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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5> 새만금 내 첫 간척사업자는 이완용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4> 새만금 내 첫 간척사업자는 이완용

새만금사업지구 내 첫 간척사업이 조선시대 말 이완용 (李完用, 1858~1926년) 등에 의해 이뤄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은  ‘군산답사·여행의 길잡이(2003)’를 통해 조선 고종시대때 이완용이 현 새만금지구에 포함되어 있는 군산시 회현면 월연리 일대의 만경강 하구에서 전주에 이르는 만경강 상류 강변지역이 모두 포함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실시했다고 적고 있다.

이완용이 득세했을 때 정부 지원으로 쌓은 이른바 '이완용둑'으로 인해 현재의 선연리와 어은리 일대 등에 광활한 들판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선혜청 당상(堂上)인 민영익(명성황후 오빠인 민승호의 양자)과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만경강 하구에 수십㎞의 둑을 쌓아 옥답으로 바꿔 놓았다.

이 둑의 공사는 요즘 처럼 돌을 이용해 쌓은 큰 둑이 아니고 강변에 개흙을 이용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쌓은 원시적인 형태의 공사였다.

이완용 둑이 완공되자 넓은 벌판의 갈대를 태우고 곳곳에 외지에서 온 이주민을 소작농으로 정착시켰다. 이렇게 조성된 마을이 오늘의 회현면 월연리, 금광리, 증석리 등이다. 

새롭게 생긴 곳이 경작 면적 2백여만평에 달하는 오늘의 ‘수곡이곡 들판’이란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이완용 둑 바깥쪽에 더욱 크고 튼튼한 둑을 새로 쌓으면서 이 둑의 대부분은 형태를 잃었는데 회현면 오봉리 오봉초등학교 인근 수로변이다.

 이 둑은 새만금방조제가 만들어진 후 간척지로 변하는 바람에 과거의 구간을 이용한 오봉포구~ 어은리간 새로운 2차선 도로가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신설된 이 도로는 이완용 둑을 활용해서 만들어졌고 이완용 둑은 대부분 사라져 이젠 약 20~30m 구간만 농로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은 오래 전 군산지역 일대를 답사하던 중 회현면 일대 주민들로부터 ‘이완용 둑’에 관한 얘기를 듣고 관련 자료를 찾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한편 이완용은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묘는 익산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 서문밖교회(서문교회), 전동성당, 예수병원이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하는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892년 1월 미국 남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U.S)의 해외선교부는 젊은 선교사 7인을 한국에 파견한다. 

테이트 목사와 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Mattie S. Tate), 레이놀즈 목사와 그의 아내 팻시 볼링(Patsy Bolling), 전킨 목사와 그의 아내 메리 레이번(Mary Layburn),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가 그들이다. 이들을 일컬어 '7인의 선발대(The Band of Seven Pioneers)'라고 부른다.

이들의 선교지인 전주는 조선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의 고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매우 완고한 풍속을 견지한 곳이기도 했으나 일찌기 프랑스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천주교를 전도하고 있었기에 서양인에 대한 감정은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1894년 2월에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테이트 남매를 전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에 따라 남매는 3월 19일에 전주에 도착한다. 이들이 전주에 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맞게 되어 잠시 전주를 떠났다가 그 해 11월 다시 전주에 와서 선교활동을 재개했다. 뒤이어 1896년 11월에는 새로이 해리슨(W.B. Harrion) 목사가 전주에 와서 의료활동을 폈고 1897년 6월에는 레이놀즈도 합류해서 비로소 전주 스테이션이 확립되었다.

당시 전라감사이던 이완용은 조선의 발상지인 완산에 눈이 파란 외국인이 살고 있음은 불경한 일이라 하여 남장로교 선교부에게 이전을 종용했고, 선교사들은 그 제안을 수용하고 중화산동의 대지를 환지받아 옮기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화산동에 선교부가 이전하게 되었고 비로소 그 물 건너에 서문교회가 건립됐다.

이완용 공덕비

이완용의 공덕비가 한때 부안군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898년 가을 밤, 갑자기 큰 해일이 들이닥쳐 줄포 지역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으로까지 밀렸다. 
이완용이 전라감사가 되어 부안 변산구경을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이같은 참상을 살피고 부안군수 유진철에게 난민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제방은 견고하게 수리됐고 오늘의 대포가 생겼다. 이후 일제때 서반들 매립공사가 이뤄져 오늘의 줄포시가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이듬해 부안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장승백이(지금의 장성동)에 세웠다. 이른바 공덕비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는 수난을 맞았다. 비석은 개인에 의해 보관돼 오다 1973년 당시 줄포면장 김병기씨가 3,000원에 구입,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 놓았지만 1994년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철거됐다.  줄포면사무소 지하 창고에 반파된 채 거꾸로 선채 보관돼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