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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8> 천칠봉과 천광호 부자화가(父子畵家)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7> 천칠봉과 천광호 부자화가(父子畵家)

고 천칠봉화백과 천광호 작가가 13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전주 기린미술관에서 부자전을 갖는다,

한국근대미술 1세대 ‘비원(창덕궁)파’의 대표 작가 천칠봉(1920~84년) 화백과 그의 아들 천광호(1954~)화가. 

홍순무 홍웅표 부자전에 이어 부자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전이다.

40년 전에 작고한 비원파 화가 천칠봉작가의 40여점과 올해 70세가 되는 아들 민중미술가 천광호 작가의 30점을 전시한다.

1920년 전주에서 태어난 천칠봉은 양화를 보기도 배우기도 어려웠던 시절, 풍경을 보는 것으로 서양의 미술을 배웠다. 전주의 경기전과 한벽당, 덕진 연못, 다가공원에서 바라본 시가(市街)의 풍경을 그렸다. 

지역 서양 화단의 1.5세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천칠봉은 50년대 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한다. 이후 극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인 손응성(1916-1979), ‘폭풍의 화가’로 알려진 변시지(1926-2013)와 함께 창덕궁 뒤편 동산인 후원(後苑)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은 ‘비원파’(祕苑派) 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천칠봉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9번을 내리 뽑힌 ‘관전파’ 작가로, 소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국전’(國展) 작가로 알려져 있다.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였을 뿐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1963년 제1회 목우회 공모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도 역임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한국의 실경산수를 그린 풍경화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계곡과 산을 주로 택하여 그렸는데,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더 이상의 미화나 비하 없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성실하고 담담하게 화폭에 담았다.

1961년 '고궁'으로 국전에 처음 입선한 후 1969년까지 9년 동안 입선과 특선을 하고, 1981년까지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매해 전람회에 초청됐다. 1977년엔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한다.

 1963년에는 고전주의 구상계열 화가 모임인 목우회(木友會)가 주최한 제1회 공모전에서 2등상에 해당하는 ‘합동통신사장상’을 수상하고, 목우회원으로 추대된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까지 국책(國責) 사업으로 추진된 ‘민족기록화’ 작가로 참여한 바 있으며, 남원 '만인의총'의 '만인의사 기록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77년 일본 대판의 고려현대미술관 개관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일생을 구상 화가로 일관했다.

 천광호 작가는 민중화가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시대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천광호는 영남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2년 중앙대 박흥순, 전준엽, 이종구, 이명복, 황재형과 조선대 송창 등과 함께 민중미술 소그룹 '임술년'을 결성을 주도했다.
‘민족예술의 발전과 문화예술운동의 대중화’에 헌신해온 천 화백은 평생을 바쳐 한결같이 대구문화예술 지킴이 역할을 해왔다. 

그는 공공미술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자신의 미술 재능을 바탕으로 벽화 등 공공미술 작품, 그림, 기타 조형물을 제작, 보존, 보수하고 학교, 병원, 유치원 등 대중들이 이용하는 다중 집합 장소의 환경을 안전하게 조성하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70~80년대에 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위해, 90년대에는 노숙인들을 위해,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과 노숙인센터에 작품 200점을 기증,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2000년 대 초에는 대구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해 그들의 생활공간에 동료 미술인들의 협조를 받아 그림 300점을 모범 재소자들과 함께 직접 걸어 주었다.

지난 3월엔 전태일 열사 대구기념관 건립을 위한 작품 기증 전시를 대구에서 개최했다.

전시에 선보이는 천광호화백의 모습은 1974년 여름에 대구 비산동에서 연탄배달을 하면서 틈틈이 그려 완성한 최초의 유화이자 최초의  얼굴이다.
머리를 깍지않고 길게 기르고, 나름 의지를 불 태우던 때다.

 천화백은 항상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잊지않는 사람이다. 다문화 사회가 된 우리나라에 또다른 소외계층인 외국인근로자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 길을 가다가 병들거나 다친 노숙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대한민국 분단의 아픔을 표현한 ‘분단 33년(80호)‘ 과 80년대 전두환 군부정권이 언론사에 안기부요원을 파견하여 통제하고 장악했던 현실을 그린 ’보도지침(80호)’ 등을 그리기도 했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그려왔던 작품들을 간추려서 보여 주려다 보니 1호에서 100호 크기까지 천광호 화백 작품 100여 점과 천칠봉화백 작품 40점을 전시하게 됐다.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림이다.
천칠봉화백의  50대 작품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전시는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2024년 우수기획 전시지원 사업에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