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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3> 전북과 콩쥐팥쥐, 장화홍련 이야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82> 전북과 콩쥐팥쥐, 장화홍련 이야기

 '콩쥐팥쥐'란 전래설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바로 이 설화의 배경이 된곳이 김제 외갓집마을로 밝혀지고 있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에 따르면 설화의 배경을 연구하던 중 '두죽제(頭粥堤)'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두죽제의 '두'는 콩(豆)와 팥(荳)의 유사형태로 현재는 머리(頭)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완산지’에 따르면 과거에는 콩(豆)로 표기돼 왔다는 것. 따라서 지금까지도 이 연못을 마을 주민들은 말뜻 변천에 따라 ‘팥죽이 방죽’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금구면 둔산 마을은 최씨가 약 540여 년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마을 동쪽 250여m 지점에 팥죽이 방죽이 있다. 이 방죽은 현재는 이서면 앵곡 마을에 속해 있으나 1914년 4월 1일 군폐합 전 관할구역이 김제군 금구면 대화리에 포함되었었다. 

팥죽이 방죽은 최씨 집성촌 후손들이 오랜 세월 가뭄에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로 활용되어온 소류지로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콩쥐팥쥐’ 이야기는 계모와 팥쥐의 구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콩쥐가 신이한 존재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변신을 거듭한 후 결국 살아나 계모와 팥쥐를 처벌한다는 내용의 설화다.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구전 설화 ‘콩쥐팥쥐’의 형성 시기를 추정하기는 힘들다. 

‘콩쥐팥쥐로’ 참으로 정감 있는 이름의 길이 전북에 2곳 있다. 한 곳은 김제에, 한 곳은 전북연구원 앞길로 전주 상림동에서 효자동 20여㎞에 이르는 길이다. 

 지방도 716호는 전주에서 완주를 거쳐 김제를 가는 도로다. 이 도로가 한국판 신데렐라 콩쥐팥쥐 원조 열풍을 몰고 왔다. 

전주시와 완주군, 김제시가 2012년 새 주소를 부여하면서 일제히 도로명을 ‘콩쥐팥쥐로’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 발단은 1919년 출간(대창서원판 pp.36에 있으며, 목판본은 없고 활자본임)된 박건회의 소설 ‘대서두서’ 등에 콩쥐팥쥐의 고향이 ‘전주 서문 밖 30리’로 묘사돼 있는 데서 출발한다.

'조선 중엽 전라도 전주 부근에 사는 퇴리(退吏) 최만춘(崔滿春)은 아내 조씨와 결혼한 지 20여년 만에 콩쥐라는 딸을 두었다. 불행하게 콩쥐가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조씨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최만춘은 살림과 어린 콩쥐를 위해 과부 배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계모는 자기의 소생인 팥쥐만을 감싸고 전처 소생인 콩쥐를 몹시 학대했다. 나무 호미로 산비탈의 돌밭매기, 밑빠진 독에 물붓기, 하루 만에 베 짜고 곡식 찧기 등의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콩쥐에게 마치 하인 부리듯 시켰으나 그때마다 검은 소 . 두꺼비 . 직녀선녀 . 새떼 등의 도움으로 콩쥐는 맡은 일을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직녀선녀가 준 신발의 인연으로 감사와 혼인하게 됐다. 그러나 콩쥐는 팥쥐의 흉계에 넘어가 연못에 빠져 죽게 되고, 팥쥐가 콩쥐 행세를 했다. 그 뒤 연꽃으로 피어난 콩쥐가 계속 팥쥐를 괴롭히다가 마침내 전라감사 앞에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했다. 감사가 연못을 물을 퍼내 콩쥐의 시신을 건져내니 콩쥐는 도로 살아났다. 감사는 팥쥐를 처단하여 배 씨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본 계모는 놀라자빠져 절명했다'

김제시는 콩쥐팥쥐 배경지로 716호 도로변인  용지면을 꼽았다. 완주군 역시 716호 도로변인 관할지역 이서면이 콩쥐팥쥐 고향이라고 추정했다.  전주시는 716호 도로 출발지점을 콩쥐팥쥐로로 지정했다. 

콩쥐팥쥐전은 전주권을 배경으로 한 조선중엽 가정소설이라고 하지만 남원에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른 바, ‘콩조시(콩쥐) 팥조시(팥쥐)’ 이야기는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계모한테 핍박받던 콩조시가 나랏님과 혼인해 잘 살았다는 응보담(應報譚)이다. 

‘옛날에 콩조시와 팥조시가 살았다. 팥조시는 데리고 들어온 딸이었고, 콩조시는 전처의 딸이었다. 콩조시는 예쁘게 생겼고 팥조시는 얼굴이 얽고 못생겼다. 어느 날 마을에 공진이굿이 들어오자 의붓어미는 팥조시만 데리고 구경하러 갔다. 콩조시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의붓어미는 콩조시에게 삼 한 꽈리를 내놓으며 그 삼을 다 삼고 나서 밑 없는 가마솥에 물을 채워 놓고 조 한 가마를 다 찧어 놓은 뒤에 오라고 했다.(...)콩조시가 울고 있는데 하늘에서 검은소가 내려와 솥 밑에 엎드렸다. 콩조시가 다시 물을 길어다 붓자 가마솥에 물이 가득 찼다. 이제 삼을 삼으려고 하니까 검은소가, “큰아가, 내 똥구멍에 광주리를 갖다 대라.” 하더니 삼을 다 먹어 버렸다. (...)검은 소는 죽은 콩조시 어미의 넋이었다. 콩조시가 빠진 연못에서는 함박꽃이 피었는데, 나랏님이 세수를 하러 가면 함박꽃이 피어서 나랏님을 보고 웃고, 나랏님이 들어가면 싹 오므리고 하였다. 나랏님은 이 꽃을 꺾어 농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런데 그 꽃 속에 콩조시가 있었다. 콩조시가 인도환생한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나랏님은 팥조시에게 벌을 내리고 콩조시와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 설화는 서양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그 유형이 유사하다. ‘잃어버린 신발’ 모티브도 동서양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어찌됐든 신발을 잃어버린 것은 사또(또는 원님, 왕자, 나랏님 등)를 다시 만나 혼인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콩쥐팥쥐 등 전북의 잊혀져 가는 전설을 되찾아 관광문화상품으로 활용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7128

진안군은 최근들어 주소정보위원회를 통해 진안읍 가림리 평가로 일부 구간에 명예도로명 '장화홍련로'를 부여했다.

군은 “향후 명예도로명판과 안내판을 설치해 군민과 관광객에게 안내하고, 진안 출신 인물들을 도로명에 활용하여 홍보 활동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명예도로명은 법정도로명은 아니지만 기업유치·국제교류 등을 목적으로 사회헌신도나 공익성 등을 고려해 특정 도로구간에 추가로 부여돼 상징성을 갖는다. 

‘장화홍련로’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은천삼거리부터 백운면 평장리 경계까지 평가로 일부구간(2km)에 부여됐다. 명칭은 부여일인 지난 21일부터 5년이며 기간 연장이나 폐지 여부는 주소정보위원회를 통해 심의할 수 있다.

진안읍 가림리 출신 전동흘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1624년 서울에 올라가 월사 이정구 문하에 들어갔으나 그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파천하니 그 때 나이 15세에 지원병이 되어 충성을 다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부친 전대승이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 고향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하면서 병서를 탐독했다. 그는 1644년 심기원의 역모에 창의, 나라를 평안하게 한 공이 있어 효종 대에 장사랑이 됐고,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현감을 지냈다.

1650년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 인재를 등용했다.

 우암 송시열이 전동흘과 이상진, 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니 이들을 ‘호남삼걸’이라 했다. 

그는 강원 병사, 충청 병사, 황해 병사, 경상 좌수사 등 4수사(水使) 7병사를 역임했고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됐다. 조정에서 청나라 몰래 창덕궁 옆에 대보단을 설치,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청국 사신이 이를 문제 삼아 조정에 압력을 가하자 전동흘에게 훈련 대장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내려 해결토록 했다.

 무엇보다도 철산부사로 있을 때 장화홍련의 원혼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장화홍련전은 조선 효종시대 평안도 철산부사 전동흘이 배좌수의 딸 장화와 홍련이 계모의 흉계로 원통하게 죽은 사건을 처리한 실력담을 토대로 쓰여진 고전소설이라는 것이다.

'장화홍련전'은 조선시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그 실재 이야기는 1659년대 (조선 효종) 평안도 철산현에서 일어났다.

'조선명신록'에 전동흘이라는 철산부사의 활약이 나온다. 전동흘이란 사람이 평안도 철산 부사로 부임해서 배좌수의 딸 장화와 홍련이 계모의 흉계로 원통하게 죽은 일을 처리하는 활약상을 그렸다.

세종조 평안도 철산에 배무룡이라는 좌수가 있었는데, 선녀로부터 꽃송이를 받는 태몽을 꾸고 장화와 홍련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첫째 부인이 죽자, 좌수는 아들을 얻기 위해 허씨와 재혼을 한다.

허씨는 용모가 추하고 사나웠으나 아들 셋을 낳았고, 장화와 홍련을 학대한다. 장화가 결혼할 때가 되어 혼수를 장만하라는 좌수의 말에 장화에게 갈 재산이 아까워 끔찍한 흉계를 꾸민다.

허씨는 큰 쥐를 잡아 장화의 이불 속에 넣어두고 장화가 낙태하였다고 배좌수를 속이고, 자기 아들 장쇠를 시켜 못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 순간 호랑이가 나와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잘라가고 만다. 허씨 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배좌수도 장화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인데, 딸의 말을 믿지 않고, 낙태의 증거라고 쥐새끼를 들이미는 허씨 부인의 말을 믿는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부녀간 근친상간의 의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배좌수는 천하의 몹쓸 애비다.

홀로 남은 홍련은 장화의 죽음을 알고 그 못에 찾아가 물에 뛰어든다. 홍련은 왜 언니를 따라 죽음을 택했을까? 허씨 부인이 무서워서? 아버지가 못 미더워서? 어쨌든 그 이후, 연못에서는 밤낮으로 곡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철산에 부임하는 부사마다 하루를 못 넘기고 죽자, 신임 부사 정동우가 철산으로 부임한다. 귀신이 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화홍련의 사연을 알게 된 정동우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배좌수와 허씨 부인을 불러 사건을 추궁하고, 처음에는 쥐새끼로 만든 증거물에 전전긍긍하다가, 배를 갈라 거짓증거임을 밝혀낸다.

못에서 시신을 건져 안장하고 비(碑)를 세워 혼령을 위로하고, 악독한 허씨 부인과 아들 장쇠는 벌을 받게 된다. 그날 밤 두 자매가 부사의 꿈에 다시 나타나 사례하며,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이라 축원한다.

배좌수는 목숨을 구하고 시름에 잠겼다가 윤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 한다.그것도 딸 뻘인 열여덟 살 여인이랑. 이후 누명을 벗은 장화홍련은 쌍둥이 자매로 환생하여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는 이야기이다.

계모와 전실부인 자녀의 갈등 이야기는 예전부터 '콩쥐팥쥐', '신데렐라', '헨델과 그레' 등 동서양의 많은 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못된 계모 이야기가 많았을까?

계모이야기에서 대부분의 아버지는 존재감이 없고 무능력하다. 어리석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좌수의 경우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환생한 장화홍련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조선시대 가부장적인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고, 따라서 죄가 없고, 장화홍련은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효심이 극진하고, 과연 그러면 되었을까?

전동흘의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절친의 표상' 이상진과 전동흘의 관계를 엿보게 하는 '전주정승(全州政丞)'이야기가 ‘청구야담’과‘학산한언(鶴山閑言)’에 실려 있다. 

일반인에게 익숙한 장화홍련전과 전동흘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본 만큼 지역 홍보와 관광객 유치의 효과도 자못 기대된다.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number=82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