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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2> 금계포란형 명당의 금계곡(金鷄谷)과 진안8명당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1>  금계포란형 명당의 금계곡(金鷄谷)과 진안8명당

전북한글서예협회가 31일 오전 11시
전북특별자치도 부귀면 거석리 금계곡마을
진안물소리펜션과 금계곡가든에서 임성곤회장, 김진형 한국서가협회 상임 수석 부회장 등 20여 명의 자문위원과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단합대회를 갖고 있다.

1953년에 만든 '진안군가'에

'마이산 높이 올라 내려다 보니/ 주천 안천 정천 합수쳐 용담이라/ 용담에 목욕하고 이골 평화를/ 천황사에 밤낮으로 기도하니/ 상전 담밭 김매는 아낙네들과/ 마령 평지 배미 배미 모내는 농군들의/ 우렁찬 풍년 노래 백운과 같이/ 퍼져가 집집마다 부귀와 성수/ 동향의 지하 자원 파내 가지고/ 진안에 살고 지고 진안에 살고 지고/ 에라 좋네 좋고도 좋네/좋다 지화자자 좋고도 좋다' 고 했다.

부귀면(富貴面)은 진안군의 서부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는 진안군 정천면, 동남쪽으로는 진안군 진안읍, 남쪽으로는 진안군 성수면·마령면,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완주군과 접한다.
 지명은 부귀산에서 유래한다.
 부귀산이라는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안의 진산(鎭山)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안지'엔  “가파른 산세에 용이 서린 듯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산세이다. 대인군자의 상을 닮았다. 군의 주산(主山)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진안현의 내면(內面)·외면(外面)·삼북면(三北面)에 해당되며 1914년 이들을 통합하며 부귀산의 이름을 따 부귀면이라고 했다.

거석리(巨石里) 는 마을에 큰 바위가 있으므로 ‘거석’이라 했다. 거석리는 남북으로 기다란 모양이다. 북으로는 운장산의 한 등성이가 남으로 내려와 갈라져 동으로는 북덕재를 이루어 그 산등성이를 경계로 부귀면 수항리 정자천 북쪽과 접경하고, 서로는 갈미봉을 경계로 부귀면 봉암리와 접경하고, 남서쪽으로는 들판 가운데와 산태미산을 경계로 부귀면 오룡리와 접경하고, 남으로는 부귀산을 경계로 진안읍 정곡리와 접경하고, 남동쪽으로는 부귀산의 한 줄기인 불당산을 경계로 하여 부귀면 수항리 정자천 남쪽과 접경한다. 

거석리의 중앙에는 정자천이 흐른다. 궁항리·봉암리·오룡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져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북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금계곡 마을을 거쳐 정자천과 합수하며, 남쪽 마곡 마을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또한 정자천과 합수한다. 하천 주변에는 충적지가 발달하여 약간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갈미봉 기슭을 따라 왼쪽부터 사인암·신거석·중거석·상거석·하거석 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고, 정자천 남쪽에는 금평 마을이 있다.
금계곡(金鷄谷)은 하거석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슬하에서 자란 과년한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아 오빠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괜찮은 집안에서 중매가 들어와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러던 중 등너머 마을에서 살림이 넉넉치 못한 양반가에서 혼처가 나왔다. 어느 날 풍수의 명인이라는 사람이 오빠를 방문하여 사랑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를 처녀가 듣게 됐다. 풍수사는 오빠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영의정]의 명당자리가 있다며 믿지 못하겠거든 날계란을 그곳에 묻은 뒤 보름 후에 가 보면 닭이 활개치며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부엌으로 가서 계란을 삶아 시녀를 불러 나누어 먹으며 다음에 사랑방 큰서방님이 날계란을 찾거든 자기가 닭똥을 살짝 묻혀놓은 계란을 갖다드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는 자기가 등너머 총각에게 시집갈 것이라는 소문을 내게 했다. 혼사 날짜는 풍수사가 금계포란형의 명당에 묘를 이장하면 좋다는 보름날의 전날이었다. 혼사를 마친 오빠는 묘를 이장하기 위해 정해진 축시를 기다리다 애가 타서 명당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어제 갓 혼인한 누이 부부가 명당자리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놀란 오빠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누이는 자신의 시아버지 무덤을 명당자리에 이장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빠는 누이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풍수사의 예언대로 누이의 후손 중에 정승에 오른 자손이 있었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벼슬길에 나아갔다고 한다.
금계포란형의 특징은 수많은 알을 부화하는 기운이다. 후학을 가르치고 기르는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고, 많은 제자들은 선생을 추종해 따르는 기운과 통한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키우는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안 8명당(八明堂)

진안에는 8명당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길지를 일컫는 말이 있다. 

8명당은 노래재[부귀면 황금리 가치]·송대[진안읍 운산리 송대]·원반월[진안읍 반월리 원반월]·동창[백운면 동창리]·원강정[마령면 강정리]·평장[백운면 평장리]·좌산[성수면 좌산리]·좌포[성수면 좌포리]이다. 

제1명당은 가치 마을 뒷산에 옥녀봉이 있는 곳이다. 옥녀봉은 운장산에서 뻗어 내린 줄기인데 이곳에 명당 자리가 있다고 믿고 많은 무덤을 썼다. 이곳에는 ‘옥녀창가’라는 명당이 있다고 한다. 마을 명칭도 풍수적으로 ‘옥녀창가’에서 유래하여 ‘노래재’라고 했으며 이를 한자화하여 ‘가치’라 한다. 

제2명당은 송대 마을이다. 송대 마을 주산은 우제산이다. 우제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송두날’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송대 마을은 마을 입구 쪽으로 진안에서 흐르는 물이 휘돌아 가고 있으며 안쪽에는 내오천 물이 휘돌아가면서 마을 아랫 부분에서 합수된다.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풍수형국상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때문에 마을에서는 절대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한다. 간혹 우물을 파게 되면 지반이 판석이라 황토 흙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내오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셨다고 한다. 행주형 지세에는 배의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돛대가 있어야 하는데, 돛대는 보이지 않고 하도치의 뒷산에 돛대 모양과 같은 ‘돛대혈’이 있다. 송대 마을이 진안의 제2 명당이라고 하여도 특별히 어느 곳이 명당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 아래쪽 언건 마을에 동씨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 무덤을 쓴 후에 높은 벼슬을 했다는 말이 있다. 무덤을 쓸 때 사다리를 놓고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매우 깊게 무덤을 썼다는 말이다. 진안지역에서 수몰 지역 결록을 작성한 조낙주의 송대 마을 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낙주는 풍수지리를 연구한 이로 1997년 용담댐 수몰 지역 마을에 관한 결록을 작성했다. 결록은 비결과 같은 것으로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결록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은 나말 여초 사람인 도선국사라 한다.

 “진안 8명당 중 두 번째인 송대는 내룡 산세가 두터우면서도 무거운 까닭에 어진 사람과 영웅이 나오는 터이다. 천월성이 내려 비치고 내뇌가 맑고 영원 건세하며 웅장하니 장군이 나오는 터이다. 따라서 남자는 충신이요 여자는 열녀가 나오며 이름 높은 명예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터이다. 양생 수납하니 영화가 있다. 청룡에 물소 뿔과 같은 우두각(牛頭角)이 있으니 첫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혈의 방위에 사유(四維), 사고(四顧)와 보필 조산이기에 장관급이 나오는 터이다. 또한 천건의 물이 서로 조아리니 자손이 총명 준수하다. 식록은 나라의 도움을 받아 풍족한 터이다. 지건방과 관방이 서로 응하니 횡재하는 터이다. 육수산이 높이 솟고 수류가 기특하여 어진 사위를 맞을 터이다. 북진수구이기에 장군과 재상이 나오는 터이다[송대(松臺) 정요요곤산(丁遙遙坤山) 후중중현영웅(厚重重賢英雄) 천월성분외정(天越星分外情) 용건세웅(龍建勢雄) 생무장인출(生武將人出) 남녀충렬유성명야(男女忠烈有聲名也) 양생수납영화출(養生水納榮華出) 좌청룡우두각 장방흉사(左靑龍牛頭角 長房凶事) 사유사고보필전조(四維四顧輔弼前朝) 상서출(尙書出) 천건산수읍(天建山水揖) 자손총명준수(子孫聰明俊秀) 식록황은좌명왕(食祿皇恩佐明王) 지건방관방동조(地建方冠方同朝) 주횡재(主橫財) 육수산 기수취(六水山奇水聚) 육녀현량(育女賢良) 북진수구 장상지지야(北辰水口 將相之地也)"

제3명당은 원반월 마을이다. 원반월 마을은 원오봉산에서 남쪽 줄기로부터 꺾어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아랫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형태가 반달 모양이라서 반월리라 칭한다. 원반월 마을은 운중반월(雲中半月)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며,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제4명당은 원강정 마을이다. 원강정 마을은 마이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광대 모습과 같이 익살스럽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광대봉을 주산으로 삼고 있으며, 용두봉(龍頭峰)을 청룡, 성산을 백호로 감싸 안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섬진강 상류 지류가 흐르고 있으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내동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다. 

제5명당은 동창 마을이다. 동창 마을은 갈미봉에서 내려온 줄기가 꼬깔봉을 거쳐 호두산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호두산에는 오마탈안(五馬脫鞍)의 형국이 있다고 한다. 

제6명당은 평장 마을이다. 평장 마을은 들 가운데 있다 하여 ‘돛들’이라 하며 배의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는 큰 우물 2개로 살았다. 우물을 파면 마을이 침수되고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제7명당은 원좌산 마을이다. 원좌산은 백마산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배미산[방미산] 아래 검은골 자락에 위치한다. 풍수적으로 마을 뒷산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인 와우혈(臥牛穴)이다. 마을이 와우혈인데 소의 머리가 좌측으로 있다고 하여 마을 명칭이 좌산이다. 

제8명당은 원좌 마을이다. 원좌 마을은 봉황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봉황산이 주산이 된다. 마을 앞에는 섬진강 상류인 좌포천이 흐른다. 물길이 마을 양쪽으로 나있기 때문에 풍수상 배의 형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을 수정부선[큰 배]으로 논을 조롱선[조그만 배]으로 생각한다. 원좌 마을은 남원 양씨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나 이후 진안 이씨와 김해 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명칭은 마을이 들판에 있다고 하여 ‘평지뜸’이라 불리다가 하좌·원좌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좌포라 불리게 된 것은 현재 좌포천이 본래는 봉황대 바로 아래로 흘렀는데, 물길을 돌리면서 마을 좌우로 물이 흐르게 되면서 좌·우포로 갈라지면서 부터라고 한다. 이 마을은 본래 남원 양씨에 의하여 형성되었는데 남원 양씨가 망하게 된 것은 마을에 승려가 시주를 하려 왔다가 오히려 학대를 하자 다른 승려가 찾아와 물길을 돌리면 벼슬도 하고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하여 물길을 돌리게 된 때문이라고 한다. 물길을 돌리자 재물이 빠져나가 양씨가 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