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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6> 간판을 그린 화가:하반영, 이응노, 고재봉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6> 간판을 그린 화가:하반영, 이응노, 고재봉

하반영 군산과 전주서 영화 간판 그림 그려

하반영(1918-2015)선생의 삶은 한국미술의 역사에 온전히 놓여있다. 고향은 김천이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군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산사람이 됐다. 측량기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유복자가 됐다.

선생은 하씨지만 오랫동안 김씨로 살았다. 어머니가 군산 양조장집 안동 김씨에게 재가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구풍(俱豊). 철이 들어 스스로 하씨 성을 다시 찾았지만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일찌감치 예명인 반영(畔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홉 살에 학교(군산 신풍초등학교)에 들어가 4학년까지 다녔지만 어린나이에 집을 나와 자유롭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그림 잘 그린다'는 격려가 그를 화가로 키웠다. 그림과의 인연은 극장 간판이 시작이다. 열일곱 살에 처음 군산극장 간판을 그렸다. 후에는 전주로 옮겨 극장 '간판장이'로 지내면서 영화인들은 물론, 전주의 화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함경도가 고향인 신상옥 감독(1926~2006)과 이강천 감독(1920∼1993)이 군산에 거주할 때 함께 극장 포스터를 그렸다. 이 감독은 원래 화가였는데, 절친하게 지내면서 애틋한 추억을 많이 남겼으며 훗날 그의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내 단골 배역은 엿장수와 빨치산이었지. 엿장수 가위질 배우느라 무척 고생했어. 영화 '피아골'에서 여자(노경희)하고 놀아난다고 아가리(이예춘)에 총 맞아 죽는 빨치산으로 출연했지. 지리산에서 촬영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왜 경찰만 많이 죽느냐?', '인공기만 나오고 태극기는 왜 안 나오느냐?'라고 트집을 잡아서 늦게 개봉했지"

 유머가 빼어나고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으로 주변에는 늘 예술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라북도에서 처음 시작된 전시회며 예술단체 중심에 선생이 앞서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신석정, 김해강, 서정주, 이병기 시인과 가까웠으며 금릉 김영창 선생을 첫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으로 모셨다. 고암 이응로, 오지호, 전혁림 선생과도 교분이 깊고 운보 김기창 박래현 부부와도 인연이 있다.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엔 이중섭을 만나 여관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담배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 팔리지 않고 화선지에 실경을 그린 선생의 그림은 잘 팔려 함께 먹고 지냈다.

탁광의 '전북영화이면사'에 전주 제국관의 그림을 그려 소개됐다.

고암 이응노, 전주에서 '개척사' 운영

고암 이응노(1904∼1989)화백의 행적과 관련해 가장 연구가 미진한 부분은 바로 전주에서의 족적이다. 
고향 홍성을 떠나 서울에서 당시 사설서화학원을 운영 중이었던 해강 김규진 밑에서 전통사군자를 배우던 고암은 그가 스무살 중반 무렵에 홀연히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이름의 간판점의 문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향집을 가출하다 시피 떠난 고암은 서울 스승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을 배웠지만 역시 생계가 문제였다. 간판점은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생활력이 남달랐던 고암은 성공적으로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고암은 개척사에서 상업 간판의 글씨를 쓰는 일과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했다. 간판업을 습득한 고암은 독립해 사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둬 규모가 클 때는 페인트 장인 30~40명을 거느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모은 돈은 고향에 보내졌다. 생업 이외에도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고암은 전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33년 10월 11일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에는 

“본적을 충남 홍성에 두고 방금 전주 팔달정에서 개척사라는 미술 간판업을 경영하는 청년화가 이응노(30) 군의 개인전람회를 오는 11월 12일 전주공회당에서 개최하리라는데 동 군은 일찍이 17세부터 해강 김규진 씨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동양화를 연구하야 수차 선전에 특선까지 된 청년화가라 한다. 그래 군의 예술을 아끼는 전주 유지 제씨의 발기로 전기와 같이 개최한다는데 일반은 다수히 관람하기 바란다고 한다”

고 게재된 바 있다.

고암이 왜 전주로 향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아직까지 모호하다. 
한때 전주서 거주한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에게 사사, 홍성, 예산, 전주를 거쳐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홍익대학, 서라벌예술 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가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4년 무렵이라고 조병희선생의 '완산고을의 맥박(292쪽)'에 기록됐다.

그는 전주시 중앙동 4가 25번지에서 ‘개척사(開拓社)’란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신사구락부’란 모임도 조직했었다고 전한다.

'개척사'는 지금의 신흥교회 옆 가게 부근이다. 

당시 그는 틈만 생기면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 1885-1966)댁에 드나들었다. 효산은 고암보다 19세 연상으로, 서예와 사군자로 조선 예단(藝壇)의 중견 작가였으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고암은 효산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조예를 쌓는 한편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도 친숙한 사이로 지내왔다. 제3회 선전 사군자부 입선에 이어, 전주에서 출품한 작품으로, 1930년 제9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풍죽(風竹)’과 ‘청죽(晴竹)’이 입선됐다. 

1931년 제10회 선전에는 ‘대죽(大竹)’과 ‘풍죽(風竹)’, ‘청죽(晴竹)’, ‘분죽(盆竹)’, ‘매(梅)’ 등 네 폭의 작품이 한꺼번에 입선되고, 특선으로 이왕직(李王職)의 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고암은 ‘죽사(竹史)’란 호를 가지고 출품했는데, 효산이 지어준 호로 알려져 있다. ‘죽사(竹史)’라는 호가 해강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전주 지역에서는 효산에게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당 고재봉, 익산서 '청조사' 운영

전주 옛날 미원탑 사거리를 알고 있는가. 팔달로 기업은행 입구 앞 ‘전라북도 도로 원표’ 표지석이 세워진 곳을 서성거리고 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는 도로의 기점,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한 것으로 도로법 제2조 제1항 4호에 도로의 부속물로 정해져 있으며, 쉽게 말해 이를 기점으로 전국 시·군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은행 정문 입구 화단에 선 장방형 원표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지상고) 1m40㎝, 가로 세로 25㎝×25㎝ 크기다. '1964년 10월 10일 전주라이온스크럽 건립'이라고 정면에 새겨져 있다. 워낙 글씨를 깊이 파고 바탕이 좋은 화강암인지라 마치 새 것 같다. "보통 비석 글씨는 음각이 얕고 'V'자 형태로 가파르게 파지만 이 글씨는 몽글몽글한 'U'자형으로 깊이 새겼지. 돌도 최상의 황등석으로 주문했어."
화강석 원표 건립을 제안한 유승국(의사·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씨의 회고를 들었다는 전 언론인 임용진씨의 설명이다. 

이 원표는 원래의 길이 6척(1m80㎝)짜리 돌로, 40㎝는 땅에 묻혔다.
‘전라북도 도로 원표’ 의정갈한 예서체 글씨는 고재봉(高在烽, 1913∼1966)이 썼다. 

그의 본관은 제주로, 호는 석당(石堂)이며 옥구출신으로 익산서 활동한 현대서예가 중의 대가이다. 그는 소전 손재형선생의 제자로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으며, 이리시 문화장 1호 수상자이다.
정읍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기념시설물로 1963년 건립됐다. ‘동학난’이라 불리던 시절, 처음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획기적 계기가 됨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인식 변화의 전환점이 됐다. 1894년 평등사상에 기반한 반봉건과 반침략의 기치를 듣고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제국주의와 정부의 공격을 받아 좌절된 까닭에, 기념탑이 건립되던 1963년까지도 혁명이 아닌 ‘동학란’이라 불려졌다.

또 참여자들은 반란군이나 역적으로 몰려 지독한 탄압을 받아 국가와 사회로부터 격리됐으며, 유족이나 후손들 또한 숨어 살아야 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함구하던 시절이었다. 이 탑 역시 그가 1963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안 고려자기 도예지(1963), 군산 옥구군 충현탑(1963), 고창 신오위장비문(1963), 익산역 4.19 학생의거 기념탑(1963), 전주종합경기장 수당문 휘호(1963) 등도 그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1966년 5월에 인후암 판정을 받은 후 다음달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서예사에서 그의 이름이 점차 잊혀져 가고 있어 아쉽기만 하다. 1938년 북창동(현 창인동1가)으로 이사를 한 후 운영한 광고회사 '청조사(靑鳥社)'의 흔적은 지금 어디에 있나.

1980년대가 극장 간판의 전성기였다. 개봉일이면 영화 관계자들이 올라가는 간판을 보며 흥행이 잘 되길 빌고, 주연 배우들은 간판의 자기 얼굴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이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극장 간판이 실사 사진으로 교체되면서 극장 미술가들 중 대부분은 수출 그림을 제작하는 서울 삼각지로 자리를 옮겼다.
빠르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실사 사진을 사용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수작업한 간판과 비교가 되겠는가. 디지털이 효율성은 높을지라도 아날로그의 감성은 따라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