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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2> 탄허스님의 글씨 ‘화리생련(火裏生蓮)’ 과 ‘향상일로(向上一路)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1> 탄허스님의 글씨 ‘화리생련(火裏生蓮)’ 과 ‘향상일로(向上一路)’ 

‘화리생련(火裏生蓮)’ , 불꽃 속에서 핀 꽃

 고난을 딛고 다시 대가람을 이룩해 강원도 불교문화의 중심 월정사를 대변하는 말이 있다. 

김제출신 탄허(呑虛)스님(1913~1983)의 '불꽃 속에서 핀 연꽃'을 의미하는 ‘화리생련(火裏生蓮)’은
 선필에서 오대산 자락에 내재된 불교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탄허는 한국의 고승이자 불교학자, 속명은 김금택(金金宅)이다. 탄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택성(宅成)이다. 

1913년 김제군 만경읍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기호학파 최익현 계통의 이극종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도학에도 상당히 밝았다. 15세부터 도(道)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은 뒤 1934년 22세의 나이로 오대산 상원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한암의 밑에서 15년 동안 수행했다. 오대산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지냈다.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동양철학에도 해박해 일본·대만 등 해외에서 열린 동양학세미나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대만대학교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았다.

 1983년 월정사 방산굴에서 나이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화엄론' 40권과 '보조법어', '사교(四敎)', '사집(四集)', '초발심자경문', '반야경', '능엄경', '기신론', '원각경'등 많은 불전을 번역했다. 인촌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입적 후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화리생연(火裏生蓮)'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연꽃이 핀다는 의미다.

이 글은 서산대사의 휴정(休靜)의 선시(禪侍)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 권1에 '시의천선자(示義天禪子)'란 제목으로 벽천선자(碧泉禪子, 의천, 義天)에게 준 전형적인 선가시 2수에 있는 말이다.

'불길 속에서 연꽃을 피게 하는 솜씨 비록 뛰어나나 천 개의 칼로 해의 운행을 막는 것만 하겠는가(火裏生蓮雖好手 爭如千劍日中行)'라고 되어 있다.

혹은 '화리화(火裏花)', '화중화(火中花)', '화중생화(火中生花)'모두 같은 뜻이다.

  ‘향상일로(向上一路)’ ,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외길’

탄허스님의  ‘향상일로(向上一路)’는 불가에서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외길'을 일컫는다. 

선문(禪門)의 극처(極處)를 ‘향상(向上)의 일로(一路)’라 한다. 

혜거스님은 “탄허스님은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면서 " 큰 인재가 나와야 좋은 세상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탄허스님은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강조했다. 

스님의 화엄사상을 접하면 자신이 모자란 부분을 없애고 한 단계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발심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어느 고인(古人)이 말씀하기를 "향상의 일로는 일천 성인(一千聖人)도 전(傳)하지 못하거늘, 학자(學者)들이 공연히 애씀이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고 했다.

‘향상(向上)의 일로(一路)’는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의 골수(骨髓)요, 불법의 구경법(究竟法)이다. 

이 향상일로를 알아서 살활종탈(殺活縱奪)의 자재(自在)함을 얻어야만 선지식이 되어 비로소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진리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으로 깨달은 비밀의 법 즉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하고 지도할 수 있다.

'향상일로(向上一路)'는 ‘벽암록’에 전한다.

 중국 당나라시대 반산(盤山 寶積, 720~814) 선사가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말했다고 한다.

'위를 향하는 하나의 길을 천명의 성인이라도 전하지 못하거늘 배우는 이들이 공연히 몸만 괴롭히는 것이 그림자를 잡으려는 원숭이 같구나'

向上一路 千聖不傳 學者勞形 如猿捉影)
(향상일로 천성부전 학자노형 여원착영)

‘향상일로’는 최고의 진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천명의 뛰어난 선지식이 다 모여서 전하려 해도 말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궁극의 진리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순수 무결한 진리의 법이라 해도 그 법을 진리라고 고정 짓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법은 고정될 수 없고 집착될 수 없다. 법을 법이라고 하면 더 이상 법이 아니다. 다만 이름을 법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법을 ‘이런 것’이다고 틀에 가둬놓고 이 안에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이 바깥의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은 그것을 가두는 불법이라는 틀에 있지 않다. 

즉, 진리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으려니와 이것이 진리라고 고정 지을 수도 없는 것이 진리이다. 그래서 ‘무법가설(無法可說)’이라,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내세워 설할 만한 그런 법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법이다’ 하는 순간, 그건 법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런 법(진리)이 있다고 그것을 찾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찾으며 몸만 괴롭히고 있지만 마치 원숭이가 달그림자를 잡으려고 헤매듯이 찾지 못하고 헤매고만 있구나, 그런 말이다.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사람은 과연 행복했을까? 스스로 만족해서 그냥 인생을 잘 살아갔다면, 그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인간이 아니다. 

그가 일궈낸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해야만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 터인데, 그 마지막 도약이 결코 쉽지 않다. 그 마지막 도약은 그냥 열심히 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이뤄지지 않는다. ‘행복을 위한 마지막 도약’, 그건 오직 한 길 ‘낮아짐’으로서만 가능해지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