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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완용, 새만금 내 첫 간척사업

                                      어은리~ 오봉포구간 새만금간척지 내 신설도로


                                                                          '이완용 둑'

수년째 논란을 빚고 있는 새만금사업지구내 첫 간척사업이 조선시대 말 ‘매국노 이완용’ 등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군산시 학예사 김중규씨는 자신의 저서 ‘군산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조선 고종시대때 이완용이 현 새만금지구에 포함되어 있는 군산시 회현면 월연리 일대의 만경강 하구에서 전주에 이르는 만경강 상류 강변지역이 모두 포함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실시했다고 적고 있다.

김씨의 저서에 따르면 조선말기인 1890년대에 당시 선혜청 당상(堂上)인 민영익(명성황후 오빠인 민승호의 양자)과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만경강 하구에 수십㎞의 둑을 쌓아 옥답으로 바꿔 놓았다.

이 둑의 공사는 요즘 처럼 돌을 이용해 쌓은 큰 둑이 아니고 강변에 개흙을 이용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쌓은 원시적인 형태의 공사였다.

이완용 둑이 완공되자 넓은 벌판의 갈대를 태우고 곳곳에 외지에서 온 이주민을 소작농으로 정착시켰는데 이렇게 조성된 마을이 오늘의 회현면 월연리, 금광리, 증석리 등이다. 이렇게 생긴 곳이 경작면적 2백여만평에 달하는 오늘의 ‘수곡이곡 들판’이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이완용 둑 바깥쪽에 더욱 크고 튼튼한 둑을 새로 쌓으면서 이 둑의 대부분은 형태를 잃었는데 회현면 오봉리 오봉초등학교 인근 수로 변에 수백m가 남아있으며 지금은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김중규 학예사는 “군산권역을 일대를 답사하던중 회현면 일대 주민들로부터 이완용 둑에 관한 얘기를 듣고 관련 자료를 찾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간척으로 군산 섬 8개 사라져
 
간척 등으로 인해 한 세기여만에 전북 군산의 섬 8개가 사라졌다.
더욱이 2011년께 공사가 끝나는 새만금사업으로 섬 4개도 육지로 바뀌게 돼 이 지역에서 사라지는 섬은 모두 12개에 이른다.
최근 '군산도서지'에 따르면 1880년대에 71개였던 군산지역의 섬은 유인도 16개와 무인도 47개 등 모두 63개로 줄었다.
1890년 이완용(이완용)의 만경강 북안, 1920~1923년 일본 불이흥업사의 옥서면에 대한 연이은 농지조성 공사로 인해 입이도, 무의인도, 가내도 등 3개 섬이 사라졌다. 또한 1978년 군산지방산업단지와 1988년 군산국가산단, 올해 말 군장국가산단 군산지구가 완공돼 오식도, 내초도 등 5개 섬이 자취를 감췄다.
이 같은 5번에 걸친 대규모 간척으로 얻은 땅은 모두 1천6백17만평에 이르며 8백61만평은 산업용지로, 7백56만여평은 농지로 이용되고 있다.
앞으로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새만금사업이 완공되면 야미도, 신시도, 남가력도, 북가력도 등 4개 섬이 추가로 육지로 변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완용 둑'…그 자리에 2차선 도로가 놓이다
 
새만금지구 내 최초의 간척사업으로 알려진 만경강변 ‘이완용 둑’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완용 둑’은 새만금 내부개발이 최근 수년 째 본격화되면서 대부분 없어졌고 그 둑의 잔해물을 활용한 새로운 내부 도로(옛 오봉 포구~ 어은리간)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이곳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을사오적’ 이완용(1858~ 1926)이 매국노였다는 오욕에서 철저하게 역사 속에서도 묻혀있었다.
이완용은 아관파천 후 전라도관찰사(1898년) 등을 비롯한 총리대신까지 역임했었지만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이자, 일제의 주구였다.
입소문 등에 근거한 것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2006년 김중규 당시 군산시 학예사가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찾아내면서다.
 과거 증언과 자료에 따르면 이 둑은 조선 말 1890년대에 당시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조세 확충차원에서 만경강 하구에 수십㎞의 둑을 쌓았다.
본래 이 둑의 공사는 군산 어은리에서 전주에 이르는 만경강 북쪽 강변까지 포함되는 큰 규모였는데 후에 일제가 이를 확충하고 보강한 것이다.
이 둑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돌을 이용해 쌓은 큰 둑(제방)이 아니었고 강변에 개흙을 이용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이 넘어오지 않도록 쌓은 원시적인 형태였다.
이완용은 둑이 완공되자 넓은 벌판의 갈대를 태우고 곳곳에 외지에서 온 이주민을 소작농으로 정착시켰다.
이렇게 조성된 마을이 오늘의 회현면 월연리‧ 금광리‧ 증석리 등으로 경작 면적만도 660여만㎡에 달한다.
대규모 논은 ‘수곡이곡 들판’으로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이완용 둑’ 바깥쪽에 더욱 크고 튼튼한 둑을 새로 쌓으면서 이 둑의 대부분이 허물어졌으나 회현면 오봉리소재 오봉초등학교 인근 수로 변에 수백m의 둑이 남아있었고 얼마 전까지도 농로로 이용됐다.
하지만 이 둑은 새만금방조제가 만들어진 후 간척지로 변하는 바람에 과거의 구간을 이용한 오봉포구~ 어은리간 새로운 2차선 도로가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신설된 이 도로는 이완용 둑을 활용해서 만들어졌고 이완용 둑은 대부분 사라져 이젠 약 20~30m 구간만 농로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은 “오래 전 군산지역 일대를 답사하던 중 회현면 일대 주민들로부터 ‘이완용 둑’에 관한 얘기를 듣고 관련 자료를 찾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했다.(이기사만 군산투데이 정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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