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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동성당 종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동성당 종


"주교 직책을 무시하고 선교사와 총독부 사이에서 일을 처리하려는 ‘포교규칙’ 문제로 서울의 총독, 뮈텔 주교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고 있다. 그 적용이 시급해져 즉시 항의해야 한다. 라크루 신부가 삼종을 울리는 것을 금지 당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제주도에서는 수녀들에게 종교 교육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915년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는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억압이 자세히 나타나있다. 일제가 만든 ‘포교규칙’이 그 대표적 예다. 포교규칙은 ‘선교’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제재하는 것으로 제4조에는 ‘총독이 주교들을 폐위시킬 권한’까지 담고 있다. 일제는 또 삼종을 울리는 것을 금지했으며, 수업시간에 수녀들의 종교교육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1915년 8월 23~26일

나는 페랑 신부와 함께 5시에 전주로 출발해 저녁 7시30분 도착했다.

다음날인 24일, 미사 때 영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500여 명 이상이었다. 10시 30분 강론을 시작하고 전주성당의 종을 강복했다. 77명이 견진성사를 받았고 장엄한 성체강복을 했다. 모든 일이 아주 훌륭히 치러졌다.

1915년 당시 전주성당(현 전주교구 전동주교좌성당) 드망즈 주교는 8월 24일 전주성당의 종을 축복하고 77명 신자들의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26일, 샤르즈뵈프 신부, 뤼카 신부와 전주에서 5시 기차를 타고 이리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두 신부는 연산역에서 내려 되재로 갔다. 대전의 급행열차에서 나는 첼리 남동부 아라스교구의 예수회원이자 9년간 선교활동에 종사하다가 미국으로 가는 다브루 신부를 만났다. 그는 대구에 들르겠다는 기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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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 종, 1915년 축복식

전동성당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 재정난을 비롯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14년에 성전건축이 마무리됐다.그러나 성전 내부의 전례에 필요한 시설과 성물 등의 설치가 다 이뤄지지 못해 축성식은 갖지 못하고, 축복식만 진행했다. 이후 축성식은 1931년 6월 18일에 진행됐다.

17년이란 긴 세월동안 내부공사를 진행해 마침내 착공한 지 23년 만에 성당이 완성된 것이다. 성당 완성 이후인 1915년 8월 24일에는 종 축성식을 가지기도 했다.

당시 성전 건축에 사용된 벽돌. 그러니까 이번 보수공사에서 4,000여장이 교체된 벽돌공사는 중국인 기술자 100여 명이 직접 구워 만든 것이다. 벽돌의 재료는 바로 허문 풍남문 성벽에서 나온 흙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수정비 기간 동안 가설비계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던 성당 정면 아치를 보면, 벽돌로 장식한 부분이 보인다. 바로 이것을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그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전동성당의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보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성당을 받치던 아치가 바닥까지 내려오거나 기둥머리까

지 내려오는데, 전동성당의 아치는 채광창이 있는 벽에서 멈추고 색깔을 바꿔 붉은 벽돌로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해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치명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했다.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한 전동성당의 종은 350여 kg입니다. 1915년 8월 24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아침에 미사를 봉헌한 바 900여 명이 영성체를 하는 등 미사가 끝나고 종 축성식이 있었으며, 그후 77명이 견진성사를 받았다. 하지만 종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전동성당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보좌였던 오기순 알베르토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성당을 비롯, 전주 서문교회, 남문교회 등 전주 시내 개신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오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한때 매주일 오전 10시 30분 교중미사 때만 전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종탑에 매달려 종이 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종 사진은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며 양청문 판화, 김시현 펜화, 홍성모 한국화 작품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