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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7> 완주의 명승 '위봉폭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7> 완주의 명승 '위봉폭포'

2011년 완주 위봉폭포 일원의 완주군 1호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됐다.

위봉폭포는 위봉산성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2단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과 폭포 아래의 큰 바위 사이로 물길이 흘러가며 포트홀(Pot hole)의 하천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이 수련했던 곳으로 전해져 역사성 및 장소성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이 위봉폭포의 문화경관적 측면의 뛰어남과 위봉폭포를 향유한 선인들의 삶과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곳임을 인정하고, ‘역사문화적 ·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폭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위봉폭포의 명승 지정은 완주군 천혜의 자연과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앞으로 보존관리 및 활용방안 강구에 힘쓰고 있다.

'명승'은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산, 바위, 동굴, 폭포 등을 지정대상으로 하며, 전국적으로 총 118곳이 지정돼 있다. 이 중 폭포가 명승으로 지정된 경우는 위봉폭포 등 모두 8곳이다.

전북엔 명승으로호 진안 마이산, 부안 채석강·적벽강 일원, 광한루원, 고창 선운산 도솔계곡 일원,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무주 구천동 파회·수심대 일원, 군산 선유도 망주봉 일원, 부안 직소폭포 일원, 고창 병바위 일원, 완주 위봉폭포 일원, 부안 우금바위 일원 등이 명승으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위봉폭포

위봉폭포는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관와 동상면 수만리의 경계에 있는 폭포를 말한다.

위봉폭포는 완주 위봉산성의 동문 쪽에 있는 높이 60m의 2단 폭포로 완산 8경의 하나이다. 

위봉폭포의 명칭은 위봉산과 위봉산성에서 유래했다.

 위봉산성의 물이 모여 성 밖으로 흘러가는 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다. 경위도 상으로는 북위 35도 54분, 동경 127도 16분에 위치한다.(디지털완주문화대전 참조)

위봉폭포의 물은 대청천으로 흘러들어 수만천과 합류하고 수만리 동상저수지로 흘러든다. 위봉산성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은 위봉산(524.3m)을 비롯, 500-600m급의 산지로 이루어졌다.

남쪽 역시 500-600m의 산지이고, 서문 쪽은 500m-340m-600m로 서문이 있는 곳이 움푹 내려가 있다. 그리고 동쪽과 북쪽에는    위봉산-위봉폭포-남쪽 산지로 이루어져, 위봉폭포는 남북 연결 산지에 비해서 230m의 고도 차이가 있다. 

위봉산성 분지는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루는데, 분지 내부 삼면의 산지에서 모인 물은 해발고도가 낮은 동문 방향으로 흐르는데, 유일한 유출구 지점에 위봉폭포가 위치한다. 

물줄기는 옛부터 완산 8경에 드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다.

소양면에서 동상면 수만리로 이어지는 741번 지방도가 위봉산성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하며, 위봉터널을 지나 동상면 수만리 쪽에 위봉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주차장이 정비되어 있다.

 완주 위봉산성(사적 제471호)은 너비 3m, 높이 약 4.5m, 전체 길이 약 16㎞로 1407년(태종 7)에 축성하고, 1675년(숙종 1)에 중수하였는데,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됐다.  성내에는 위봉사가 남아 있고, 수구(水口)에는 위봉폭포가 있어 완산 8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수삼의 전주8경에 나오는 위봉폭포는 '위봉수폭'

오늘날의 전주팔경을 이야기한 인물로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1762~1849)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조수삼은 말년(74세경,183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2년 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렀다. 그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들 가운데 현재의 전주팔경과 부합하는 작품들이 그의 문집 '추재집'3권과 4권에 들어 있다.

위봉수폭(威鳳垂瀑)

白練垂垂掛翠微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
雨絲霞線染餘暉 빗줄기는 저녁노을에 물드네
何人直把幷刀去 어느 누가 곧바로 칼을 가지고 가서
斷下淸秋織女機 맑은 가을 하늘아래 직녀가 짠 베를 잘라놓았나

'위봉수폭'은 위봉산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를 말한다.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로,2단으로 물줄기가 쏟아진다.물이 떨어지는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형성한다.

기구의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한 것은 위봉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모양을 표현했다.
위봉폭포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위봉폭포의 하얀 물줄기와 석양에 물드는 빛줄기가 묘한 대비를 형성한다.

위봉수폭은 기구부터 결구까지 모두 위봉폭포의 떨어지는 물줄기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했다.
하얀 비단,푸른 산,저녁노을에 물든 빗줄기,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은 백색,붉은 색,푸른색이 서로 강렬한 색으로 대비되게 그리고 있다.

'완산8경' 춘향가에 나오는 위봉폭포

한벽당은 19세기 후반에 펴낸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에도 등장한다.
어사가 된 이몽룡이 완산팔경을 구경한 다음 남원을 향해 내려갔다.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소강남(小江南) 여기로다. 기린토월이며 한벽청연 남고모종 곤지망월 다가사후 덕진채련 비비낙안 위봉폭포 완산팔경을 다 구경하고 차차로 암행하여 내려올 제’ 

이몽룡은 그 숨 막히는 와중에도 태평스럽게 완산팔경을 다 감상하고 다녔다고 했다. 어사출도 과정에서 서울서 급하게 오는 과정이 고스란히 소개된 가운데 통새암, 한내, 주엽쟁이, 가리내, 싱금정(승금정), 숲정이, 전북의 옛 지명들이 고스란히 글에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경의 재조 조정에 으뜸이라’ 하시고 도승지 입시(入侍)하사 전라도 어사를 제수하시니 평생의 소원이라. 수의(繡衣), 마패(馬牌), 유척을 내주시니 전하께 하직하고 본댁으로 나갈 때 철관 풍채는 심산맹호(深山猛虎) 같은지라. 부모전 하직하고 전라도로 행할 새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서리, 중방, 역졸 등을 거느리고 청파역 말 잡아 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이를 얼픗 건너 남대령을 넘어 과천읍에 중화(中火)하고 사근내, 미륵당이, 수원 숙소(宿所)하고 대황교, 떡전거리, 진개울, 중미, 진위읍에 중화하고 칠원, 소사, 애고다리, 성환역에 숙소하고 상류천, 하류천, 새술막, 천안읍에 중화하고 삼거리, 도리치, 김제역 말 갈아 타고 신구, 덕평을 얼른 지나 원터에 숙소하고 팔풍정, 화란, 광정, 모란, 공주, 금강을 건너 금영에 중화하고 높은 한길 소개문, 어미널티, 경천에 숙소하고 노성, 풋개, 사다리, 은진, 간치당이, 황화정, 장애미고개, 여산읍에 숙소참하고 이튿날 서리 중방 불러 분부하되, “이곳은 전라도 초읍 여산이라. 막중국사 거행불명즉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추상같이 호령하며 서리 불러 분부하되 “너는 좌도로 들어 진산, 금산, 무주, 용담, 진안, 장수, 운봉, 구례로 이 팔읍을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고, 자, 중방 역졸 너희 등은 우도로 용안, 함열, 임피, 옥구, 김제, 만경, 고부, 부안, 흥덕,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무안, 함평으로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고, 종사 불러 익산, 금구, 태인, 정읍, 순창, 옥과, 광주, 나주, 평창, 담양, 동복, 화순, 강진, 영암, 장흥, 보성, 흥양, 낙안, 순천, 곡성으로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라.” 분부하여 각기 분발하신 후에 어사또 행장을 차리는데 모양 보소. 뭇사람을 속이려고 모자 없는 헌 파립에 벌이줄 총총 매어 초사갓끈 달아 쓰고 당만 남은 헌 망건에 갖풀관자 노끈당줄 달아 쓰고 의뭉하게 헌 도복에 무명실 띠를 흉중에 둘러 매고 살만 남은 헌 부채에 솔방울 선추달아 일광을 가리고 내려올 제 통새암, 삼례 숙소하고 한내, 주엽쟁이, 가리내, 싱금정 구경하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소강남 여기로다. 

기린토월(麒麟吐月)이며 한벽청연(寒碧淸煙), 남고모종(南固暮鍾), 곤지망월(坤止望月), 다가사후(多佳射侯), 덕진채련(德眞採蓮), 비비락안(飛飛落雁), 위봉폭포(威鳳瀑布), 완산팔경을 다 구경하고 차차로 암행(暗行)해 내려올 제 각읍 수령들이 어사 났단 말을 듣고 민정(民情)을 가다듬고 전공사(前公事)를 염려할 제 하인인들 편하리요’

판소리 춘향가 사설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제법 역사가 오래된 ‘완산팔경’이다.

이철수 완산승경의 하나 '위봉폭포'

전주와 완주 일대에는 32경을 의미하는 완산승경(完山勝景), 완산팔경, 완산십경 등이 고루 걸쳐 있다. 승경과 8경이 양쪽 지역에 고루 섞여 있는 것은 두 지역이 같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승경(勝景)'이란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말하며, 역사성이 있는 유명한 지역도 상당수 있다.
이철수의 ‘완산승경(完山勝景)을 보면 ‘완산승경’은 모두 32곳에 이른다. ‘완산승경’ 가운데는 ‘전주팔경’ 5곳이 포함됐다.

‘완산승경’은 △기린토월(麒麟吐月, 전주시내 기린봉), △유연낙조(油然落照, 전주시 중화산동 유연대), △완산칠봉(完山七峰, 전주시내 완산칠봉), △한벽사경(寒碧四景, 전주시 교동 한벽당), △동성수납(東城睡衲, 전주시 교동 승암산 동고사), △남고모종(南固暮鐘, 전주시 동서학동의 남고사), △사대병암(四大屛岩,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의 사대원), △은석동학(隱石洞壑, 전주시 색장동의 은석골), △다가비설(多佳飛雪, 전주시 다가공원), △오목요대(梧木瑤臺, 전주시 교동 오목대), △간납자규(諫納子規, 전주시 남노송동 간납대), △진북쇄월(鎭北灑月, 전주시 진북동 진북사), △가련청람(可連晴嵐, 전주시 덕진동 가련산), △덕진채련(德津採蓮, 전주시 덕진공원 연꽃), △건지송뢰(乾止松籟, 전주시 덕진동과 송천동의 건지산), △삼천세우(三川細雨, 전주시 삼천동의 가랑비), △단암공영(丹岩空影,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의 단암사), △모악요하(母岳繞霞, 완주군 구이면의 모악산), △죽림천엽(竹林千葉,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마을) , △만마도관(萬馬道關,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 △법사장한(法史長恨, 전주시 금상동의 회안대군 묘소), △구진융마(九進戎馬,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구진벌 전쟁터), △동포귀범(東浦歸帆,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의 동포), △대아수간(大雅垂竿, 완주군 동상면 대아저수지), △고달귀운(高達歸雲,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의 고달산), △보광유경(普光幽徑, 전주시 동서학동의 보광사), △경각심홍(鯨角深紅,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의 경각산), △대천파설(大川波雪, 완주군 삼례읍 한내천), △황방폐월(黃尨吠月, 전주시 황방산), △위봉폭포(威鳳瀑布,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의 위봉폭포), △운제백련(雲梯白蓮, 완주군 화산면 운제골의 백련), △대둔천잠(大屯千岑, 완주군 운주면의 대둔산)이다.

마로덕, 위봉폭포 부근에 위봉교회 세우다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마로덕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다.

마로덕 선교사라 부르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은 미국 남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데이비슨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3년 전주에 오게 됐다.

그는 주로 전북의 동남쪽을 선교지로 삼아 활동했다. 그는 동부 산악지역을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로덕(馬路德)이었다. 말을 타고 길을 돌아다닌 덕분에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라 했다.

'어찌하여 마로덕 이름이더냐
포교 길 말 재촉 다닌 덕이냐
머나먼 길 바다 건너 여기에 와
삼십 총각 전주에 몸을 맡겼네.
예수 복음 천지를 뒤흔드니
유생 학자 묘 속에서 뛰어나와도
밝은 종교 모인 민중 받아들였으니
호남의 목자들 오래 떠받들리라'

지금의 예수병원이 들어서 있는 도로인 서원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중화산동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높고 꼬불꼬불한 강당재였다. 강당재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마 선교사는 1873년 미국 비숍 빌에서 출생, 사우스캐롤라이나 장로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뒤 1902년 서울에 도착하여 군산과 목포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북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무주, 장수, 금산, 익산, 삼례, 고산, 그리고 임실, 남원 등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08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사 요셉 빈과 결혼을 한 후 부인과 같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전도에 힘썼다.

그는 말을 타고 소양을 지나 높은 위봉고개를 넘어갔다. 그곳은 전국적으로 오지로 소문난 동상면이었다. 위봉폭포 부근에서 위봉교회를 세운 그는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를 연이어 설립했다. 그때가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였다.
위봉교회 인근의 소농교회와 봉동의 덕천교회 등도 그가 세웠다.

판소리 독공의 명소 '위봉폭포'

불볕 더위와 집중호우가 이어지는 이번 여름에도 지리산, 익산 심곡사 등 도내 곳곳마다 어김없이 전통예술의 정취로 가득할 것 같다. 
바야흐로 산공부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한 이 여름에 더위 식히는 적어도 국악인에게 여름은 평소 부족했던 기량과 공력(功力)을 채우는 이른바 ‘산공부(독공)’의 적기로 꼽히고 있으며, 이들에게 산공부는 ‘평생 먹을 농사를 짓는다’고 할 만큼 중요한 과정이다.
 ‘산공부’판소리 가객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토굴, 또는 폭포 앞에서 하는 발성 수련법의 하나로, 과거엔 학습 10년, ‘독공(獨功)’ 10년, 유람 10년 등 30년의 세월을 투자해야 비로소 한명의 명창이 거목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들에게는 1년 농사를 좌우할 정도로 보석 같은 시간이다.
‘산공부’는 예부터 판소리 가객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토굴, 또는 폭포 앞에서 하는 발성 수련법의 하나로, 송홍록명창은 공동묘지에서 귀곡성을 얻었고, 권삼득명창은 마을 뒤편 조그만 바위 굴과 완주의 위봉폭포에서, 거적을 두르고 비바람을 막은 채 오로지 소리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권삼득로는 명창 권삼득의 이름을 따 명명됐으며, 전주고등학교 앞에서 덕진동 호반촌까지 이어진다.
권삼득은 완주군 구억리 출신이다.
조선시대 정조, 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통한다.
양반 집안 출신으로 소리공부를 하다 집에서 쫒겨난 일화가 있다.
누구에게 소리를 배웠는지 정확한 계보는 전해지지 않지만 판소리 ‘설렁제’란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는 높고 길게 질러 내는 것으로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무가(舞歌) 계열이 하는 소리를 양반이 하니 그를 가르쳐 비가비 명창이란 칭호도 얻게 된다.
생가터는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생가터 옆엔 ‘권삼득 생가터 보존위원회’란 팻말도 볼 수 있으니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가터 안내문엔 ‘조선후기 판소리 대명창인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해 삼득이라 불리었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출신 광대로 새타령을 하면 숲 속의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는 글귀를 볼 수 있다.
뒷산으로 오르면 권삼득 명창의 묘와 소리굴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 소리연습을 했다는 조그만 굴인데 한 사람이 들어 않을 정도의 규모다.
명창은 이 곳 뿐 아니라 소양면의 위봉폭포나 남원 육모정 등에서 소리연습을 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오르면 권삼득 명창 묘가 나온다.
정갈하게 정리된 묘 앞엔 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가지 소리를 득음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으며, 양반 출신으로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는지 애석한 마음이 든다.
죽은 지 3일 후부터 권삼득의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밤새 메아리 쳤다는 설화를 볼 때 소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정도다.

고종시 마실길이 지나는 '위봉폭포'

완주군 '고종시 마실길’은 ‘위봉폭포’에서 시작한다. 시작부터 폭포의 크기와 위용이 압도적이다. 60m 높이의 위봉폭포의 2단으로 떨어지는 물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거의 굉음이라고 할 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위봉폭포의 물 앞에서 판소리 8대 명창 중 한 명인 권삼득 명창이 득음을 위해 물러서지 않고 소리로 맞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는 위봉폭포에서 출발, 노령산맥을 감상할 수 있는 시향전망대를 올라 학동마을로 내려오는 등산 코스다.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땀을 흘리며 몸에 활력을 불어넣기 좋은 코스다.

권삼득 명창이 득음을 위해 소리로 맞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위봉폭포'와 713m의 높이에서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시향전망대'가 단연 압권이다.

전주역에서 위봉폭포행 버스 탑승하여 '위봉폭포'정류장 하차하면 된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위봉폭포에서 1km가량 떨어진 위봉사를 둘러보고 출발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