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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6>진안 호암방앗간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6>진안 호암방앗간

전북 진안(鎭安)의 낮과 밤은 다르다.
진안의 속살은 낮과 밤이 확연히 다르다. 밤의 시간은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흘러간 물은 백운면의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하며, 같은 시냇물에 발을 두 번은 씻지 못한다.

진안의 달빛은 유난히 차갑다.
쏟아지는 달빛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기울면서 내동산, 마이산, 운장산을 지나간다.
팔공산 데미샘물은 제룡강을 지나 오원천과 압록을 거쳐 화계장터, 하동포구 500리길을 쉼없이 흘러간다. 달빛은 섬진강 하류에서 상류 발원지까지 비춰준다.

섬진강 상류 원천(原泉) 데미샘은 섬진강을 잉태한 엄마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진안은 무한한 생명을 잉태하고 태어나게 하고 키워주는 성스러운 고장이다.
옛날 고려시대에  진안은 월랑현으로 불리웠다.

달빛을 받은 호수가 일렁거리며 사람들의 생명을 번식시키고 삶을 키워주는 그런 달빛 파도라는 뜻도 숨어 있다.

진안은 남방정책보다 북방정책에 유리한 지형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까지만 해도 깍아 지른 듯한 절벽에 길이 없어 하늘과 돌 그리고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다하여 '운일암(雲日岩)'이라 하고, 하루중에 햇빛을 반나절 밖에 볼수 없다하여 '반일암(半日岩)'이라 불리워 졌다 한다.

저 머나먼 곳 남방에서부터 내동산 백마사를 지나 마이산을 지나 군상리, 군하리를 지나 용들의 고장 주천과 용담을 지나 한양으로 치닫는 기세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말(마이산, 마령)과 군(軍上·下里이) 있고 호수(水)가 있고 용(龍)이 있는 고장, 그곳이 진안(鎭安:진영, 군주둔지)이다. 

쉽게 풀어보면 용상이 있고 군진영과 군마가 있는 곳이니 당연히 왕이 나올 길지라는 뜻이다.
마이산 은수사에 가면 몽금척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개국의 꿈이 서린 삼한을 다스리라는 천신의 명령이 쉼쉬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생명의 강, 섬진강이 시작하는 곳이고, 500년 조선이 잉태한 곳이다.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진안에 용상이 있다면 앞으로 앉아야 할 왕은 누구일까?

지난 2001년 용문(龍門)이 열리고 용담호(龍潭湖)의 댐이 완공되어 담수가 되면서 누워있던 용(臥龍)이 하늘로 박차 오르는 승천의 시기가 이미 와 있다는 이야기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어머니는 솔바람 거친 좁다란 논두렁 길을 걸어 양푼 대야를 이고 오셨다. 

촉촉한 삼베 보자기를 걷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우리를 황홀케 했다. 조청에 찍어 먹는 달콤한 가래떡은 1년에 한 번 설날에만 맛봤다.

나는 항상 윗마을 정미소를 동경했다. 건장한 주인 아저씨가 쌀가마를 들었다 놨다 하시며 도정을 살피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다소 권위적이고 무서웠지만 가래떡을 뽑을 땐 거룩해 보였다. 

이때 도정(搗精: 곡식을 찧음)공장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다. 양철 지붕은 녹슬고 기울어졌다. 내 얼굴에도 주름이 늘고 내년에 회갑이란다.

김학곤화가의 작품 ‘호암방앗간’은 방앗간 아래 다리 위 방향으로 방향을 달리한 염소 2마리가 풀을 뜯어 먹고 있다. 개울 위로 4마리의 염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암방앗간은 1985년까지 박경만씨가 운영했다. 하지만 방앗간이 통폐합돼 용담소재지의 것을 이용했다. 방앗간에 접근하기 전, 다리 밑에서 고추를 말리기도 했다.

1996년 진안 호암마을 위로 다리가 놓아지고 있다. 용담면 호암(虎岩)은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김 효자가 노모가 병 들어 개고기를 먹고 싶다고 함으로 주문을 외워 호랑이로 둔갑하여 밤마다 개를 잡아다 노모를 공양했다. 밤마다 나갔다 들어오는 남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아내가 어느날 숨어서 남편의 둔갑술을 보고는 주문을 몰래 불태워 버리자 김효자는 다시는 인간으로 환생할 수가 없었으며 눈물을 머금고 방황하다가 죽어서 바위가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범바위라 부르며 한자로 호암이라 칭하게 됐다. 이 마을은 용담면의 관문에 있는 마을로 26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김화백의 작품엔 실향의 고통을 부채(負債)처럼 안고 살아가는 한 작가가 캔버스에 오감(五感)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대바람소리며, 토끼떼들이 무리지어 노닐었던 언덕배기며, 그리고 고향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잔뜩 묻어나는 풍경을 응축시켰다. 

고향 진안과 용담댐 수몰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월포리 다리 모습을 볼 수 있는 상전면 월포리 원월포마을, 월포리 양지마을, 구룡리 금당마을, 구룡리 불로치, 정천면 월평리 오동마을, 월평리 월평 뜰, 용담면 월계리 성남마을, 월계리 호미동마을, 와룡리 호암방앗간, 안천면 삼락리 경대마을, 노성리 상보마을, 상보 대양밭뜸 등은 실경산수화 대작이다.

‘호암방앗간(95x63cm)’이란 작품을 보면 흑염소가 흰 눈밭을 탐색하는 용담 풍경이 작가의 붓끝에 잡혀 애잔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그, 풍경은 오히려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데다 시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다만, 지는 석양빛이 아무리 슬퍼도 저 감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바라볼 일입니다. 용담댐 수몰 뒤 뿔뿔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도 함께 웃고 울던 마을공동체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이랄까.

불어난 계곡물은 이 땅을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르다.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당신과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는다.

 그대여!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하늘닮은'사람들의 희망, '하늘담은' 진안에 눈길 한번만 주시기를. 

용담댐의 윤슬(잔물결)은 더 찬란하고 이내 삶은 뜨거워진다. 당신이여! 장식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귀밑 수줍은 바람의 미동마저 한없이 고마워하는, 풋풋한 삶이고 싶다. 

언제나 기다림과 그리움의 색깔은 무채색이다. 

하지만 당신이 들려주는 삼라만상의 색깔은 전혀 어둡지 않다. 나는 당신이 떠난 그 겨울, 그 자리에 저기 저 바람으로 남아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용담면엔 방앗간이 많았다. 

월계리 성남방앗간은 1970년부터 21년 동안 이성노씨가 운영했다. 호계리 대방마을엔 1975년 강순봉씨가 놓았던 방앗간집이 있었다. 옥거리 운교마을엔 김윤현씨가 용담떡방앗간을 운영했다. 와룡리 원와룡마을엔 와룡정미소가 있었다.

방앗간 또는 정미소는 곡물을 가공하는 시설을 갖춘 곳이다. 벼를 수확해 쌀로 만들려면 정미소를 찾아야 했다. 군산에 기계식 정미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에 이용될 군량미를 비밀리에 수집해 조선시대부터 쌀창고로 이용되던 군산항의 창고에 보관했다.

일본군들은 이 쌀을 군량미로 보내기 위해 3대의 마찰식 정미기를 들여와 가공을 시작했다.
당시 군산에는 족답식 탈곡기 2대와 석유 발동기를 이용한 소규모 정미소가 한 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와 1930년대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소문이 나면서 우후죽순으로 문을 열었는데 정미소의 주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만석 이상을 생산하는 정미소가 14곳이 있었으며, 5만석 이상을 생산하는 곳은 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정미소 등 6곳이었다. 호황을 누린 것은 값싼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유랑 농민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전성기는 1970년 이전까지였다. 그후 정부의 양곡수매량이 늘어남에 따라 동네 정미소는 점차 쇠퇴했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원동촌, 장수군 천천면 선창리,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하이목, 남원시 운봉읍 가장마을, 순창군 순창읍 장덕리,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 정읍시 소성면 등계리,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완주군 이서면 애통리,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세심막,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서빈, 전주시 전미동 회리 등 전북 곳곳마다 정미소가 남아있다.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관기정미소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예전에 쓰던 원동기가 디젤엔진으로 바뀌었을 뿐 가동 방식은 예전 그대다. 

양철 지붕 아래 빛바랜 나무 처마 밑으로 흙벽이 감싸고 있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쌀 냄새가 밀려들고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풍경이 펼쳐진다. 얽히고설킨 나무 골조와 낡고 오래된 정미기기 곳곳에 뿌연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색장정미소는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의 외곽도로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정미소 건물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문화관람료를 내면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카푸치노 등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자리한 계남정미소는 사진가 김지연씨가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이를 사들여 수리한 루, 문을 열었다. 쌀 대신 추억을 찧는 곳이 바로 이 정미소다. 그러나 정미소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면서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정미소는 농촌의 마을마다 있을 정도로 흔했다. 마을 경제의 구심처이자 사랑방 역할을 했다. 쌀농사를 짓는 농민이 줄고 대형 도정공장과 가정용 정미기기까지 등장하면서 소규모 재래식 정미소는 설 자리를 잃고 서서히 사라져 갔다.

오래된 정미소가 언젠가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소중한 우리의 농경문화가 추억으로만 남지 않도록 잘 지켜질 수 있길 바란다.

지금은 보기 힘든 그 정미소가 공동체 박물관으로 변신,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양조장과 정미소라면 그 마을에서는 그래도 떵떵거리면 사는 집이었는데, 지금은 양조장은 찾아 볼 수 없고 정미소 녹슨 양철 지붕에 애꿎은 참새떼들만 옛 생각이 나서 들락거리고 있다.

문득 신영복교수의 글이 생각난다.  그 글을 옮기면 이렇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생각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강둑에 서 있고 물만 흘러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만 흘러가는 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함께 흘러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새로운 세기가 다가온다는 생각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새롭지 않고 대상이 새로울 수 없기 때문이지요.('나무가 나무에게', 165쪽)'

내 자신이 시간의 여울 속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대상만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그런가 하면 자신은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념에 빠지는 날이면 갈고 닦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남은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늦은 밤, 강물은 어둠을 삼켜 온 몸이 검게 변하고, 그러다가 간혹 지나는 자동차 헤트라이트 불빛에 허연 속살을 잠간씩 드러내곤 한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자동차 불빛을 강물에 닿기도 전에 아스팔트가 울컥 삼켜버리기 때문에 강은 모처럼 깊은 잠으로 빠져 든다. 그런 날이면 나도 생각까지도 접고 쉬고 싶다.

정미소 햅쌀로 빚은 떡과 막걸리가 그리운 한가위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사진:


진안 호암방앗간(김학곤화백의 작품)

진안 계남정미소

진안 산내마을 정미소

전주 색장정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