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新里)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상관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북쪽으로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 서쪽은 완주군 상관면 의암리와 마치리, 남쪽은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서쪽은 완주군 구이면 광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신리는 신원(新院)이 있었다고 해서 신원, 또는 새원, 서원이라고 명명됐다. 신흥(新興), 수월(水月), 상원신(上元新), 하원신(下元新), 상신광(上新光), 하신광(下新光), 어두(魚頭), 신세대지큐빌아파트 등의 행정리가 있다. 전라선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며 신리역이 있으나, 사람을 태우지는 않는다.
파쏘봉 아래 옛 길가 바위에 새겨진 선정비들이 즐비하다. 파쏘 주변 옛 신리 터널 입구엔 전라도관찰사 이유원(李裕元) 불망비(1853년), 전라도관찰사 원인손(元仁孫)과 전주판관 김광묵(金光黙) 불망비, 전라도관찰사 김경선(金景善) 불망비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유원은 1852년(철종 3) 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2월 이임했다. '임하필기(林下筆 記)'를 지었고, 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원인손은 1765년(영조 41) 1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영조 43년 7월에 이임했다.
재임시 전주에 큰 불이 나서(정해대화) 민가 천여호가 불탔다. 우의정에 올랐고 아버지 원경하, 동생 원의손도 전라감사를 지냈다.
김광묵은 원인손 감사 때에 전주판관으로 문과급제자이다. 김경선은 1843년(헌종 9) 1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 헌종 11년 12월에 이임했으며,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 위쪽으로 둑길 따라 30m정도 가면 묘역 뒤 바 위에 전라우도암행 어사 조귀하(趙龜夏)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전라우도 암행어사 어윤중(魚允中), 전라도관찰사 이돈상(李敦相), 전주판관 이돈상, 전라도관찰사 조강하(趙康夏), 전라우도 암행어사 심상학(沈相學), 전주판관 민영직(閔泳稷) 등의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어윤중은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현지를 조사한 후 올린 12개조의 개혁안을 통해 조세와 재정 문제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개혁안에서 수취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과 함께 궁중에 소속된 궁방전(宮房田)과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둔 아문둔전(衙門屯田)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새로 뚫린 신리 터널에서 월암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오 면 철길 아래 철조망과 배수로 건너 바위에 전라도관찰사 정원시(鄭元始)와 전주판관 김좌현(金佐鉉)의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더 내려가 월암마을 조금 못가서 정여립 공원에는 대한제국때의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영세불망비와 전주군수 이삼응(李參應)비가 서있다.
조한국 선정비는 우물에 빠져 두 조각 나 있던 것을 꺼내 다시 세운 것이다. 조한국은 1900년(고종 37) 8월에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 고종 40년 9월에 이임했다. 전라감영 책판을 모아 향교에 관리토록하여 오늘날까지도 존속할 수 있도록 했다.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가장 먼곳에 판관 이창중 영세불망비(1778년)도 있다. 그의 아들이 이의상이고 손자는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이목연이다. 전라감영에도 판관이창중 불망비가 있다.
진동규 시인의 시 '댁 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는 조선시대 기축옥사의 참혹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정여립이)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上竹陰 下竹陰하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선비들의 죽음 그 떼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 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주인 뱃속까지 빨아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 답니다'
정여립(1546~1589)은 정말 역모를 꾀했을까. 아니면 날조된 옥사(獄事)였나. 그의 대동사상은 좌절된 혁명 사상인가. 기축옥사(1589년)로 1,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호남 인맥의 중앙 진출도 가로막혔나.
1589년(선조 22) 10월에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했다는 고변이 황해도에서 올라왔다. 정여립은 모역자로 몰려 진안 죽도에서 죽고, 이 모역에 가담했다는 자들이 잡혀와 국문을 받고 처벌됐다.
이해가 기축년이어서 이 옥사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는 당시 정권에서 열세이던 서인들이 정국운영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동인들을 타도하려는 옥사로 확산되면서 3년간에 걸쳐 동인 1,000여 명이 희생됐다. 선조 8년 동서분당 후 최초의 대옥사이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국에서 호남사림들의 위상이 약화됐고, 전라도 출신들의 중앙 진출이 억제되었으며, 전라도 향촌사회는 동서 갈등이 심화됐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당색에 따라 진위여부를 놓고 시각에 차이가 있고 현재도 학계에서 역모가 실재했다는 설과 당쟁의 산물이라는 날조설이 맞서 있다.
전라도의 역사를 저항과 차대(차별대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정여립 사건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됐다.
그러나 전라도의 저항은 삶의 높은 질을 추구하는 변혁적 성향을 지녔다. 또 전라도에 대한 차대는 이 지역의 저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적 성격을 지닌다. 전라도 지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저항을 변혁으로, 차대를 견제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정여립 사건은 전라도 지역사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호남사림은 선조 때 주요 요직을 차지했으나, 선조22년에 사실 여부가 석연치 않은 정여립 모반사건이 터지면서 중앙정계에서 그 위상이 약화했다.
고려시대에도 나주·경주·개경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난데없이 전라도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가 세상에 나와 나주세력이 퇴조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태조 왕건의 유훈이라는 훈요십조가 국가 문서고가 아닌 제8대 현종 때 최항 개인 집에서 나왔고, 제2대 혜종이 나주오씨 소생이며 최지몽 등 전라도 출신들이 활발히 활약한 고려 초 정치상황과도 잘 맞지 않아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돼 왔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서인(西人)에 속했다가 그가 따르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 이이와 서인의 영수 박순·성혼을 비판한 뒤 선조의 미움을 사 낙향했다. 그의 모반사건은 정철 등 서인이 처리하면서 3년의 옥사로 이어졌다.
정여립 사건은 당파의 격돌이 불러온 피바람이기도 했지만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칭되면서 사회적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호남 사림이 타격을 입고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승·판서로의 진출이 막히거나 인맥의 황무지가 된 것은 아니다.
정여립 사건은 '훈요십조'처럼 실체와 관계없이 호남을 비하하면서 호남-비호남 사이 의식의 장벽을 둘러온 사건으로, 실체를 바로 보려는 노력 역시 전주에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전라도 지역사 정립을 위해선 왜 이런 역사가 반복되었는지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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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죽도에서 정여립 선생에게<이종근>
1998년 상전면 죽도의 겨울 모습을 여러분에게 공개합니다.
죽도(竹島)는 용담호 상류, 장수군 장계면과의 경계 어름에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고원 속의 섬’이라 불립니다. 장수 쪽에서 내려오는 가막천과 무주 쪽에서 흘러드는 구량천이 죽도 양 옆을 스치며 아래쪽에서 합수머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죽도엔 산죽이 자랍니다. 겨울에도 흰 눈 사이로 푸른 댓잎이 청청합니다. 죽도는 상전면 수동리 내송 마을에 있으며, 산죽이 많다고 해서 죽도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내송(內松)마을은 옛날에 ‘소리실’이라 불리워졌습니다. 이 마을은 죽도폭포가 있는 깨끗한 물과 풍치 좋은 산이 아름다운 산수조화(山水調和)를 이루고 있습니다.
소리실은 마을의 남쪽으로 활과 같이 굽이치는 물길이 있어 궁벽하고 10리 이상이 무인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엎드린 꿩형국의 명당으로 만인이 피난할 만한 곳으며, 천반산엔 도화꽃형의 명당이 있다고 합니다.
물줄기가 죽도를 지나자마자 금강 상류에 몸을 섞습니다. 아직 계곡에는 얼음이 녹지 않고 얼음 밑으로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립니다. 중앙의 맑은 물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듯 졸졸 얼음을 녹이며 흘러갑니다.
죽도 전체를 나혼자 보고 느끼고 누린다는 생각에 세상 부러울게 없습니다. 간혹 보이고 움직이고 들리는 것은 산새들이나 산까치 울음 소리 뿐입니다. 그리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솔가지를 스치는 솔바람 소리입니다.
호수나 강 개울이 온통 다 얼어 빈틈이 없는듯해도 얼지 않은 숨구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숨구멍에 빠지면 못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고 깨지는 소리가 숨구멍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길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곳의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보입니다. 수심이 아주 깊으면 물빛이 검푸르게 보입니다. 깎아 지른 절벽에 도저히 발 한발 붙일 데가 없고 손가락 하나 걸 데가 없는 병풍처럼 바위벽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음악 소리로 들립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몸도 맘도 편안해집니다.
죽도와 육지가 이어지는 이곳에 날카로운 암릉이 있는 바, 지역 주민들은 그 모양이 병풍같다고 해서 병풍 바위로 부르거나, 닭의 벼슬을 닮았다고 해서 베슬 바위라고 불렀습니다.
죽도는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 상전면 수동리, 동향면 성산리의 경계에 있는 섬같은 산을 말합니다.
상전면은 진안군의 동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동향, 서쪽은 부귀, 남쪽은 진안, 북쪽은 정천, 안천과 인접해 있으며, 면의 중앙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금강이 위치한 까닭에 푸르고 맑고 깨끗한 환경오염이 전혀 안된 천혜의 고장입니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정여립(1546~1589)이 한때 은신했다는 죽도서당이 있었던 곳입니다.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리자 이곳으로 와서 관군과 싸우다가 자결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근방의 천반산엔 정여립이 군사를 조련했다는 전설이 있는 산성 터가 있습니다. 죽도는 조선시대 선비 1,000여명이 화를 입었던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이 꿈을 키우고, 또 접어야 했던 곳입니다.
“천하 공물, 즉 어느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핵폭탄 발언입니다.
‘역모와 음모’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그 전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반산과 죽도는 예전처럼 우뚝하고 강물은 희한하게도 꼬불꼬불 잘도 흘러갑니다. 역사는 승자편의 기록이라 하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장막 뒤에 가려진 패자의 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정여립은 맨 먼저 죽도를 찾아 서실을 지었습니다. 생전 그가 ‘죽도선생’이라 불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때부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하는 등, 꿈을 키우던 정여립은 역모의 주동자로 몰리면서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죽도로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험란하기만 합니다. 실패한 역사를 기억하기 싫어서일까요, 이정표 하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가운데가 뭉텅 잘려나간 죽도의 절벽은 칼날처럼 날카롭습니다. 그 날선 절벽 사이사이 지난해 잎사귀를 떨치지 못한 붉은 단풍이 선연합니다.
어느새 죽도에 시인 고은의 '만인보(萬人譜)'중 시 한 편이 흐르고 있습니다.
'일자 한 자 늘어놓겠습니다.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귀천 상하 계급 노선입니다.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 평등 노선입니다.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평등 노선을 강화합니다./(중략)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한데, 이 민족자결주의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 줄 뿐이라고,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거리라고’ 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
박새 한 마리가 놀라는 기색없이 오히려 다가서면서 나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추울수록 그리운 건 사람입니다.
간혹 보이는 계곡의 맑은 물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듯 졸졸 얼음을 녹이며 흘러갑니다. 이제 곧 이 얼음도 모두 녹아 내리겠지요. 겨울 끝자락 움켜쥔 얼음 아래, 봄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사람이 하늘입니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8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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