후루는 중국 송나라 때 황제인 광종의 첩이었던 황귀비가 몸이 허약해 어떠한 약제와 시술로도 병이 낫지 않았지만, 한 한의사가 소화를 돕는 산사나무 열매를 설탕과 달여서 식전에 먹게 했더니 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백성들한테 퍼지자, 사람들은 산사나무 열매를 꼬치에 꿰어 팔기 시작했고 이것이 탕후루라는 것이다.
이규준(1855-1923)의 '호상재유일기(湖上再遊日記, 1913)'는 봉상시(鳳翔市, 봉동읍) 주민들이 생강을 심고 여름이면 접을 붙여 키운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전주부와 남원도호부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주부, 익산군, 만경현, 금구현, 정읍현,
옥구현, 태인현 등이, '여지도서'는 전주부, 여산부, 정읍현 등에서 생강을 생산, 지금의 완주, 전주 일대에서 재배됐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강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주부에 토공(土貢),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전라도읍지(全羅道邑誌)'(1760), '여지도서(輿地圖書)'(1765), '여도비지'(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6), '호남읍지(湖南邑誌)'(1871), '완산지(完山誌)'(1905) 전주부 토산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작물이다.
생강의 경우, 과거 농가 아궁이 밑에 굴을 파서 보관하기도 하고, 1990년대까지 충남 일대에서는 수직굴을 파서 생강을 보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특한 재배와 보관 방법을 인정받아, 완주군 봉동읍 일대와 생강 재배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양질사토의 비율이 높다. 생강이 주로 재배되는 지역의 토질이 대부분 고운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아궁이 밑에 굴을 만들어 보관한 것은 생강의 생육과 보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생강은 아열대 작물로, 한반도에서 재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를 재배할 지역이 많지 않다.
1970년 무렵부터 봉동에 생강 재배가 확대되면서 수직굴 형태의 생강굴이 나왔다고 한다. 본래 집 밑의 굴에 생강을 보관했다. 하지만 점차 생산량이 많아지고 굴이 협소해짐에 따라 새롭게 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봉동 생강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수출되기도 했다. 완주군 봉동에는 과거 지명을 딴 봉상생강조합이 있다. 봉상은 조선시대 전주부 봉상면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조합은 1993년에 50여 생강 농가가 모여서 결성했다.
1930년에는 한국 최초의 생강조합인 봉상산업조합이 낙평리 일대에서 결성됐고, 이후 지역 통합으로 '봉동면'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현재는 '봉동생강'으로 알려지게 됐다. 동아일보 1931년 8월 28일 기사를 보면 자세한 내용이 소개된다.
독립운동가 윤건중(1897~1987)선생이
봉상산업조합을 설립했다.
1929년 독일에서 고향에 돌아온 윤건중은 1930년 봉동에 생강산업조합을 세웠고
1936년 유명한 전북 특산품 생강생산량이 2만석을 넘었다.
1937년 8월 20일 <동아일보> 기사다.
「삼례 윤건중 씨 표창 준비」 제목 아래 “전북 완주군 봉동면 락평리
봉상산업조합원 720여인은 봉동조합 전 이사 윤건중 씨의 동상을 건립코자 준비 중이라는데(중략) 씨는 기미년 당시 독일로 건너가 백림대학 경제과를 나와 귀국한 후(중략) 조합을 설립하자 일부 반대로 장애가 있었으나(중략) 씨는 사적 물질을 허비해가며(중략) 사무를 진행한바 업무가 일증월가하야 성적이 전조선의 제1위에 있다 한다. 춘풍추우 8개 성상에 무보수로 20리나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하루 같이 통근하였다는데 720여인 조합원은(중략)
영구적인 기념을 아니 할 수 없다는 의미하에 이구동성 동상 건립안이 통과 돼 (중략) 착착 준비 중이라 한다.”
광복 후 농림부장관을 지냈으나 가난하게 살다가 고산면 소향리에서 별세했다. 아들이 윤필립이다. 바로 이같은 애국자를 잊어서는 안된다.
귀농인인 도성진 농부는 7대째 봉동 생강 농사를 짓고 있다.
영조가 좋아한 순창고추장
본래 고추는 남미가 원산지로, 광해군 시기 조선에서 재배되면서, 우리의 음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누군가는 시장에서 고춧가루를 보고, “고추로 만든 귀한 가루”라고 했다. 이 말이 세간의 우스갯 말로 돌았으나 이상한 말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엔 태조 이성계가 순창의 초시를 먹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고추를 먹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의 미식가 영조 임금이 꼽은 음식은 송이버섯, 복어, 꿩고기, 고추장이었다. 영조는 위장병에 시달렸지만 이들 음식만 나오면 밥을 거뜬히 해치웠다. 고추장 사랑은 각별했다. 그에게 고추장은 입맛을 돋우고 원기를 보충하는 최고의 반찬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조에는 고추장 기사가 20건 이상 나온다. 영조 30년(1754) 11월 20일자에는 영조가 조종부 집안에서 만드는 순창고추장의 맛을 칭찬하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순창고추장은 왕실 진상품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증흥기를 이끈 임금 영조는 고추장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탕평책을 추진했던 영조는 당쟁에만 몰두한다는 이유로 조종부라는 인물을 싫어하면서도 조종부의 집안에서 담근 고추장만은 좋아했다. 한때 영조는 그 집 고추장이 맛있다는 이유로 조종부의 사람됨이 그릇되지 않을 것이라고 넘겨짚기도 했다. 이 조종부라는 인물은 순창 조씨로 전해진다. 순창 하면 고추장이 떠오르는데 순창 조씨 집안의 고추장이 맛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영조가 보양식으로 고추장을 좋아했음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보인다.
영조는 의관들에게 원기를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을 추천하라 했고, 방태여가 “고추장이 비위를 돋우는 데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보인다.
영조 때의 고추장은 고초장(苦椒醬, 枯椒醬), 초장(椒醬), 호초장(胡椒醬)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조종부(趙宗溥)의 초장과 호초장에 대해 영조가 매우 흡족해하는 내용이 보인다. ‘승정원일기’ 1751년(영조 27) 윤 5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김약로가 영조에게 “고추장(苦椒醬)은 근일에 연이어 드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렸고, 영조가 “연이어 먹었다. 지난번에 처음 들어온 고추장은 매우 좋았다”고 답하고 있다. “일찍이 조종부의 고추장 맛이 좋았다”거나,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기록에서도 영조가 고추장을 특히 좋아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외에 영조가 즐겼던 음식으로는 타락죽(駝駱粥)과 보리밥이 있었는데, 타락죽은 자주 영조의 밥상에 올랐다. 보리밥은 영조가 식욕이 없을 때 즐겼던 음식이었음이 ‘승정원일기’ 기록에 보인다. 영조가 말년에 즐겼던 음식은 영조의 나이 75세이던 1768년(영조 44) ‘영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을 수가 있다.
영조는 스스로 “송이(松茸), 생복(生鰒), 아치(兒雉:어린 꿩), 고초장(苦椒醬)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이들 음식이 자신의 건강 유지에 큰 몫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영조도 사랑했던 장맛을 보러 남쪽으로 향한다.
'소문사설'은 순창고추장조법(淳昌苦艸醬造法)'이라는 내용으로 고추장 제조법이 소개된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고추는 귀한 작물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추의 소비가 많아지면서 고추재배를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생겼다. 농민에게 고추는 수익성이 좋은 작물이다. 고추는 8월부터 10월까지 꾸준히 열매를 맺으므로 3개월간 꾸준히 수확할 수 있다. 고추는 소비도 많고 수익도 많으므로 이와 관련해서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매운 고추로 유명한 청양고추는 품종명이다. 시범 재배단지가 경북 청송과 영양이었으며, 해당 지역명을 한 글자씩 가지고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청양고추가 충남 청양의 지명과 같아, 오히려 충남 청양에서는 청양고추로 인해, 반사이익을 톡톡히 얻고 있다.
1989년 1월 6일 새벽, 임실군 각지에서 출발한 경운기가 고추를 한가득 싣고 임실군청에 모였다. 임실장이 열리는 날, 고춧값 폭락과 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고추 폭락으로 임실 농민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란 이진하 임실치즈마을 운영위원장의 설명이다.
이때 경운기 숫자는 650대였고, 몰려든 농민만 2,000명이었다.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서는 겨울철 농가의 소일거리로 고추장을 만들고 있다. 양동아 부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고추장을 판매했다. 고추장은 별도의 저온 시설에 저장, 제주도, 강원도, 전북도 등에 2kg에 3만5,000원으로 판매한다.
순창고추장마을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순창고추장의 명성과 제조법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었다. 약 6,000만원을 저금리로 10년 동안 상환하는 방식으로 초기 비용을 지원했다.
이곳의 고추장은 고추를 매입한 이후 12월과 1월에 제조한다. 고추장은 날이 추울 때 만들어야 맛이 있다고 한다. 저온에서 천천히 숙성해야 맛이 깊고, 날이 더울 때 만들면 신맛이 강해져서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과거엔 장독에 숯을 넣거나 버선 모양의 한지를 붙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풍습을 지키고 있는 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부태수 오천유로부터 기생과 술 한 병, 산 꿩을 받은 이규보 (2) | 2025.01.04 |
---|---|
전주성황제신문(全州城隍祭神文) (1) | 2025.01.04 |
완주 화심두부 (2) | 2024.12.17 |
여강이씨가 (무장현감으로 간)남편 김진화에게 보낸 편지 (1) | 2024.12.04 |
전북의 '장 담그기 문화' 세계무형유산이 되다 (6) | 2024.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