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북의 '장 담그기 문화' 세계무형유산이 되다
'장 담그기 문화' 가 한국의 23번째 세계무형문화유산이 됐다.
한국 음식의 기본양념을 구성하는 우리의 장(醬)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에 등재됐다. 공동체 의식 함양과 문화 다양성 증진, 장 생산이 수반하는 농업 발전 등의 가치가 주요 이유로 거론됐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올리기로 3일(현지시간) 최종 결정했다.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제19차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장류는 밥, 김치와 함께 한국 식단의 핵심"이라며 "장 담그기라는 공동의 행위는 관련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고 했다.
장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져온 기본양념이다. 발효나 숙성 방식에 따라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메주를 활용해 간장과 된장 두 종류의 장을 만들고, 직전 해에 쓰고 남은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방식은 한국의 독창적인 문화로 여겨진다.
장 담그기 문화는 장이라는 음식뿐 아니라 이를 관리·이용·전승하는 전 과정의 기술과 신념을 포함한다.
이번 등재 결정으로 한국은 모두 23개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한국은 그동안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 등재된 '한국의 탈춤'(2022)까지 모두 22건의 인류무형유산을 대표목록에 올렸다. 오는 2026년엔 '한지제작의 전통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이 등재에 도전할 예정이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장 담그기는) 그동안 한국인의 음식 문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음에도 보편적 일상 음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가치가 소홀히 여겨졌다"며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소중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북의 장 담그기 문화
제비가 돌아오는 3월, 우리 조상들은 음력 삼월 삼짇날에 잘 띄운 메주로 장을 담궜다. 이날에는 집수리를 하거나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해서 집집마다 장을 담그기를 했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제를 지내기도 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식품명인 80명(전통식품 분야·8월 기준) 중 순창고추장 명인은 제64호 강순옥, 제36-가호 조종현 등 2명이다. 조종현 명인의 어머니는 순창을 고추장의 주산지로 우뚝 서게 만든 고 문옥례 명인이다. 이외의 순창군이 지정한 순창고추장 기능인은 200여 명에 달한다.
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고호이다.
순창고추장이 진상품이 된 것은 순창의 바람[風]과 물[水] 덕분이었다. 순창은 산간지대로서 밭들은 자갈이 많아 척박하하다. 산간지방이다 보니 물은 맑으나 차가웠고 바람은 빨랐다.
순창의 다른 이름이 옥천(玉川: 옥과 같은 맑은 물)인 이유이기도 하다. 고추 원산지는 남미로서 따뜻하고 기름지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잘 자란다. 순창은 물 빠짐이 좋으나 기후는 서늘하고 땅은 척박하다. 고추가 더디게 자란다. 작지만 알싸한 맛을 내는 순창만의 고추가 나왔다.
맥주·막걸리 맛이 그 고장 물맛에 좌우되듯, 옥 같은 샘물로 담은 고추장은 진상품이 됐다.
순창고추장은 순창만이 가진 제조 비법이 있어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른 장맛이 난다고 알려져 있다. 고추장의 대명사로 거듭나게 만든 비법이다. 솜씨와 최적의 자연환경, 장류전문연구기관 보유 등 타 지역과 비교되는 조건을 갖고 있다.
1997년 순창군이 전통 장류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순창 전통고추장의 명성과 전통적 제조 비법을 이어가기 위해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을 조성했다.
순창군의 장류문화 보존 노력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군은 전통장의 역사 연구와 제조법 전수교육을 실시하고, 도시민 장독대 분양사업을 추진하는 등 전통 장류문화 계승에 힘써왔다.
이와 함께 순창고추장민속마을을 중심으로 전통장문화학교, 발효아카데미 등을 통해 장 담그기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 장(醬)을 담가 먹는 가정이 점차 사라져 가는 시대에 순창군이 도시민에게 장을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을 제공하고 장독대도 분양하는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실제 군은 지난해 3월 25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도시민과 전통 장 기능인은 물론 순창군과 ‘농촌사랑 동행순창’ 협약을 맺은 전주 대자인병원 관계자 30여 명 등 모두 120여 명이 참석해 ‘2023년 순창 장독대 분양 및 장 담그기’ 행사를 성황리에 열었다.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타악 퍼포먼스 그룹 아퀴팀의 난타공연도 진행됐다.
고추장·된장·간장 등 전통 장을 기능인들과 함께 만드는 이색 장 담그기 행사가 개최된다. 이번 행사에는 특히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시민 장독대 분양'이란 이색 사업도 전개해 눈길을 끈다.
순창발효관광재단에 따르면 순창군과 순창발효관광재단은 순창군 관광객 유치 사업을 위해 올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지난 1월 '순창맛페스타'와 2월 '순창달달놀이'를 진행한 데 이어, 4월에는 13일부터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에서 장담그기 체험 행사인 '2024 순창장담그는날 행사'를 가졌다.
장담그는날 행사에는 전통 장 담그기 기능인들이 참석자들과 함께 고추장·된장·간장 등 각종 장류를 담그는 체험을 하며 우리 전통 장의 맛과 멋을 공유했다.
특히 미니 메주 만들기, 장독 꾸미기 등의 이벤트도 참석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장독 꾸미기 이벤트에서는 나만의 금줄 만들기, 버선모양 종이에 메시지 작성하기 등 다채로운 놀이도 준비했다.
순창발효관광재단은 '2024 순창장담그는날 행사'와 연관해 '도시민 장독대 분양'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장독대 분양이란 도시민이 전통장 기능인과 함께 직접 장을 담그고, 기능인의 장독대에서 숙성된 장을 해당 가정으로 배송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모집은 지난 3월 8일부터 시작돼 31일까지 진행됐으며, 4월 13일 현장에서도 신청했다.
순창발효관광재단은 순창에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전통 장 담그기 행사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연중 기획하고 있다.
5월에는 5일 어린이날에 순창발효테마파크 일대에서 어린이들 대상의 인형극, 가족 체험 프로그램 등을 준비했으며, 6월에는 산책하기 좋은 계절을 맞아 '2024 강천산 맨발걷기 행사'를 강천산 군립공원 일대에서 진행했다.
또, 8월에는 '2024 꼼순락' 행사를 순창발효테마파크 일대에서 개최했다. '꼼순락'이란 꼬마들의 순창 오락실을 줄인 말로, 어린이를 비롯한 가족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놀이들이 펼쳐지는 행사였다.
10월에는 순창군에서 가장 의미 있게 여기고 있는 '2024 순창장류축제 체험프로그램'이 11일부터 13일까지 운영됐다.
한편, 순창군청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군청은 올해 9, 000여 만원의 예산을 편성해 학교·여행사 등 단체 여행객들뿐 아니라 개별 여행객, 코레일 여행센터를 통한 여행객들에게 여행비용을 지원해준다.
여행객들은 군 홈페이지에서 여행비 지원을 신청하면 개별 여행객들의 경우 농촌체험비용의 50%를, 단체 여행객들의 경우 버스비 30만원 등의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선윤숙 순창발효관광재단 대표는 "순창은 우리 국토 남부중앙의 호남정맥 줄기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과 동쪽으로 섬진강과 적성강 경천 등이 펼쳐져 있는 맑고 깨끗한 지역"이라며 "천혜의 관광 자원을 온 국민이 1년 내내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광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준비했으니 언제든지 순창을 찾아달라"고 했다.
순창고추장
순창고추장, 전주집장, 전주(봉동) 생강 등
예로부터 우리나라 음식 가운데 지명이 들어간 것은 거의 드물다.
순창고추장의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순창은 고추장 담는 시기가 타 지방과 다르다.
대부분 음력 10월에 메주콩을 쑤어 겨울철에 메주를 띄우지만 순창에서는 처서 전후(양력 8~9월)에 고추장용 메주를 별도로 만든다. 장의 단맛을 내는 곰팡이는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고추장은 음력 동짓달 중순에서 섣달 중순 사이에 담근다. 메주는 더운 여름철에 띄우고 고추장은 추운 겨울에 담가 저온 발효를 통해 신맛을 줄이고 감칠맛을 살린다. 또 간장용 메주로 고추장을 담지 않고 고추장용 메주를 별도로 만드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순창고추장은 섬진강 상류의 지하 암반수로 빚는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골로 불릴 만큼 물이 좋은 고장이었다. 진하고 깔끔한 장의 뒷맛은 물맛 덕분이란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순창고추장은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제조한다.
순창은 고추장의 맛을 좌우하는 효모균이 자라기에도 최적의 기후이다. 일년 중 안개 일수가 70~75일로 50일이 채 안 되는 전국 평균에 비해 월등히 많다. 15~20℃에 달하는 충분한 일교차도 확보하고 있다.
풍부한 일조량과 뚜렷한 일교차, 넘치는 습기는 온난다습한 곳을 좋아하는 효모균들의 낙원이다. 요컨대 최고가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순창고추장은 이렇게 햇볕과 물, 바람이 만든다. 어쩌면 인간은 조력자에 불과하다. 하긴 그렇지 않은 일을 헤아려보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우습고, 또 답답하다.
“송이, 생전복, 새끼 꿩, 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승정원 일기,1768년 7월 28일)'
영조는 “송이, 생복, 아치(어린 꿩), 고초장(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는다”고 했다.
50세가 되지 않던 조선시대 평균 수명.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도 83세까지 장수한 조선의 21대왕 영조.18세기 조선은 윤택했다. 사람들은 조기의 짭짤함을 능가하는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고추장은 조선을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한, 감칠맛의 세계로 이끌었다.
18세기의 절반(53년)을 군림했던 영조는 유독 식성이 까탈스러웠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49년 7월 24일 그가 처음 고추장을 말한다.
"옛날에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것을 올리는 것을 봤다. 그런데 지금 나도 천초(川椒·산초) 등과 같은 매운 것과 고초장(苦椒醬)을 좋아하게 됐다"
그 뒤로 영조는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됐다. 궁내에서 만든 것보다 민가, 특히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趙宗溥) 집 것을 좋아했다.
조종부는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문제 삼았던 인물. 영조는 이를 당파성의 발로라며 괘씸히 여겼지만,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떠올리며 고추장을 생각했다. 말년에도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부가(士夫家)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했다.
조종부의 본관이 순창(옛 이름은 옥천)이었다.
18세기 초 숙종의 어의 이시필이 쓴 '소문사설'의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보면 지금 것과는 달랐다. 메주를 쓰지 않고 그 속에 전복, 대하 등의 어패류를 넣어 삭혀 먹었다. 마치 지금 장조림 또는 장아찌 같은 음식이었다.
영조는 궁 밖에서 들여온 순창고추장을 너무 좋아해 '승정원일기' 1754년(영조 30) 11월 20일, 1761년(영조 37) 8월 2일 기사에 영조는 순창사람 조언신(趙彦臣)과 조종부(趙宗溥) 집안의 고추장을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8월 2일 기사에는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영조는 고추장 예찬론자였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난 기억과 입맛 때문이었다.
영조는 즉위 24년(1748년)에 심한 현기증과 입안 염증으로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고갈됐다.
생명이 위독한 상황을 맞았으나 장남인 사도세자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다.
비결은 궐 밖에서 구해온 고추장이다.
수라상에 오른 고추장을 먹고 56세 노인이 입맛을 되찾은 것이다.
이후 고추장은 수라상 단골 반찬이 됐다.
영조는 궁중보다는 민가에서 담은 고추장을 선호했다.
입맛을 사로잡은 고추장은 사헌부(검찰) 간부인 조종부 집에서 담근 것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궁궐 내에서 한동안 당황스런 일이 벌어졌다.
조종부는 특정 당파의 이익을 위해 좌의정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판단한 영조가 괘씸하게 여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추장 출처가 드러나 부하들이 한동안 긴장했으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확연히 돋보이는 맛 때문에 영조가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70살을 넘어서도 고추장을 즐겼다. 송이나 생전복, 꿩고기가 밥상에 오를 때 반드시 곁들여 먹었다. 맵고 달착지근한 고추장 맛에 빠져든 영조는 83세까지 살았다.
영조는 궁에서 송이, 전복, 어린 꿩의 고기, 우유 넣어 끓인 타락죽(駝酪粥)에 눈뜬다. 생강, 귤피, 삼, 계피로 달인 차도 즐기게 됐다. 그러면서도 절제를 알았다.
원래 수라상 올리기는 하루 다섯 차례가 기본이지만 영조는 죽을 포함한 세 차례로 끼니를 줄였고, 배를 다 채우지도 않았다. 이 때문일까?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하며 가장 오래 재위를 누린 왕으로 남았다.
'소문사설'에 실린 순창고추장 조리법
순창고추장 기록은 '소문사설'에 처음 보인다. '소문사설'(謏聞事說)은 ‘들은 것은 적지만 그래도 아는 대로 말한다’라는 뜻으로, 조선 숙종ㆍ경종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이 1720년경에 편찬한 책이다.
“쑤어 놓은 콩 두 말과 흰 쌀가루 다섯 되를 섞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마구 찧어서 빈 섬 속에 넣는다. 1, 2월에 이레 동안 햇볕에 말린 뒤 좋은 고춧가루 여섯 되를 섞고, 또 엿기름 한 되, 찹쌀 한 되를 모두 가루로 만들고 진하게 쑤어 빨리 식힌 뒤, 단간장을 적당히 넣는다.(중략)"
이시필이 만드는 법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순창고추장은 당시 왕실고추장이었을 것이며, 이미 전국에서 제일 맛있는 고추장으로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순창고추장 사랑
영조의 고추장 사랑은 각별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기록돼 있다.
영조는 65세 때 어느 날 여러 의관과 나눈 대화에서 “가을보리밥ㆍ고초장(고추장)ㆍ즙저(짠맛이 나는 장아찌)가 입에 잘 맞는다”고 했다.
75세 때는 “송이ㆍ생 전복ㆍ새끼 꿩ㆍ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라고 했다.
영조는 고추장 사랑에 빠졌고,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됐다. 맛 좋은 사가(私家)의 고추장을 계속 반입하게 했다.
이인좌의 난 당시 청주목사를 지내며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한 조언신(趙彦臣)의 아들 조종부(趙宗溥) 집에서 담은 고추장은 영조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기력을 회복시켜주었기에 오랫동안 바쳐졌다. 심지어 조종부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화제에 오르자 영조는 고추장을 떠올렸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조종부의 본관은 순창조씨이다. 조종부 집안에서 오랫동안 왕실에 순창고추장을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이세보와 순창고추장 선물
순창고추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세보(李世輔ㆍ1832~1895)다. 그는 왕족(경평군 이인응)으로 철종의 종제(從弟)이자, 흥선대원군의 육촌 아우다. 458수의 시조를 지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조를 남긴 시조작가이기도 하다.
순창과 이세보의 인연은 그의 나이 29세였던 1860년(철종 11) 봄에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순창군수로 부임하면서다. 아버지를 찾아와 순창 지역을 유람하면서 명승지 8곳을 노래한 '순창8경' 이라는 연시조를 남겼고, 군청 앞에 있던 누정 응향각과 화방재에서 풍류를 노래한 시조 4수가 전한다. 또 순창ㆍ순천ㆍ화순 지역을 유람하면서 쓴 가사 작품 '상사별곡'을 남기는 등 순창을 유난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김건우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이세보와 인계 마흘리(馬屹里) 전주이씨 집안이 주고받은 편지 일부를 소개했다.
순창 전주이씨는 선조(宣祖)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으로, 이환규(李桓圭)의 둘째 아들 이종백이 한양에서 순창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충북 보은에 거주하던 이세보가 1868년(고종 5년) 1월 18일에 인계 마동(현재 마흘리) 전주이씨 집안에 보낸 편지 내용 일부이다.
“고추장(古秋醬)을 먼 이곳까지 보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야 어찌 물품에 있겠습니까. 더욱 두터운 성의가 많아 감격스럽습니다. 언제쯤 왕림하시겠습니까. 간절히 바랍니다. 이곳에서 극히 구하기 어려운 물품은 고춧가루입니다. 부디 몇 말을 구해 보내주십시오. 값은 편지로 알려주시면 즉시 갚겠습니다. 잊지 마시고 각별히 주선해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세보는 새해 안부를 묻고서 보낸 준 고추장에 감사드리며 보은에는 고춧가루를 구하기 매우 어려우니 꼭 보내 주고 값은 편지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고종 11년) 10월 21일과 11월 15일에도 순창에 보낸 답장에서 (이세보를 대신해)보은에 사는 이종응(李宗應)이 “보내준 고추를 받아서 잘 사용해 감사했다. 이어 부탁한 고춧가루를 유념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고춧가루 부탁뿐만 아니라 선산 관리, 산송, 매매 대금 환수 등 보은 측에서 여러 차례 부탁했다. 순창 전주이씨 가문은 순창고추장이라는 선물을 적절하게 활용해 종중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관계망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와 만일사 고추장 이야기
순창 만일사(萬一寺)는 회문산 기슭 숨어있는 작은 절이다. 회문산의 절경인 문필봉(文筆峰)을 중심으로 깨끗한 물이 주변을 감아 도는 모습에서 회문산(回文 山)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회문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유명한 산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회문산은 모악산과 서로 음양관에 있다고 불릴 만큼 명당이다. 회문산은 양의 기운이 강해서 아버지 산으로 불리고, 모악산은 음의 기운이 강해서 어머니 산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회문산은 마치 다섯 신선이 서로 바둑을 두고 구경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전해져서 조선 시대 유명 지관들이 찾던 필수 명당이었다고 한다.
만일사(萬一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됐지만 절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설화에서 탄생했다. 무학대사가 고려 장수 이성계의 왕위 등극을 위해 무려 10,000일 동안 기도했다는 데에 나왔다고 하니 무려 27년간 기도를 했다는 게 의심스럽지만, 사실관계를 떠나서 무학대사의 염원이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해볼 수 있다.
순창고추장은 이성계에 의해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려 장수 이성계는 남원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주변 지역 산세 지형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침 무학대사가 만일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으러 갔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근처 농가에 들러 점심을 먹게 됐다.
이성계는 조촐한 밥상에서 꿀맛 같은 고추장을 만나게 된다. 상추와 꽁보리밥 사이에 고추장을 넣어 싸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었는지, 왕이 된 이후에도 오로지 순창 고추장만 찾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이에 대한 내용은 만일사 입구에 있는 비석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만일사비에는 왕의 진상품으로 올라가던 고추장과 만일사역사가 적혀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던 만일사비를 복원해서 그 내용을 확인했지만, 현재는 비문이 마멸되어 눈으로 쉽게 읽을 수 없다.
이때의 고추장은 지금의 고추장과 다르다
여러 문헌과 언론에 비친 순창고추장
'규합총서'에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의약월보'(1914)에도 지역명물로 순창고추장을 기록하고 있다. '해동죽지'(1925)에도 순창고추장이 전국 으뜸이며,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1937)에서도 조선 각지의 명물에 순창고추장을 꼽고 있다.
최영년의 '해동죽지'에서는 “고추장은 순창군의 특산물로 그 색이 연홍색이고 그 맛은 달고 향기가 있으며, 그 기운이 시원하고 산뜻하여 반찬용도로는 비할 데 없이 아주 뛰어난 식품이다. 순창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손수 이 장을 빚어도 맛과 색이 모두 순창에서 만든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개벽' 61호(1925), 동아일보(1927, 1931), 경향신문(1966, 1967) 등에 순창고추장은 맛으로 유명하며, 담그는 재료부터 다르다며 만드는 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와 함께 구림 만일사 주변 민가에 들러 고추장을 맛본 후 “하도 맛이 있어 왕이 된 후 진상하라 했다”는 구전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무장현에 즙장을 보낸 김진화 아내 여강이씨
“즙장을 그리 생각하시는 일 답답,
저번 간 즙장 맛이 좋지 못하오니 갑갑,
즙장을 묻고 이내 비 와 거름이 식어 그리되오니 답답하옵
즙장 메주 조금 남은 것 보내오니 시켜 잡사오실가 보내옵”
이글은 조선 후기 문신,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아내 여강(驪江)이씨(李氏)가 남편에게 쓴 편지글이다. 편지를 띄운 날짜는 정확하지 않다.
무신년(戊申年 1848)이나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앞의 글이 무신 구월 삼십일(1848년 9월 30일)이고, 뒤의 편지글이 무신 지월 념일(1848년 11월 20일) 인 것을 보면 1848년 10~11월 어느 즈음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진화는 고창 무장(茂長)지역의 현감을 거쳐 능주(綾州) 목사로 재임을 하며 안동 집을 떠나 있었던 시절이 많았다.
그의 아내는 안동 금계리의 본가 살림을 맡아야 했기에 남편과 동행할 수가 없었다. 부임지로 동행을 할 수 없었던 아내는 반찬을 해서 보내거나 식재료를 준비, 어떻게 해 먹어야 하는지를 꼼꼼히 적은 편지글을 남편에게 여러 차례 보냈다.
한번은 즙장을 보냈는데 돌아온 남편의 반응이 아내를 무척 섭섭하게 했다. 여름날에 보낸 즙장 맛이 달라졌다며 타박을 한 것이다. 그러자 아내도 못내 서운한 심정과 맛이 변한 것에 대한 해명의 답장을 보낸 것이다.
즙장은 콩과 밀기울로 만든 메줏가루에 소금과 가지, 오이 등을 말린 채소를 넣어 숙성시킨 장이다. 다른 장이 2~3개월 이상 숙성이 되어야 제맛이 나는 데 비해 즙장은 담근지 7~9일이 지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속성장이다. 빨리 떠야 하니 발효 시간 동안 적정온도 유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즙장을 담그면 항아리를 두엄 속에 묻었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즙장을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는 바람에 두엄 속 온도가 내려가 적정 발효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 제맛을 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것이라도 남편을 생각하며 보냈던 것이다.
아내는 집에 남은 즙장 메주를 싸서 보내며 원하는 즙장맛을 내보시든가로 마음을 달랬다. 즙장은 담가 오래 두지 않고 바로바로 먹었으므로 집에는 즙장용 메주를 준비하여 두고 별미로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전주 즙장(醬)
즙장이란 집장 또는 즙지이 라고도 부르는 즙장은 우리 민족이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다음으로 상용한 전통장류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그 제조법과 형태가 거의 소멸되어가고 있다.
전주 즙장은 여름에 메주를 쑤어 띄워서 만든 메줏가루를 고운 고춧가루와 함께 찰밥에 버무리되, 무·가지·풋고추 따위를 소금에 절여 장아찌로 박고 항아리에 담아 간장을 조금 친 뒤 꼭 봉하여 풀두엄 속에 8, 9일 동안 묻어서 두엄 썩는 열로 익혀서 먹는 장이다.
집장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문헌은 1716년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이다.
'집장에 쓰는 메주는 밀 두말, 콩 두말을 물에 담갔다가 가루를 내어 찐 다음, 칼자루 모양의 단자를 만들어 가마니 속에 넣어 띄워 말린다. 이 집장용 메주 한말에 물 서되, 소금 세홉의 비례로 섞어서 장항아리에 담고 마분(馬糞) 속에 넣어 7일간 익힌다'고 되어 있다.
집장용 메주를 특별히 만들고 숙성법도 마분의 열을 이용, 발효온도를 조절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 특수한 장임을 알 수 있다.
별법으로는 콩 한말에 밀가루 대여섯되를 섞어 절구에 찧어 만드는 방법이 있다. 집장은 지금도 각 지방에서 만들고 있는데, 특히 전주지방의 것이 유명하다.
전주지방에서는 밀가루 한말과 볶은 콩가루(콩 다섯되)를 쌀뜨물로 반죽, 띄워 말린 메주를 가루로 만들어 감청장(甘淸醬)에 버무리고, 여기에 가지·오이 등을 넣고 마분에 묻었다가 3일 만에 더운 물을 타고 먹을 때 꿀을 섞는다.
'전주도읍지(全州道邑誌)' 중 '전주부읍지(全州府邑誌)'에는 전주부의 물산(物産) 외 진공(進貢)과 공물(貢物)을 상세히 기록했다.
여기에 말장(末醬)이 있다. 이 말장은 ‘내자시납(內資寺納)’이라 되어 있다. 내자시는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속한 관청이다.
궁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식품, 직조(織造), 내진연(內進宴)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말장은 메주를 말한다. 좋은 메주가 있어야 맛 좋은 장을 만들 수 있다. 전주에서 만든 메주, 말장은 궁에 납품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말장은 메주다. 어의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에 1~2월경 콩을 삶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즙장은 주로 여름에 먹는 장이기 때문에 메주를 4~5월 또는 7~8월에 만들었다.
또 즙장용 메주를 빨리 띄우기 위해 손으로 쥐어 작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고조리서에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는 일상적인 장이었다. 밀과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말린 메주가루에 소금이나 맛있는 간장을 섞어 만들었다. 일반 장과 다른 점은 가지나 오이 같은 채소를 말려둔 것이나 소금에 절여 물기를 뺀 것을 함께 넣는 것이다.
풋고추나 고추잎이나 동아를 섞기도 했다. 장의 일종이긴 하나 채소가 들어가 있어 별도의 조리를 하지 않아도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의 쌈장과 같은 형태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전주에서 말장을 잘 만들어서인지 ‘전주식 즙장 만드는 법(全州汁醬法)’이 '증보산림경제'(1766),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00년대 초), '박해통고(博海通攷)'(1800년대 중)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주식은 밀과 콩이 아니라 가을보리[秋麰米]와 콩이 주재료였다. 서유구는 '증보산림경제'의 기록을 인용, '임원경제지'의 '정조지'에서 전주(全州)식 비법은 “가을 보리쌀에 콩을 섞고, 쌀뜨물을 넣어 반죽해서 호두 크기의 덩어리를 빚는다"고 했다.
이렇게 띄워 만든 메줏가루에 오이와 가지 말린 것 한켜, 누룩 한 켜로 층층이 항아리에 넣어 말똥 속에 묻어 3일에 한 번씩 따뜻한 물을 끼얹어 9일이 지나면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항아리는 기름종이를 먼저 덮고 뚜껑을 잘 닫아야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장 항아리를 말똥[馬糞]이나 두엄 속에 묻어 그 온도를 유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말똥이나 풀을 쌓아 놓은 두엄 속의 온도는 평균 40℃를 유지하여 대기 중의 온도 차이에 관계 없이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게 된다. 또, 두엄 속은 습도가 높아 미생물의 활동량을 증가하기 때문에 발효균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즉 두엄은 장이 발효되기 좋은 가온 및 보온 환경효과, 적절한 습도 유지, 각종 미생물들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상대적으로 산소의 함량이 낮은 저산소환경을 제공했다.
‘증보산림경제’의 9권 ‘치선(治善)’편은 ‘전주즙장’이 별도로 언급된다. 서유규의 ‘임원십육지’에서도 전주즙장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20세기 초 전통 장류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별미장'으로 소개된다.
전주 즙장은 말똥 속에 묻는다고 하여 '말똥즙장'이라고도 하며 전주 수원백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승시키고 있다고 하여 백씨장(白氏醬)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아쉽다.
완주 천리장(千里醬)
천리장(千里醬)은 완주군 경천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조된 장의 한 종류를 말한다.
식품명인제도란 우리의 식품을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하여 식품산업진흥법에 따라 식품산업진흥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우수한 식품기능인을 명인으로 지정하는 제도이다.
윤왕순명인은 전통식품 제50호(식품 : 천리장, 어육분야)로 지정됐다.
우리의 전통 장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 역시 음식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한다.
천리길을 들고 가도 상하지 않을 만큼 갈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천리장은 파평윤씨 가문에서 집안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내림장이다.
세월이 갈수록 그 깊은 맛을 더해가는 전통장(醬), 오래 두고 묵힐수록 제맛이 살아나는 우리나라 대표 음식이다.
파평윤씨 가문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내림장인 천리장은 이 집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장이자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의 치선상(治膳上) 장제품(醬諸品)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이다.
윤명인은 파평윤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천리장을 개인적으로 전수해 오다가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치고자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장류 등 전통식품을 배우기 시작했고, 1992년 대둔산산내골식품을 설립하는 등 전통식품을 보전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2005년 서울국제요리경연대회에서 발효음식 전통장류 금상을 받았고, 2006년에는 전라북도지사 표창, 2007년에는 농림부장관 표창을 수여했으며, 2013년에는 제3회 전북농업기술원 농식품 가공품 콘테스트 대상을 받았고, 윤왕순씨가 천리장 제조기술로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지정 식품명인 제50호로 선정됐다.
천리장의 재료는 맛이 단 감청장(甘淸醬)과 소고기로 전통 방식 그대로 살린 감청장의 맛이 우선되어야만 깊은 맛을 살릴 수 있다.
윤명인의 고향인 완주군 경천면은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지 않아 종일 해가 들고, 또 축사 등의 오염원이 전혀 없어 물이 깨끗하고 맑아 장을 담그는데 최적의 장소이다.
좋은 간장을 위해서는 좋은 재료가 필수적으로 100% 직접 농사지은 해콩과 3~5년 동안 간수를 충분히 뺀 질 좋은 국산 소금을 주재료로 사용해 항아리에 품은 맑은 빛깔과 깊은 향, 그리고 단맛까지 어우러진 구수한 맛의 간장이 탄생한다.
윤명인은 천리장을 그대로 재현해 전통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천리장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전통 체험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처음 공개하는 고창 김정회 고가의 장담금 레시피
기자는 1995년 고창읍 도산리의 고 김정회선생의 생가에 살면서 장담그는 비법을 간직한 유정(裕庭) 김효현(金孝賢)여사(당시 78세)를 만났다.
김여사는 안동김씨 김사형(金士衡, 조선조 개국공신)의 20대 손인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선생의 자부로, 남편은 김병수(金丙洙,
1991년 작고)다.
또, 하서 김인후의 16대 손인 유학자 월담(月潭) 김재석(金載石)선생의 딸로, 17세에 결혼한 후 18세에 시집에 들어온 후 대대로 장 고유의 맛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시증조부모를 모시기 시작한 지 올해로 62년째가 됩니다만 장맛을 한결같이 하기란 어렵지요. 그러나 장맛은 아낙네의 인품과 가풍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이어 "아무리 장을 잘 만들었을지라도 장독대를 동쪽을 향해 마당보다 약간 높도록 반듯한 돌로 쌓아 놓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주의할 점을 말했다.
과거에는 장독의 숫자나 항아리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그 집안의 부를 측정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김여사는 "장의 맛이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기본으로, 장맛은 모든 음식 맛의 으뜸"이라면서 "모든 음식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는 까닭에 젊은이들이 장을 만들어 먹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고 했다.
끝으로 "시증조모로부터 꾸지람을 들으면서 각종 장과 된장을 만들었던 과거가 생각난다"며 "지금의 장 만드는 유산을 자손대대로 물려주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이라고 했다.
현재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교육학박사) 부인이 김여사의 뒤를 이어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다음은 장, 메주 담그는 레시피이다.
1.메주 쑤는 것
1)시기: 대개 동짓달(음력 11월)에 쑨다. 8월, 10월, 섣달에는 메주를 쑤지 않고 장도 담그지 않는다.
2)메주를 만들어 지푸라기로 열십(十)자로 묶어 시렁에 메달고 온돌방에서 노란 곰팡이가 생길 때까지 띄운다.
3)그 다음은 밖에 메달아 놓고 바람을 쐰다.
2.장 담그는 절차
1)시기: 정월, 이월, 삼월에 담근다. 그러나 2월달엔 영동달이라고
해서 담그지 않는 가정도 있다. 이 기간에 장을 담궈야 달고 맛이 있다.
2) 메주 4~5개 기준. 물의 양은 대두 1말 가량.
ㄱ. 물에 소금을 배합해 소금물을 만든다. 소금의 양은 정월에는 4되, 2월~3월에는 5되,
ㄴ.소금물을 가라앉혀 위에서 가만히 맑은 물만 뜬다.
ㄷ.메주를 물에 씻어 마른 후에
ㄹ. 장항 속 제일 밑에 누룩 1작을 넣은 후 그 위에 씻은 메주를 놓고 맑은 소금물을 붓는다. 이때 달걀을 띄워보아 그것이 동전만큼 올라오면 간이 맞는 것임을 알 수 있다.
ㅁ. 그리고 나서 통고추 6~7개(톡 쏘는 맛이 있게 하기 위해서), 대추7~8개(단맛이 나게), 숫덩이 4~5조각(더러움 방지)을 물에 띄운다.
ㅂ.이리하여 30~40일 후에 메주를 부서지지 않게 가만히 건져낸다.
3.된장 만드는 법
ㄱ.건져낸 메주에 소금을 넣고 반죽을 한다. 이때 맛을 보고 '아이구 짜다' 소리를 내야 된장 맛이 좋고 변하지 않는다.
ㄴ.만일 장을 다릴 때는 채로 잘 걸러(메주의 부스러기가 있으니) 서서히 한다.
4.간장(요사이 샘표, 몽고간장 같은 것)을 담그는 경우
ㄱ.간장을 담글 때는 작년의 묵은 장이 맛이 좋지 않을 때이다.
ㄴ.메주를 쑬 때 작은 덩이로 만들어 둔 것을 잘게 만들어
ㄷ.수수한 맹물로 메주를 잠길 만큼 붓고 하룻밤을 재우면 이가 부푼다.
ㄹ.이러한 메주에 묵은 장을 부어 그것이 아주 짜면 물을 치고, 그 짠맛을 조정한다.
ㅁ. 장을 다릴 때는 찹쌀 1되, 엿기름 1되를 각각 헝겊 주머니에 넣는다. 장다리는 솥에 넣고 끓인다. 이때 검은 콩, 대추를 약간 넣어 처음에는 불을 세게하다가 천천히 다린다.
5. 된장을 버무려 항아리에 넣을 때는 고추씨가루를 약간 넣어 반죽한다. 그것을 항아리에 넣은 후에는 그 위에 고추씨가루로 한 벌 덮고, 그 위에 소금으로 된장이 나오지 않게 덮어둔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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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12월 5일자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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