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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4> 전북 문학과 문화 속의 들꽃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3> 전북 문학과 문화 속의 들꽃

꽃을 ‘보는 감상법’은 사람마다 모두 제각각입니다.

산수유는 노랗게 물든 색깔에, 벚꽃은 꽃보다는 그 규모에 눈길이 가는 법이요, 국화는 아찔한 향기가 특징인 반면 장미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모양에 앞서 향기가 다가오는 꽃도, 빛깔에 눈길이 가는 꽃도 있을 때란.

생명의 빛을 뿜어내는 신록의 기운들.
그 생명의 잎사귀가 드리운 그늘 아래.
쉬는 이들도 새롭고, 시간 또한 푸릅니다.
땅엔 붉은 진달래, 등불처럼 반짝입니다.

법흥사터 한쪽 커다란 귀룽나무에 연둣빛이 한창입니다. 가지가 퍼진 만큼 넓게 드리운 그늘에 오가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데크 계단으로 오르다 그 풍경을 굽어봅니다. 귀룽나무도 푸르고 사람도 푸릅니다. 그곳에서 쉬는 사람들의 시간도 푸르게 흘러갈 것 같습니다.

물오른 신록과 빨간 진달래꽃이 어울린 계단을 지나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습니다. 공중에선 연둣빛 잎이 반짝이고 땅에선 붉은 진달래가 빛납니다. 이 길에선 자꾸 멈춰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숲속도 숲밖도 온통 연둣빛 신록으로 빛났습니다.

최명희의 '혼불'에는 왜 여뀌가 자주 등장할까요. 소설의 배경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의 노봉마을입니다.

남원을 가로지르는 강은 요천(蓼川)이고, ‘요’자가 ‘여뀌 요’자라는 것을 알면서 그 궁금증이 풀렸습이다. 소설에서 여뀌와 늘 함께 등장하는 명아주도 어디에나 흔하디 흔한 잡초 중 하나입니다.

요교(蓼橋)는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있는 자연 마을입니다.

마을 주위에 여뀌[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잎이나 줄기에 털이 없으며, 매운맛으로 향신료나 약재로 쓰임]가 무성하고 마을 앞에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있어 여뀌 ‘요(蓼)’, 다리 ‘교(橋)’자를 써서 요교(蓼橋)라고 부르던 것을 우리말로 풀어 ‘여꾸다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형은 물이 동쪽에서 서쪽,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은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하므로 ‘역수다리’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변하여 요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또 옛날에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집도 몇 채 되지 않아 부정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여 요사스러울 ‘요(妖)’자와 마을 ‘촌(村)’자를 써서 요촌이라 불렀는데, 대유학자인 이석정(李石亭)이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여꾸다리로 바꾸었다고도 합니다.

1450년경 동래정씨 정시숙(鄭是肅)이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 유학의 대가인 신평이씨 이석정과 여산송씨가 들어오면서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꾸다리는 약 70여 가구가 모여 있어 인근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마을입니다. 마을 동쪽으로 호남선 철도 와룡역(臥龍驛)이 있고, 서쪽으로 국도 23호선이 공덕면과 김제 시가지를 남북으로 이어 주며, 북쪽으로 지방도 702호선이 지나면서 공덕면과 용지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21호인 이석정 선생 생가(李石亭先生生家)가 있습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74세의 괴테가 19세의 울리케를 사랑한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은교'에서 은교를 묘사할 때 쇠별꽃으로 표현됩니다. 만경강 철교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습니다.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 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었습니다.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 에 등장하는 ‘쥐바라숭꽃’이라는, 세상에 없는 이름을 가진 이 작은 들꽃은 명선이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 없는 꽃입니다.

쌓인 먼지에 뿌리 내리는 쥐바라숭꽃은 전쟁 중에 홀로 강인하게 살아가는 명선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명선이 머리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은 명선이가 곧 죽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의 이미지로 장미를 택한 것은 흔한 꽃이어서가 아닐 터입니다. 최고의 꽃인 장미에 비유해 엄마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냅니다.

양귀자의 소설 '한계령'에서 작가인 여주인공은 25년 만에 고향 친구 박은자의 전화를 받습니다.

은자는 부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미나 박’으로 나름 성공했다며 꼭 한번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그 마음을 진달래를 통해 절묘하게 담았습니다.

은자로 보이는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이었습니다. 여주인공은 노래를 들으며 큰오빠의 지친 뒷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립니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엔 사과꽃이 열두 살 소녀의 풋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나옵니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과수원이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진다. 사과꽃 냄새다'

초록색 안개에 싸인 과수원의 사과나무꽃은 황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과 함께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필자는 허석이 그리우면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풋사과가 매달린 과수원길을 한없이 걷습니다. 풋사랑이라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바람을 맞으며 익어가는 과실들을 자세히 보면서 향기를 꼭 맡아봐야겠습니다. 새삼 꽃은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문학은 꽃의 빛깔과 향기를 더욱 더 진하게 만들고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존재로 다가서는 존재입니다.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_2019&number=662123

이규보, 익산에서 배꽃에 반하다 

한반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우리 꽃들은 각기 계절을 알려 주며 피어나 자태를 뽐낸다. 겨울을 보내고 가장 먼저 피는 동백꽃과 매화, 봄이 왔음을 알려 주는 진달래와 산수유꽃, 무더운 한여름에도 향기를 뿜는 수수꽃다리와 찔레꽃, 그윽한 향기로 가을을 알려주는 국화 등이 그것들이다.

‘가여워라, 향기 머금고 푸른 바다 굽어보는데, 누가 붉은 난간 아래 옮겨 심을까? 무릇 초목과는 다른 품격이거늘 나무꾼이 똑같이 볼까 두렵구나’

바위틈 사이로 핀 진달래를 보고 읊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시에는 신라 시대 6두품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빈공과에 합격했음에도 끝내 골품의 벽을 넘지 못했던 한이 서려 있다. 

그는 886년 태산군(현 정읍 칠보· 태인 일대) 태수로 부임, 자신이 체득한 우수한 문화를 전북에 뿌리내리면서 태산선비문화를 열었다.

‘배꽃(梨花)’은 4월 중하순에서 5월 초순에 작고 하얀 꽃이 나무 가득히 핀다. 화신풍 중 해당화, 목련과 함께 춘분 절기의 두 번째 꽃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옥야현 객사 현판의 학사 채보문 '이화시'에 차운하다(沃野縣客舍 次韻板上蔡學士 寶文 梨花詩)’를 썼다.

‘처음엔 가지 위에 눈이 붙어 빛나나 의심했는데 맑은 향기를 독차지 하니 무릇 꽃인 줄 알리라. 한매를 다시 만나니 옥같은 얼굴 깨끗하고 짙은 살구나무 아름다운 받침 뽐내는 그를 비웃네. 푸른 나무를 뚫고 날아 오니 보기가 수월하고 떨어져 버려 흰 모래에 섞이니 알기가 어렵구나. 아름다운 사람 흰 팔뚝의 비단 소매를 열고서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정이 많음을 원망하네’
이는 ‘동국이상국집’ 10권에 실렸다. 이는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가 당시 전주부에 속했던 옥야현 객사에서 지은 작품이다.

 전주부 옥야현(沃野縣)은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예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배꽃은 꽃술에도 붉은빛이 없는 새하얀 꽃으로 한시에서도 유독 그 새하얀 풍경이 자주 묘사되었다. 작은 꽃들이 나무 가득 한꺼번에 핀 모습은 흡사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위 작품에서 시인은 겨울 매화의 차가운 고결함과 농익은 살구꽃의 화려함 사이에 있는 여인의 하얀 살결 같은 배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것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아리따운 여인의 소매 걷은 흰 팔의 이미지였다. 드러내 놓고 유혹하지도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지도 않는, 보일 듯 말듯 은근한 아름다움을 지닌 배꽃이야말로 어쩌면 조선의 여인을 가장 잘 표현한 꽃일 것이다.

1199년 전주목(全州牧)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로 온 그는 전주 등 전북 곳곳을 여행하며 접한 특이한 견문거리를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노년이 되면 젊어서 견문한 기록을 펼쳐보고 그 답답함을 풀겠노라고 했다. 

전주목(全州牧)에서 근무하고 떠날 때 시문 외에 전북 기행문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겼다.

부안이 낳은 여류시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도 ‘배꽃’을 노래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는 배꽃이다. 배꽃은 갈래꽃이다. 변덕스런 봄바람이 한바탕 불어제끼면 낱낱이 떨어진 흰 꽃잎들 허공을 비산한다. 그래서 ‘이화우’라 한다 배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늦봄에 헤어진 임을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까지 잊지 못해 꿈속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배꽃이 하얗게핀 달밤에 임을 생각하며 늦게까지 잠 못 이루는 심사를 묘사하는데, 배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배꽃은 한창 봄에 피기에 그리움과 설렘을 자아내는 꽃임에도, 그 눈처럼 하얗게 핀 모습이 달밤의 풍경과 더없이 어울리는 데서 한 조각 슬픔이 깃들어 있다. 아름답고 화사한 봄날, 임과 함께하지 못해 더욱 쓸쓸하고 안타까운 심사를 표현하기에 달밤의 흩날리듯 만발한 배꽃 이상의 풍경은 없다.

원추리꽃도 유명하다.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눈물 흘리며 훤당에서 부쳐 주신 머리카락을 받다(泣受萱堂寄髮)’를 지었다. 

'어머니께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멀리 있는 아들에게 봉하여 부치셨네. 먼 곳의 소식이 막히니나의 얼굴과 눈썹을 상상하셨으리. 나 또한 마주 대한 듯이 한 토막 기별을 보낼 수 있으리. 두 번 절하고 받아 봉힘을 뜯으니 흐르는 눈물이 턱에 엇갈려 어지럽네.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 손가락을 깨무셨을 텐데 하늘 같은 자애가 여기에 이르렀네. 완연히 슬하에서 모시는 것 같아서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 민둥산에 오르네. 돌이켜서 정수리 가운데의 털을 바치노라니 간장과 비장을 뽑은 듯 슬퍼지네. 편지를 봉할 즈음에 희끗희끗한 것을 가려내지만 아들의 노쇠함에 놀라 슬퍼하실까 두렵네’

‘미암집’ 2권에 실린 이 시는 함경도 종성에 유배된 작자에게 고향의 어머니가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낸 것을 받고 느꺼워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멀리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 된 처지에서 짐작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는 1571년 2월 4일에 전라도관찰사로 제수됐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전라감사 유희춘이 봉안사(奉安使)로 전주에 온 박순과 함께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獻芹歌)’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국화 옆에서’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 1915~2000)는 ‘국화 에필로그’를 남겼다.

‘황국은 그 잠 다 깬 황금의 내부와 같은 빛깔이 어리지도 야하지도 화려하잘 것도 없어서 그 빛깔이 우선 낯익은 어여쁜 아주머니 같아서 남같지 않은 게 좋지만 그 냄새에서는 또 우리에게 늘 영원에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시골다움이 배어 나와서 좋다. 단군 할아버지의 어머니께서 사람 노릇하다 식품으로 삼았다는 그 시골 중의 시골의 풀, 쑥과 한 계통의 냄새여서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군의 어머님을 본떠서 그러는지 장미보다도 화려한 무슨 꽃냄새보다도 이 시골뜨기 쑥이나 국화 냄새라야 안심이 돼 국화꽃을 말려 베개를 만들어서 일 년 내내 그 냄새를 잠자리에서도 맡고 지내지만, 이것은 저 먼 신시의 방향으로 향해서 우리를 늘 바로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으로 생각된다’

국화는 차와 술·떡·약, 심지어 베개까지 만들어 사용하는등 그 쓰임이 매우 큰 꽃이다. 그러나 시인 묵객들이 그토록 국화를 사랑한 것은 역시나 모든 꽃이 다 지고 난 이후 홀로 피어 빛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http://www.sjbnews.com/news/news.php?number=781148

순원화훼잡설

‘내가 보기에 국화는 사양하는 정신에 가깝다.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온갖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투지만 (중략) 국화는 입 다물고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이 마음을 다한 후에 홀로 피어 풍상에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지 아니한가. 동산에 이름없는 꽃들이 많다.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다. 꽃에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중략) 내가 어떤 꽃에 사랑을 느낄 때, 그 꽃의 이름을 모르면 어떠하랴. 그 꽃에 대해 사랑할 만한 게 없다면 이름을 지을 필요조차 없겠으나, 그 꽃에 사랑할 만한 게 있어 그 사랑을 느꼈다면 구태여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는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의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에 실린 글이다. ‘이름이란 구별짓기 위한 것이다. 만약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면 대소 장단의 크기, 청황적백의 색깔, 동서남북의 방위 등 어느 것 하나 이름 아닌 게 없다. 이것, 저것이라는 지시어도 이름이며, 명칭이 없어 무명화(無名花)라 부르는 것도 이름이다. 부질없이 이름을 지어 꾸밀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황윤석, 위백규와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꼽히는 여암 신경준. 순창 태생인 그는 고향에 피고 지는 꽃들의 모양, 생태, 일화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순원화훼잡설’이 그것이다. 순창읍 남산마을에 있는 누정 귀래정(歸來亭)을 세운 사람은 신말주였다. 하지만 후손 중 출세한 인사 대부분은 대대로 한양에서 생활했다. 귀래정에는 어쩌다 들렀을 뿐이다. 그후 8대가 지나 신선영이라는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와 귀래정에 다시 살게 됐다. 동쪽 바위 언덕에 새로운 누정을 짓고 못을 팠으며, 못 안에 섬 셋을 두었다. 또 여러 기이한 바위를 모으고 온갖 꽃을 구해 심었다.

그는 이를 ‘순창의 정원’ 순원(淳園)이라 했다. 신경준이 순원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살았다. 그 역시 학업과 벼슬로 인해 자주 고향을 비웠지만, 조부가 조성한 정원의 꽃나무를 사랑해 여러 꽃의 특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에 대한 고증을 겸해 단상을 붙였다. 

그 기록이 바로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린 ‘순원화훼잡설’이다. 연꽃, 난초, 국화, 매화, 복숭아꽃, 철쭉, 작약, 앵도화, 모란, 무궁화, 백화, 석류, 접시꽃, 영산홍, 옥잠화, 장미, 산수유…. 그러나 조밥나무(常山)ㆍ사계화(四季花) 등 이름이 생소한 꽃도 있었으며, 목가(木茄)ㆍ명사(榠樝)ㆍ면래(眠來)ㆍ어상(禦霜)처럼 어떤 꽃인지 알 수조차 없는 33종의 꽃이 기록돼 있다. 이조차 신경준이 보았던 꽃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당시 순창에 얼마나 많은 꽃이 피었는지 짐작이 간다. 꽃이 귀한 여름 한 철 붉은 꽃을 연달아 피어 올리는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한다. 

신경준은 '순원화훼잡설'에서 자미화를 ‘절도 있는 꽃’으로 예찬했다.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는 최근들어 섬진강학술세미나를 통해 ‘순원화훼잡설’의 향토문화자원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전통 정원인 남원 광한루원처럼 순창의 정원 콘텐츠 활용을 기대한다. 순원화훼잡설을 통한 축제 등 콘텐츠 개발이 시급한 과제다.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_2021&number=704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