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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5> 전북의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의 합작 작품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5> 전북의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의 합작 작품

완주군 소재 ‘동지중추부사 김양성 묘비’와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는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알려진 서울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평양의 눌인(訥人) 조광진(1772~1840),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 중 추사와 창암 두 명필의 합작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두 묘비의 전면은 추사선생이 예서로, 후면은 창암선생이 해서로 썼다.

완주문화원이 19일 오후 3시 완주향토문화예술회관 2층서 학술 세미나 ‘창암과 추사, 완주에서 만나다-고선후기 명필 이삼만.김정희와 교유 조명’을 갖는다.

발표1은 ‘창암 이삼만의 서예 세계와 특징’(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발표2는 ‘추사 김정희와 전북’(박철상 한국문헌연구소장), 발표3은 ‘창암 이삼만과 추사 김정희의 합작 금석문 고찰’(김진돈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 위원)이 기다린다.

사회는 서예가(한국서도협회 전북특별자치도지회장)이 맡으며, 질의 응답 순서도 있다.

이삼만은 전북출신으로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서 원교 이광사를 비롯한 명필들의 글씨를 스승 삼아 평생을 서예만 전념하여 심오한 경지에 오른 명필이다.

자신만의 필법인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운 행운유수체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의 서법을 배제하고 동국진체를 완성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해왔으며, 병석에 누워서도 하루에 1,000자를 썼다. 그는 전주에서 생산되는 닥이 주원료인 전주한지를 사용, 지금까지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 당시 후학들이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독 서첩을 많이 남겼다.

창암과 추사는 19세기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서체의 성격이 대조적이다. 추사의 서체는 건축미와 인공미를 풍기고, 창암의 그것은 인위성을 배제한 무위자연적이다. 또 창암은 행·초서에서 자신의 서체를 완성했고, 추사는 예서체가 대부분이며 서한예서체로 서체를 완성했다.

특히 창암은 위진시대 고법과 우리나라 선대 서예가들의 서체를 필묵으로 녹여내면서 유수체라는 자신만의 필법을 확립했다. 유수체의 미학은 주자가 쓴 ‘사시사’와 정이가 쓴 ‘언잠’에 잘 나타난다.

활동상도 대조적이다. 추사는 청나라 선진문물을 수용한 개혁적인 유학파다. 당대 이름난 학자인 완원과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창암은 전라도 산골에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추사는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 자리까지 오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 창암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서예에만 몰두했다. 31세 때 서예 교과서격인 ‘화동서법’을 펴냈으며 51세를 전후해 전주 옥류동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60대 후반에는 전주 공기골로 내려가 서예에 침잠했다.

창암과 추사는 한 작품에서 만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김양성의 손자가 ‘김양성 묘비’ 비문의 앞면은 추사가 쓰고 뒷면과 옆면은 창암이 써 줄 것을 부탁하면서 이뤄졌다.

봉동읍 은하리에 있는 김양성의 묘비는 추사와 창암이 합작했다. 同知中樞府事金公養誠之墓 등 전면에 새겨진 21자는 추사가 예서로 썼고, 후면 비문 내용은 창암이 해서로 썼다.

당대 명필 2명이 하나의 묘비석 비문을 공동작업했고, 추사가 비문을 쓴 예는 극히 드문 것으로 알려져 문화재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진읍 상운리에 있는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와 봉동읍 은하리에 있는 ‘김양성 묘비’에 새겨진 비문 서체는 추사와 창암의 것으로 확인됐다.

1833년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는 광산김씨 묘비 전면의 ‘貞夫人光山金氏之墓’는 추사가 예서로 썼고, 후면의 글씨는 창암이 해서(楷書)로 썼다. 후면 비문의 말미에 글씨를 쓴 김정희, 이삼만 이름이 새겨졌다. 비신(碑身)은 석질이 우수한 오석이며, 170년이 지났지만 서체 등이 완벽한 원형을 갖추고 있다.

창암의 글씨로 쓰여진 후면 비문은 정부인 광산김씨의 가계와 부군 전주최씨 문충공의 후손 창익의 행적 등을 담고 있다.

완주문화원 배순향 사무국장은 “김양성 묘비와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는 추사와 창암의 합작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며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완주문화원, 완주군, 완주군의회가 주최,주관한다./이종근기자

http://www.sjbnews.com/news/news.php?number=8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