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35> 고창출신 대목장 유익서
고창군 대산면 '호은정(湖隱亭)'은 정계원(鄭桂源)의 은거 터로, 율촌리 180번지에 있었던 정자였다.
이는 용오정사(龍塢精舍, 전북 유형문화재 제91호)와 고수면 예지리 세한정(歳寒亭) 등을 지은 구한말 호남지역 대표 대목장 유익서(庾益瑞, 1882~1944)가 지었다. 그는 무송유씨다.
용오정사는 용오 정관원의 우국정신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2년(1885)에 세운 사당으로, 홍의재·경의당·상운루 등의 건물이 있다.
사당에는 정관원과 기삼연의 영정(초상)을 모시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건물로 내부 구조가 화려하다. 1934년 사당 덕림사를 세워 정관원을 주벽으로 하고, 정관원의 아들 극재 정방규를 추배했다.
자그마한 연못을 앞에 둔 서원 겸 사우 ‘용오정사’는 담을 두르고 모아 지은 세 채의 건물을 한데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유익서가 지은 대표 건축물의 하나이다.
“본명은 진현(晋鉉)이고, 초명은 창현(暢鉉)이며 익서(益瑞)는 자이고. 관향은 무송이니 희충(喜充)의 아들로 1882년(고종 19년) 성송면 낙양리에서 출생했다. 외종숙 남궁연에게서 목공의 기예를 배워 대목(大木)이 되어 1924년 42세 때 문수사(文殊寺) 해체 복원에 부편수를 맡고, 덕림사 용오정사 건축에 10개 기둥을 굽은 원목으로 조화있게 구축, 문화재 지정에 일조를 했다. 구한말에서 일제치하에 걸쳐 한식 주택이나 공청(公廳)․ 사찰 등의 고건축 등 큰 건축 일을 잘하는 도편수였다”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이 이종근에게 직접 전해준 말이다.
"그는 유희충(庾喜充 1846~1901)의 아들로 1882년 태어났다. 모친은 함열남궁씨 (1858~1900)로 1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20세 이전 미혼기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22세때 고수 양지촌 이천서씨와 혼인하였다. 목수일은 외조부의 권유로 주로 외삼촌인 남궁 련(南宮 鍊)에게 한옥건축 기술을 배우고 대목장이 되었다. 그의 수제자는 집안 일가인 유장봉(庾長鳳)이다. 고창 근동에서 숨은 재능으로 알려진 과묵하고 성실한 대목 유익서가 그 진가를 발휘한 작품이 1924년 현재의 문수사 대웅전을 해체보수한 일대ㅍ사건이었다"
이는 유기상 전 고창군수의 말이다.
월곡 차경석(1880~1936)은 증산교 계열의 보천교의 본부였던 ‘차천자궁’을 만들었다.
그는 흥덕현 이서면 연기동(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연기마을 490-1번지) 출신이다.
유익서는 정읍에 이를 심묘한 솜씨로 지었다. '차천자궁'이 소유권 분쟁으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그 솜씨를 아까워한 사람들은 집을 헐어버리는 대신 뜯어 옮겼다.
하나는 뜯겨서 서울 조계사의 법당이 됐고, 다른 하나는 정읍 내장사의 대웅전이 됐다고 한다.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보천교는 강제 해산됐다. 일제가 십일전(十一殿)을 강제로 철거하려고 했다.
이종욱은 이를 서울로 옮겨와 태고사(조계사)를 지을 때 실무자였다. 또, 지난 2012년 겨울 정읍 내장사의 화재로 잿더미가 돼버린 대웅전은 차천자궁의 건물을 뜯어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의 하나로 전해진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정읍시 장명동으로 옮긴 것을 1988년 박성기가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했다.
자연공원법의 제정으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고택의 유지 보수가 용이하지 않아 점차 폐가로 쇠락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소유자인 그가 2010년 전주시에 기증함으로써 2011년 6월 이전 복원,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ㅁ자 건물의 정읍고택은 보온 효과를 높이고 바람을 막으려는 북부지방의 한옥 양식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정읍 청기와가 청와대 지붕에 올랐다. 이 역시 유익서의 솜씨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섰다. 그로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의 공간이었다.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면 74년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이 땅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이 일대는 고려 문종 때인 1067년 개경 밖에 3경을 설치하며 역사에 발을 들여놓는다. 경주가 동경, 서울이 남경, 평양이 서경이다.
천도를 계획한 숙종은 1104년 남경을 완공한다. 지금의 경복궁 서북쪽 태원전과 신무문 일대로 추정한다. 남경은 왕들이 남행할 때 머무는 공간이었다. 후대 왕들도 남경천도를 꿈꿨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국운이 기울며 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는 정책주간지 'K-공감' 705호(5.22-28) '청와대 개방 1년을 말하다'는 꼭지를 통해 청와대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고 있다.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새로운 왕조의 근거지로 남경은 비좁아 그 앞쪽 너른 땅에 경복궁을 세웠다. 왕궁 근처는 당연히 백성의 접근을 막았다. 세종에서 선조 때까지는 백악산 일대에서 돌도 캐지 못하게 했다. 조선을 세운 지 딱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경복궁은 몽땅 불에 타버리고 그 뒤 270여 년 동안 폐허가 됐다.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일대도 관리를 못해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정사를 봤다. 조선 왕조 519년 동안 경복궁이 제1궁 역할을 한 시기는 절반이 못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경무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선다. 이전 총독 관저인 왜성대는 남산에 있었다. 퇴계로2가 교차로에서 남산1호터널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 지금은 공원이 된 자리다. 총독 관저 건물은 청와대의 출발점이다.
일제는 눈엣가시로 여기던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교가 모태)를 강압으로 무너뜨렸다. 정읍에 있던 보천교 전각들은 해체돼 서울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전주 기차 역사 등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때 보천교 본당인 십일전의 청기와를 가져와 경무대에 새로 짓는 조선총독 관저 지붕에 올렸다.
청와대 본관 지붕은 그렇게 도자기처럼 구운 기와 15만 장이 올라가 있다고 했다
고창 문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664년(백제 의자왕 4)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연기설화를 바탕으로 문수보살과 문수도량의 신앙적 특성을 반영하여 그 위계가 잘 표현된 사찰이다.
‘고창 문수사 대웅전(보물)’은 문수사 창건기(創建記, 1758년)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 1607년(선조 40)에 중창(重創)됐고, 1653년(효종 4)에 회적(晦跡) 성오(性悟)와 상유(尙裕) 비구(比丘)가 3중창한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후 1823년(순조 23) 중수(1차)와 1876년(고종13) 고창현감 김성로의 시주로 묵암이 중수(2차)했다. 1924년에는 해체 수리과정에서 당시 도편수가 재조립을 못한 것을 부편수였던 고창 출신의 대목장 유익서)가 마무리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창 문수사 대웅전’은 2016년 보물로 지정된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모신 법당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다포계 맞배지붕의 특징을 갖고 있고, 측면에 공포(栱包)가 설치된 매우 특이한 불교 건축물(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건물은 5량 구조의 내외 3출목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공포의 형태와 짜임은 단순하면서도 강직한 조선 전기이후의 양식과 전라도의 지역적 특색이 나타나는 등 1653년(효종 4) 중창 당시의 형태를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
4면에 공포를 배열하고 충량(衝樑)과 활주(活柱)를 사용한 팔작지붕 형식이나, 후대에 맞배지붕으로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다포계 맞배지붕의 기법과 양식을 충실하게 갖춰 외부 의장(意匠)의 완결성과 장엄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여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다.
또, 대웅전의 단청 역시 문양사적 특이함과 전통 무기안료와 아교 사용 등 천연재료 특성의 옛 기법이 남아 있어 학술적·역사적 가치도 인정받았다.
유기상 전 고창군수는 유익서는 또 고수 예지마을 이상기씨 호화정자인 세한정과 솟을대문, 안채, 성송면 무송리 무송유씨 재실 여송재와 솟을대문, 성송면 향산리 무송유씨 재실 영모재, 대산 율촌 정세환의원집 정자 등 고창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했다.
용오정사의 기둥은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차라리 파격에 가깝다. 서산 개심사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말이다. 저 둥근 곡선을 보아라. 예로부터 ‘무위이무불위(無爲以無不爲)’라 하였던가.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경지가 아닐까. ‘크게 공교로운 것은 서투른 것과 같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을 무장 '용오정사'가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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