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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0>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0>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어느 행복이 한가위 보름달 만큼 영혼을 곱디 곱게 수놓는다더냐. 행복의 바람을 담은 '보름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연약함은 도와주고',
'부족함은 채워주고',
'허물은 덮어주고',
'좋은 것은 말해주고',
' 뛰어난 것은 인정해주고'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 달이 하늘에서 돌고 돌다 보면 차츰차츰 커져 가지고 보름날이 되면 완전히 둥그런 달이, 환하게 쟁반 같은 달이 떠서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가을밤을 뜻하는 '추석'(秋夕)은 '예기'에 '봄은 아침 해, 가을은 저녁 달(春朝日 秋夕月)'이란 글처럼 둥그런 달은 가을의 선물입니다.

달의 정취를 아련하게 표현한 작품 중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가 있습니다. 

'소림명월도'가 실린 '김홍도필병진년화첩(金弘道筆丙辰年畵帖)'은 김홍도가 1796년 봄에 그린 화첩으로, A4보다 약간 큰 크기(26.7×31.6cm)입니다. 

20점을 묶었는데 50대 작가의 완숙한 경지가 담겨있다. 산수화, 산수인물도, 화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근경 위주의 구도와 담채, 독특한 준법과 수지법(樹枝法) 등 김홍도만의 화법이 읽힙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잡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숲. 나무 뒤에 둥근 달이 떠 있다. 한쪽에서는 개울물이 졸졸거립니다. 소림명월(疏林明月), '성긴 숲에 뜬 달'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달이 연출하는 가을의 소슬한 적막감이 일품입니다. 

그림의 심리적인 중심은 둥근 보름달입니다. 또 실제로 달이 화폭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나무들 역시 중앙에 집중 배치된 채 달을 가리고 있습니다.

앙상한 잡목들 사이로 뜬 보름달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구르미 그린 달’, 즉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烘雲托月)으로 그린 달은 세상사를 초월한 듯 무심한 표정입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 눈을 부비며 다시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소림명월도’에서 ‘구르미 그린 달’은 보잘것없는 잡목을 달빛으로 감싸 안습니다. 

달을 가리는 것은 사람일 뿐, 달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달은 오늘도 나의 엄마가 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 마음의 하늘을 밝게 비추입니다.

이 그림은 그가 연풍현감에서 파직돼 서울로 돌아온 이후 제작한 '병진년 화첩(丙辰年 畵帖)'에 수록된 스무 작품 중 하나입니다.

조선의 산수화는 이상화된 관념 속 자연을 그리거나, 웅장한 명승지를 그리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금강산 화첩'을 그린 정선이나 김홍도의 산수화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예외입니다. 깊은 산 속 달밤에 느낀 서정의 극치입니다. 벼슬 생활의 고됨과 파직된 아픔을 달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을까요?

달은 성근 나무 뒤로 쓸쓸하게 숨어 있습니다. 더할 수 없이 환한 보름달이지만,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땅과 나무를 비추는 달빛은 외로운 화가의 자화상으로 읽힙니다.

김홍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서당', '씨름', '무동' 등이 교과서와 광고 등에 끊임없이 사용되면서 그를 단지 풍속화에 능했던 화가라고 압니다. 풍속화는 그의 작품 세계 일부에 불과합니다.

많은 그의 그림 중 '소림명월도'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덜 언급되고, 덜 알려진 작품입니다.

비슷한 시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며 달밤 풍경을 뛰어나게 묘사한 독일 화가가 있습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을 응시하는 남녀'(1824)에서 화면을 채운 숲속 달빛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넓게 펼친 듯한 인상을 줍니다.

프리드리히 작품 대부분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또 숭고한 자연을 바라보는 뒷모습 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관조(觀照)'다. 관조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는 관찰하거나 응시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그림이 아닙니다. 그림에 그 어떤 이도 없는, 눈앞 그대로의 자연입니다. 그림 밖 화가와 달과 나무가 합쳐진 정적입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로 추정합니다. 김홍도와 달은 마침내 하나가 됐습니다.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입니다. '염불하며 서방정토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연꽃 위에 앉아 보름달을 마주한 뒷모습 승려는 프리드리히가 그린 뒷모습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뉘앙스입니다. 서방정토는 현실에서 죽음입니다.

'소림명월도'에서 본 보름달이 그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며 껴안고 있습니다. 더는 숨은 달이 아닙니다. 김홍도는 초월했습니다.

김홍도에겐 모든 게 있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 임금의 사랑, 사람들의 평판, 모든 분야를 관통한 그림 세계.

그에겐 딱 하나가 없었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은 사연과 죽은 해(年)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초라한 죽음입니다.

가을 성근 숲 뒤로 누리를 환하게 비추이며 둥두렷이 떠오르는 보름달. '소림명월도'에서 단원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가장 영원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연에 대한 이 완벽한 감정이입은 보는 이의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옛사람은 화론에서 말하기를 자연이 회화보다 나은 점도 있고, 회화가 자연보다 뛰어난 면도 있다고 합다. 소림명월도의 자연은 자연보다 더 자연답습니다. 그런 소림명월도는 자연인가, 그림인가요?

달은 바라만 보아도 넉넉합니다. 신비로운 모습은 상상력에 불을 지펴 신화를 낳았습니다. 

달은 우주가 지구인에게 선사한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얻어지는 선물은 없습니다. 선물은 대가가 따르기에 더 값진 법입니다. 밝음 뒤에 어둠이 따르듯이, 달은 아픔과 함께 떠오릅니다.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의 그림 속 나뭇가지에서 나는 듯한 가을 소리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모르게 '달타령'이 흥얼거려집니다. 

이는 전북 남원시에서 길쌈할 때 부르는 '베틀가'에서 나온 노래를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달아 달아 불근(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그저그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백혀 있구나. 억수지둥 지둥에도. 금도치로 다듬어서, 어여쁘게 집을 지어. 양쪽 지둥 높이 달아, 천년이나 살아볼까, 만년이나 살아볼까"(『한국구비문학대계』5-1)

우리 조상들은 둥그런 달을 보고 예쁜 집을 지어 오래오래 살고 싶은 조상들의 바람이 달의 노래로, 가을밤에 울려 퍼집니다.

한국인들은 추석의 달에 아름다움을 넘어선 행복의 바람을 담았습니다. 먼 그 옛날 달은 늘 둥그랬습니다. 

늘 둥그런 달이 하늘을 지키던 그 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순진했고, 서로가 서로를 통해 삶을 가꾸던 행복한 삶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위했기에 풍요함과 평온함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지려함'이 자리잡고 사람의 선한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 먹었습니다. '가지려함'은 '더가지려함'으로 자라났고, 그 괘씸한 놈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 차면서 사람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복한 삶, 풍요로움, 평온함도 시들어 갔고 '더가지려함'이 빈틈없이 자리잡은 몇몇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은 시달리고 빼앗겨야 했습니다. 결코 빼앗는 사람조차 행복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달은 아직도 그런 몸부림을 반복하면서 '더가지려함'이 여전한 지금까지 사람들의 그 예전 맑은 마음을 찾아 주려합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둥글고 밝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했던-사랑과 노동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달에 비추입니다.

지금 보니 달이 다시 둥글어지는 것을 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희망이 하늘로 떠올라 달을 채웠다고 바꾸고 싶습니다.

보름달 하면 왠지 가슴 떨리고 잊고 있던 오랜 꿈이 떠오릅니다.

항상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지만 바쁘게 살아가면서 자꾸만 잊혀져가는 꿈들이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그리고 꿈들을 붙잡아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종종, 타인의 떡이 보름달처럼 커보이게 됩니다. 둥근 하늘과 보름달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네 인생은 왜 늘 모가 나는지요.

꽉 찬 인생을 바라지만,  종종 뜻대로 되지않는군요! 달이여, 덜 찬 달이여,  돈도, 건강도, 희망도 덜 찬 인생이여!

여러분들의 모든 날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모릅니다. 둥그런 저 달을 온통 당신 품에 안겨주고 싶어하는 나의 마음을....

<사진>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리움미술관 소장)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달을 응시하는 남녀'(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김홍도의 '염불서승도'(간송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