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도내의 학교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문화재가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학교는 어디일까?
군산 발산초등학교 교정에는 군산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 군산 발산리 오층 석탑(보물 제276호), 발산리 육각 부도(전북 문화재자료 제185호) 등 3점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군산 발산리 석등은 원래 완주지역에 세워져 있던 석등으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받침의 가운데 기둥은 사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모습으로, 표면에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의 형상을 새겼는데, 이같은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석등을 만든 시기는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산 발산리 오층 석탑은 완주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지금은 탑신의 한 층이 없어지고 4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으며, 고려 탑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다.
발산리 육각 부도는 1903년 군산에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시마따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하며, 현재 발산리 오층 석탑 및 석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 조형물에서 6각이 등장하는 것이 고려시대에 들어 중국 송나라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그 연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김제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과 같은 맥락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평면형의 특이함과 희소 가치만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조각 수법과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과 본관 포치(등록문화재 제172호)와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등록문화재 제176호)도 문화재다.
2005년 6월 18일 전북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신흥고등학교의 강당은 전주의 선교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장방형 평면으로 박공(박공지붕의 양쪽 끝면에 ‘ㅅ’ 자 모양으로 붙인 널빤지)면에 아치 3개가 연속된 출입구가 있으며, 내부 공간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2년 화재로 소실된 본관 건물은 가운데 정면 포치(porch, 지붕이 있고 대개 양옆이 트인 현관)만 남아 있다.
강당은 리차드슨 여사의 기증을 받아 1936년에 강당 겸 체육관 용도로 건립한 장방형 평면의 벽돌조 박공지붕 2층 건물로, 박공면에 3개의 아치형태가 연속된 출입구가 있다. 학교본관은 리처드슨 여사의 지원을 받아 1928년 지었으며, 이를 기념해 ‘리처드슨 홀’로 정했다. 본관이 1982년 화재로 없어지고, 남아있는 입구의 포치를 수리해 옛 본관 모습을 기념하고 있다.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은 초기의 공간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출입구의 캐노피는 마름모 형태의 붉은 벽돌 기둥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기둥 상부에는 벽돌을 돌출시켜 간략하게 표현하는 등 정면성을 강조한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학교 하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가 꼽힌다.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런데, 남쪽에도 오산학교가 있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919년 세워진 사립 오산학교다. 정주의 오산학교는 다섯 오(五) 자를 쓰고, 고창의 오산학교는 자라 오(鰲) 자를 쓴다. 설립 주체와 설립 경위는 다르지만, 두 학교는 민족교육을 대표하는 사립 중등교육 기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북 오산, 남 고창'이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두 학교의 위상을 잘 드러내준다. 호남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등교육 학교인 고창 오산학교는 1920년대 들어 고창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고창고보는 고창과 호남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는 학교였다. 1924년 고창고보는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고창 출신은 2명뿐이었고, 다른 졸업생은 서울 경기 경북 평북 평양에서 배우러 온 학생들이었다. 특히 고창고보는 설립 취지를 살려 다른 학교에서 반일·항일 문제로 제적당한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고창고보가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 조치를 당한 전주 신흥학교 고등과 학생 전원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고창고보는 1925년 본관을 지었지만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신·증축을 계속했다. 고창고보는 1937년 서관 신축에 이어 1939년 강당(317㎡)을 준공했다. 함석지붕에 붉은 벽돌 건물인 강당은 전교생 행사와 체육 활동 공간이었다. 해방 이후 고창고보가 고창고등학교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본관과 다른 건물들은 철거되고 새롭게 지어졌지만, 강당은 지어진 모습대로 남아 “북 오산, 남 고창” 소리를 듣던 학교의 상징물처럼 본관 옆에 서 있다. 고창고보 강당이 2005년 등록문화재 176호로 지정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창고보는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는 일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국어교사였던 염재 송태희는 고종 시절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서, 고창고보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송태희는 서예와 사군자에도 솜씨가 뛰어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9차례나 입상하기도 했다. 송태희가 그린 초기 고창고보의 전경이 남아 있다. 영어교사였던 정인승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으로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고창고보에 초빙되었다. 정인승은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을 만드는 일에 관여했고, 이 때문에 1942년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고창고보 체육교사였던 이병학은 덴마크 국민보건체조를 보급한 인물로서, 해방 후 한국이 처음 출전한 런던올림픽 한국 대표 선수 단장을 맡았다. 고창고보의 역사를 훑어보면, 송태희, 정인승, 이병학 외에도 실력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수많은 교사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019년은 고창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이었다. 1919년부터 2019년까지 오산고보-고창고보-고창고는 모두 1만8,594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전주고등학교 소강당과 풍남초등학교 강당이 신설된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1호와 2호로 지정됐다. 이어 김제 중앙초등학교 강당이 등록문화재 제 3호로 최종 등록됐다.
전주고등학교와 풍남초등학교는 개교한 지 모두 100년이 넘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북 인재의 요람으로서 지역교육사의 생생한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먼저 지난 1940년 지어진 전주고 소강당의 경우 현재 유도관으로 사용 중으로, 원형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근대 학교 건축의 건축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강당은 내부에 기둥 없이 확 트인 개방공간 내에 무대, 중2층부, 북측 아케이드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1936년 세워진 풍남초 강당 또한 근대 학교 건축의 건축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초에 비해 3칸 정도가 확장됐으며, 화장실 보수 등 재건축이 이뤄져 지금도 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부는 기둥 없이 확 트인 개방공간 내에 무대를 갖추고 있다.
김제 중앙초등학교는 지난 1911년 김제공립보통학교로의 개교 이후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김제지역 초등교육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곳이다.
중앙초의 전신인 김제공립보통학교는 일제강점기 초창기부터 설립되어, 교육열이 강했던 김제 지역민들의 교육수요를 모두 감당하지 못해 입학하기 조차 어려웠던 학교로 호남지역 일제강점기의 식민지교육현장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중앙초 강당은 1938년에 건립되어 80년 이상 보존된 건축양식으로 현재는 학교의 역사관과 다용도실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전북특별자치도는 산재돼 있는 등록문화유산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올해 등록문화재를 신설했다.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군은 천연기념물 제214호로 지정됐다.
나무의 나이는 약 280살 정도이고, 마령초등학교 운동장 좌우 담장 옆에 7그루가 모여 자라고 있다. 이팝나무가 모여 자라는 곳은 어린 아이의 시체를 묻었던 곳이라 해서 ‘아기사리’라고 부르며 마을 안에서 보호하고 있었지만 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26호 순화리 삼층 석탑은 순창여중 교정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옛 백제 지역에 서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백제 양식 특유의 우아한 곡선미가 느껴진다.
탑이 서 있던 터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왓 조각이 발견되어 당시의 옛 절터로 추측된다. 각 지붕돌 윗면 꼭대기에는 윗돌을 괴기 위한 높은 단을 두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구 이리농림학교 축산과 교사(등록문화재 제178호, 전북대 소유)는 특별 교실로 건립, 69년 동안 축산과 교실로 사용됐으며, 1930년대 당시 공립학교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현재 전북대 익산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대학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구 무장초등학교 교정에는 고창 무장 객사(전북 유형문화재 제34호), 고창 무장 동헌(전북 유형문화재 제35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 등 3점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신흥학교연혁지(新興學校沿革誌)'는
1982년 7월 10일 화재 사건으로 폐허가 된 옛 본관인 ‘리처드슨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본관 주춧돌 아래에서 발견된 문서다.
모두 한지에 국한문혼용체로 적혀 있다. 하지만 원본은 판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의 정도가 심하고 그 나머지 14장 중에서 절반은 분실해 버리고 절반만 남아 있다. 다행히 원본이 훼손되기 전에 누군가 남겨 놓은 14장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1927년 10월 11일 오전 10시 166평 3층에 ‘리처드슨홀’의 정초식을 거행하며, 1900년 9월 9일부터 1927년까지의 신흥학교 역사를 연도순으로 정리했다.
이를 ‘신흥학교27년사’로 불리우며 신흥학교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다. 1901년 신흥학교 1회 졸업생인 김창국 목사가 역현 편집위원으로 참여 도장을 찍었다. 정근 장로, 박연세 목사 등도 날인했다. ‘주후 1900년 9월 9일에 전북 전주군 서문 밖 완산 북쪽 숲 산기슭에서 미국장로회에서 파견한 예수교 선교사 이눌서(W.D.Reynoids)씨 사랑에서 현재 근무하고 있는 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양림리 교회 목사 김창국씨 일인으로 신문학문 학당을 (효시) 가르치다’ 이는 1쪽의 내용이다.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8호)이다.
조선시대 호남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던 희현당의 건립 과정과 목적 등이 기록된 전주신흥학교 교정의 완산희현당사적비(完山希顯堂事蹟碑)가 전북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전라감사 김시걸은 1700년(숙종 26)에 현재 신흥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마재 옛터에 희현당(希顯堂)을 창건해 흥학정신을 실천했다.
'희현당'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영학(營學)으로, 이곳에서는 매년 53개의 고을의 수령으로부터 추천받은 우수한 유생 중 최종 30명을 선발해 양성했다.
현재 희현당은 사라지고, 그 터인 전북 전주신흥학교 교정에 2개(사적비와 중수사적비)의 비석으로 구성된 전주 완산희현당사적비만 남아있다. 이 비석에는 희현당의 건립 과정과 목적, 운영 방법, 중수 등이 사실이 기록돼 있어 조선후기 교육 진흥의 실례로서 교육사적·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희현당은 창건된 이래 낡고 헌 건물이 여러 차례 중수됐으며, 1738년 전라감사 이주진의 경우 건물을 중수한 것 외에도 학칙 40여 조목을 마련하는 등 희현당 운영에 큰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산희현당사적비에는 전라감사 김시걸·이주진의 업적이 기록돼있다.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희(希)’자와 입신양명해 부모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현(顯)’자를 했다. ‘희현(希賢)’은 주돈이의 통서(通書) 지학(志學)에 ‘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현인은 성인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선비는 현인처럼 되기를 희망한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학교가 완성되매 공은 선비들에게 바램(希)이 없으면 과녁이 없이 활을 쏘는 것 같아 마음을 둘 곳이 없고, 그것을 나타낸다(顯)는 욕구가 없으면 갑자가 부지런하였다가도 게을러져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희현(希顯) 두 글자로 당명(堂名)을 삼았다. 희(希)는 무슨 뜻인가! 희현(希賢,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과 희성(希聖, 聖人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현(顯)은 무슨 뜻인가. 입신양명해 그 부모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아아! 선비들이 뜻을 희현에 두고 공부하며, 마음을 부모의 현창(顯彰)에 둔다면 지향(指向)하는 바가 바르고 학습하는 태도가 아름답지 않겠는가 ! 또한 근본을 찾아내어 근면하다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무릇 책을 옆에 끼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바른 학문에 젖어들어 큰 과업에 분발한다면 위로는 성현처럼 될 것이요, 아래로는 부모와 더불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니 이른바 희현(希顯)의 공과 현친(顯親)의 일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비는 김시걸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1707년에 세워졌다. 희현당중수사적비 비문에 의하면 1715년 관찰사 이집이 중수하려다 교체되어 이루지 못하였다가 이주진이 1738년 관찰사로 부임해 와서 건물을 넓히는 한편 학생 선발 등 학칙 40여 조목을 마련했다. 이 중수사적비는 1743년 세워졌다.
희현당에서는 ‘希顯堂藏板(희현당장판)’이라고 해서 18세기말에 여러 책이 출판됐다
희현당에서는 과거 교육교재를 만들기 위해 자체적으로 철활자를 제작해 여러 책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희현당 철활자로 가장 먼저 편찬된 ‘정묘거의록’의 경우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했다.
'정묘거의록(丁卯擧義錄)'이 전북 유형문화재 제287호로 지정됐다.
정묘호란 때 1627년(인조 5년) 김장생을 필두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유생들이 호남지역 의병을 모집, 거의했던 사실을상·중·하 3권으로 정리하고, 1책으로 간행한 문헌이다. 정묘거의록 내용 가운데 고창출신 의병장 오익창이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에도 참여한 사실이 확인돼 눈길을 끈다.
이는 희현당(1710년 전라감사 김시걸이 창건한 누정) 터를 기반으로 개교한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표지 안쪽에 ‘高敞 戊午六月二十六日光恩副尉金入 啓(고창 무오6월26일광음부위금 계)’의 기록이 있어 간행연대(정조 22년, 1798년)와 정조에게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간행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완판(完板) 활자의 대표적 활자인 희현당(希賢堂) 철활자(鐵活字)로 간행한 초기의 서적으로서 사료적·서지학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희현당에선 ‘希顯堂藏板(희현당장판)’이라고 해서 18세기말에 여러 책이 출판됐다.
http://www.sjbnews.com/news/news.php?number=826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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