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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3> 전주 가톨릭센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3> 전주 가톨릭센터

'가톨릭센터 開館(개관)
全州(전주), 4층 2백평 건물
오지리 婦人會(부인회) 寄附金(기부금)
1萬(만)5千(천)佛(불)로 竣工(준공)

【전주】 지난 3월 19일 하오 6시 가톨릭센터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1959년 8월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에서 1만5천딸라의 원조를 받아 1960년 11월에 착공한 바 있는 동 문화센터는 총공사비 2천여만환으로 약200평의 4층 건물을 준공하였던 것이다.
이날 낙성식에는 당교구 대리주교를 비롯하여 전북대학교 유총장(*유영대) 그리고 내외 귀빈 다수 참석하에 성대히 거행되었고 대리주교 <아오스딩> 김재덕 신부와 전북대학교 유총장이 테에푸를 끊었다. 센터 동 건물은 당시 해성중학교장이며 주교관 비서 하제흥 신부가 관리인으로서 임명되었으며 각종 어학을 비롯하여 聖物 판매 또는 보육사업 등 여러가지 가톨릭적인 문화사업을 할 것으로 전북 문화사업에 기대되는 바 자못 크다.(1962-4-1  가톨릭신문 제321호 3면)'

1962년 지난 3월 19일 오후 6시 전주 가톨릭센터 낙성식이 열렸다. 
1959년 하재홍(Hager Gergius) 신부가 교구 내 문화사업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부인회로부터 3,000 여 만환의 기부금을 받아 1960년 11월에 착공한지 16개월만에 개관식을 가졌다.

당시 가톨릭센터는 4층 건물 200여평으로당시 상황으로 전주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건물에 속했다. 

가톨릭센터는 1970년 10월 기숙사를 증축했고, 같은해 같은달 30일 신관을 준공, 지금 현재 모습인 대지 2,599㎡, 건물 연건평 4,182.17㎡의 모습을 갖췄다. 

'70년 3월 1일에 착공, 총공사비 2,653만원을 들여 만 8개월만인 70년 10월 31일 준공된 동센타는 총건평 959평에 3층 건물로 전주시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위치상으로 호남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농촌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의 하나인 농촌근대화 작업에 발 맞추어 직ㆍ간접으로 정신근대화작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동센타 내에는 전주교구청 학생회관 별관 사회관이 있으며 2백50명을 수용할수 있는 강당 1개ㆍ회의실 1개(80명 수용) ㆍ토의실 3개(20명 수용) ㆍ다과실 1개(40명 수용) ㆍ공동 침실(60명 수용) ㆍ식당ㆍ기획실ㆍ탁구장ㆍ당구장ㆍ도서실ㆍ오락실ㆍ재봉실ㆍ세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JOC 사무실ㆍ학생회 사무실ㆍ신용조합 사무실이 각각 동센타내에 들어있다.
전주 가톨릭센타의 특징이라 하면 침식을 할 수 있게 공동 침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어 피정이나 소규모의 세미나 심포지움 등을 할 수도 있어 피정의 집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0년 10월 31일 개관이래 사용내용을 보면 각 정당 좌담회ㆍ경찰정보과 반공교육ㆍ각종 학술대회 및 세미나ㆍ각 직종 회의ㆍ발기총회ㆍ와이엠시에이 록원 다함께 노래부르기ㆍ부부클럽 등 단체명을 다 들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가 있다고 센터 5인 상임위원 대표 아니타 스탈프씨는 만족한 웃음을 띤다. 이렇게보면 자연 신자 단체보다 일반 단체가 3분지 2가 넘을 정도로 활발히 이용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신자들이 더 활발히 이용하도록 권장하며 사상강연ㆍ신부연수 교육ㆍ지도자 훈련ㆍ교리교사 강습ㆍ신용조합 강습ㆍJOCㆍ학생회원들의 교육 등을 갖을 예정이며 한편 음악감상ㆍ레크레이션ㆍ가톨릭 여성 교양강좌ㆍ윤락여성 선도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동대표는 말한다.
센터의 운영은 주교 감독하에 5인 상임위원회가 있어 이들이 계획을 세우고 운영을 한다면서 앞으로 보다 좋은 운영의 합리화를 기하기 위해 상임위원회에 평신도를 등용하여 폭넓고 다채로운 운영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한 해 동안 이용자수는 평균 한달 5천명으로 1년간 5만2천명이 다녀갔으며 하루 평균 2~3번 회의가 있는 셈이 된다.
(1971-12-12 가톨릭신문, 제795호 4면)'

건물의 공식 명칭은 천주교 전주교구 청사다. 주교 집무실과 총대리신부를 장으로 하는 사무처,사목국·관리국·성소국·홍보국·사회사목국·청소년교육국 등 사무처내 6개 국과 강당, 회의실, 토의실 등을 갖춘 문화시설을 겸비했다. 

역사적인 발자취와 기능으로 볼 때 가톨릭센터는 전주 시민들의 생활문화공간이자 교구청사, 그리고 전북 민주화운동의 산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우선 개관 초기인 60년대는 물론이고 80년대까지도 전주 시내에는 이렇다 할 문화공간이 없었다. 

때문에 이곳 센터는 음악감상회와 학술행사·문학강연을 비롯,  정당 집회, 결혼식까지 다양한 행사가 줄을 이어 항상 사람들이 들고 나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1976년 이곳에 다방 영업이 시작됐을 때는 센터 다방이 각종 단체의 예비 모임 장소로 이용된 기억이 있다고 관계자들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와 함께 가톨릭센터는 재야와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전북 민주화운동의 발원지였으며, 집회와 시위의 시발점이었다
전북 민주화운동가들의 쉼터이자 일종의 안전한 방패기지였다. 

실제로 당시 민주화운동가들은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들기 일쑤였고, 센터를 시위공간으로 이용했다. 
각종 농민 집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후원하는 노동집회를 포함 재야와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시위의 첫 시발점으로 모두가 이 곳을 선택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 첫 자치교구인 전주교구는 가는 곳마다 순교자들의 발자욱과 핏자국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이른바 역사적 공간인 셈이다. 

가톨릭센터 강당은 인혁당사건과 가톨릭농민회사건 등 시대적 사건들에 대한 진상규명의 장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폭정과 민주화의 필요성을 배우는 학습의 장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활발해진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활동은 섬유노조를 중심으로 여성 조합장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민주노조를 탄압해 80~82년 사이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청계피복노조가 강제로 해산되거나 와해되었다. 내가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다.

당시 전북지역에는 한국노동청년회(JOC)에서 상근간사로 일하며 와이에이치(YH) 노조 지원활동을 했던 이철순이 79년부터 익산에 내려와 살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창인동성당에 ‘노동자의 집’을 만든 뒤에는 노동운동이 더 활발해졌고 서울 쪽 노동운동가들도 전주에 자주 내려왔다. 

문정현 신부는 60년대 후반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노동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 78년 4월 동일방직 노동자 124명이 무더기로 해고되었을 때는 당시 사목국장이었던 리수현 신부와 함께 전주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유인물을 뿌렸다. 
그때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이 싹튼 셈이었다. 이후 82년 전북지역에서 유일한 민주노조였던 태창메리야쓰 노조 탄압 사건을 겪으면서 문신부는 노동운동의 일선에 됐다고 한다.

가톨릭센터가 시국강연과 민주화를 갈망하는 집회장 소로 점점 비좁게 느껴질 즈음, 중앙성당과 전동성당 남문교회 성암교회 등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10.26을 전후해서 빠르게 진격해오는 군화발을 한 동안 감당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재야와 학생들의 전열도 가다듬어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오는 대학의 정문을 넘어 팔달로로, 육교로, 도청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가톨릭센터는 여전히 군사정부에 대응하는 유일한 전진기지였다. 유신반대의 막내 475세대가 그랬다.

1960년대 민주화 기도회가 열린 전주 전동성당과,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자발적 학생 시위가 최초로 열린 전주고, 또 군부독재 반대를 외친 투사들의 집결장소였던 전주 성광교회와 가톨릭센터 등은 모두 전북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치열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하고 기리는 사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단지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에 담긴 가치를 이어가는 일.
지금이라도 현장의 함성이 담긴 장소를 지키고, 시대정신이 담긴 문화 예술 사업을 키워야 한다.

전주시청 주변에는 삼각형 형태의 이른바 '삼각지'가 군데군데 형성돼 있다
이면도로를 경계로 들어선 이 동네는 한때 지역 최고 번성지의 하나였다. 하지만 신도심 개발과 함께 도심의 달동네로 전락,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전주시 덕진구 서노송동에는 전주시청을 중심으로 8개의 삼각지(9만5112㎡)가 조성돼있다.
삼각지는 시청 앞에 6개, 전고 방향으로 1개, 동부시장 방향으로 1개 등이 있다.
한 곳당 2만5107㎡에서 5265㎡ 규모인 이 삼각지는 40년 전만 해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주변 관공서를 배경으로 식당과 슈퍼, 술집, 하숙집 등의 영업이 잘 됐기 때문.
실제로 당시에는 전주역, 완산구청, 가톨릭센터 등 각 기관과 단체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대부분이 유동 인구를 유발하는 시설물이어서 이 일대 상권형성을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지난 80년대 초, 일부 시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전주시청이 새로 들어섰지만, 전주역과 가돌릭센터 등 다른 시설이 빠져나갔기 때문.
 교통이 편해지고, 기숙사가 만들어지면서 전주고 학생들의 하숙도 예전만 못하다.
여기에 기반시설의 노후화까지 겹치면서 이 일대 삼각지가 도심 달동네로 전락한 것.
한 때 지역 최고 번성지가 달동네로 전락한 것이어서, 시의 대책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가톨릭 역사는 물론 1970∼80년대 도내 민주화운동 산실로 자리했던 전주가톨릭센터가 43년간의 서노송동 시대를 마감,  '간납대' 인근으로 옮겼다.
천주교 전주교구청은  전주시 남노송동 옛 전주공전 자리 1만6,000여 평에 새로운 보금자리 부지를 마련, 2005년 9월 1일 오후 3시 30분 기공식을 가졌다. 2007년 교구 설정 7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숙원사업으로 진행해왔던 새 센터 전주교구청사가 2004년 10월 추진 선포식을 가진데 이어 기공식을 갖고 본격 공사에 들어가 2006년 완공했다.
18만명에 달하는 전북 지역 천주교 신도들을 위한 새 교구청이 2007년 4월 13일 문을 열었다.

천주교 전주교구(당시 교구장 이병호)는 교구 설정 70주년을 맞아 남노송동 옛 전주공전 자리에 1만3천여평 규모로 새 교구청을 마련하고 이날 교구청 마당에서 기념미사 겸 축복식을 열었다.
전주교구는 1937년 4월 13일 대구교구에서 분리했다. 특히 분리된 교구들의 교구장이 모두 외국인인 상황에서 유독 전주교구엔 한국인인 김양홍 신부가 교구장으로 임명돼 최초의 한국인 자치교구가 됐다.

선교본당 제도 신설하며 지역 복음화에 앞장
교구민 힘모아 숙원사업인 새 교구청사 건립
전주교구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구의 역사는 교회의 초석을 놓은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신유박해(1801) 순교자들인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이순이(루갈다) 동정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인해 전주교구는 1937년 전북감목대리구를 대구교구에서 완전히 분리,  지목구로 승격, 한국 교회 사상 첫 번째 한국인 자치 교구로 설정됐으며 교구장에 김양홍 신부가 임명됐다.

당시 교구의 현황은 신자 1만9300명, 한국인 신부 15명, 본당 14개, 공소 177개, 성당 44개(경당 포함), 신학생 5명, 상주 회장 201명, 전교 회장 35명이었다.

이같이 열악한 상황에서 출범한 전주교구는 2대 교구장 주재용 신부(재임 1942~1947)를 거쳐 3대 교구장 김현배 신부(재임 1947~1960), 4대 교구장 한공렬 신부(재임 1961~1971) 등이 교구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1960년에는 전주시 중노송동(현 인보성체수도회 자리)에 교구청사를 완공했으며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전주대목구도 교계제도상의 정식 교구가 되었다.

한공렬 주교는 전주 서노송동에 지어 사용하던 가톨릭센터를 증축, 1970년 교구청을 가톨릭센터로 옮겼고, 이듬해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로 전보됐다.
교구는 한동안 교구장 없이 직무대리 체제로 운영돼오다가 1973년 직무대리였던 김재덕 신부가 제4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김주교는 성소육성과 인재양성을 위해 사제들의 유학을 적극 추진했으며 청소년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강조, 사회 정의구현에 앞장서며 평신도들의 역할과 사명을 각성시켰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김재덕 주교가 사임한 후, 1983년 제주교구장이었던 박정일 주교가 제6대 교구장으로 부임한다.
박주교는 재임 기간 중 실전되었던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유해를 찾아냈고,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해 본당 확장에 힘을 기울여, 재임 기간 중 17개 본당을 신설했다. 그는 성지 개발과 피정의 집 건립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남미 페루에 3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하여 그곳 교회의 사목을 돕도록 했다.

1988년 박주교는 마산교구장으로 전보되고 1990년 이병호 주교가 제7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주교는 치명자산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가족묘 시굴 작업과 기념성당 봉헌식,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했다. 또, 전산화를 통한 교구 행정 정비와 교회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성서 통독 운동과 선교 본당 제도를 신설,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던 교구청 신축에 필요한 부지를 2003년 7월 15일 자로 매입, 2005년 9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새로운 교구청 신축에 온 교구민이 함께 힘을 기울여 2007년 4월 13일 축복식을 갖게 됐다.
전주교구는 70주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100년을 향해 증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다짐을 하고 있다.

[전주교구 약사]

▲1784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이승훈에게서 세례 받음

▲1791년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그의 고종사촌 권상연(야고보) 순교

▲1877년 블랑 신부 부임

▲1889년 전주지역 최초로 전주(현 전동)본당, 금구 배재(현 수류)본당 설


▲1937년 전주지목구 설정, 초대 교구장에 김양홍 신부 임명, 전주본당 주교좌본당으로 설정

▲1941년 제2대 교구장 주재용 신부 취임

▲1947년 제3대 교구장 김현배 신부 임명

▲1957년 전주지목구가 전주대목구로 승격, 대목구장 김현배 주교 임명

▲1961년 제4대 교구장 한공렬 주교 임명

▲1962년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확립으로 전주 교구 설정

▲1966년 전국 최초로 본당운영위원회 구성

▲1973년 제5대 교구장에 김재덕 부주교 임명

▲1982년 제주교구장 박정일 주교 제6대 교구장으로 부임
▲1984년 첫 해외선교사 파견 미사

▲1987년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행사

▲1990년 제7대 교구장 이병호 신부 임명

▲1997년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신앙대회, 선교본당제도 도입, 전주가톨릭신학원 설립

▲1998년 전주교구사 Ⅰ, Ⅱ 발간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제1회 '요한루갈다제' 행사, 교구 전산망 개통

▲2003년 새 교구청 부지 매입

▲2005년 레지오마리애 50주년 신앙대회 개최, 9월 1일 새 교구청 착공

▲2007년 4월 13일 자치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미사 및 교구청사 축복식

▲2017년 제8대 교구장 김선태 신부

2017년  5월 13일 군산 월명체육관에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천주교 전주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선태 사도요한 주교 서품과 착좌 미사가 열렸다. 김선태 주교의 임명은 설정 80주년을 맞은 천주교 전주교구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27년 만에 임명된 새 교구장의 발자취에도 남다른 이목이 쏠린다.

*가톨릭신문 1970년 11월 8일자 제724호 3면에 해성중고교장 이상용씨, 건축가 김후영씨 교황훈장을 받았다고 나온다.


"가톨릭신문 1970년 11월 8일자 제742호 3면에 전주가톨릭센타 준공 기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