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이상진과 전동흘, 두 사람 우정과 관련된 여러 우화가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
'절친의 표상' 이상진과 전동흘의 관계를 엿보게 하는 '전주정승(全州政丞)'이야기가 ‘청구야담’ 과‘학산한언(鶴山閑言)’에 실려있습니다. 제목은 학산한언에 없고, 청구야담에 ‘전통사시미 식재상(田統使時微 識宰相)’이라 한 것을 알기 쉽게 '전주 정승'으로 붙였습니다.
이상진(李尙眞, 1614~1690)은 숙종 연간의 명신이고 전동흘(全東屹, 1610~1705)
은 당시 훌륭한 무인입니다.
전동흘(田東屹)이 아닌 전동흘(全東屹)로 해야 맞습니다. 그래서 '청구야담' 에 잘못 실린 성씨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장화홍련전 고사의 철산부사(鐵山府使)로 자원해 내려가서 원통하게 죽은 두 자매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인물이 곧 전동흘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밝고 사려가 깊은 전동흘의 도움을 입어 곤궁한 처지의 이상진이 과거에 급제해 후일 우의정까지 올라갔으며, 이상진의 추장(推奬)으로 전동흘도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문인들이 무인을 멸시해서 문(文) 무(武)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그 시대 분위기에서 이 두 사람의 우의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전동흘이 이상진을 위해 산지를 개간해 조를 많이 수확하는 대목은 새로운 농업의 시도로 재미있습니다.
젊었을 때 이상진은 집안이 가난해 끼니를 굶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한 번은 추석이 다가오자 노모(老母)를 위해 쌀자루를 들고 이웃 마을에 사는 전동흘을 찾아갔더니 말하기를 “비록 지금은 곤궁할지라도 장차 크게 부귀하실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오” 하고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친분이 두터워진 그들은 전동흘이 이상진의 노모와 살림살이를 맡고 이상진은 서울에 올라가서 과거 공부를 한 결과 마침내 이상진은 대과에 급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습니다.
이상진의 영달이 전동흘의 은덕이었으므로 정승이 된 이상진은 진정으로 전동흘에게 벼슬하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진동흘은 굳이 사양했습니다. 한 번은 이상진의 집에 경사가 있어 대신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 전동흘을 불러 앉히고 이상진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은인인 전동흘이오. 비록 지금 벼슬자리는 없지만 지식과 재주가 뛰어나고 의리가 태산처럼 무거워서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니 부디 모두 잊지 말아 주시오” 했습니다. 모든 대신들도 전동흘의 인물을 알아보았고 따라서 전동흘은 곧 무과로 나아가서 선전관을 거쳐 통제사까지 지냈습니다.
전동흘의 용맹함이 당시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의 눈에 띄어 중용됩니다. 평북 철산부사 등 여러 곳의 외직을 거쳐 황해도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총융사·포도대장 등 주요직을 역임합다. 전동흘의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습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죽마고우 이상진과 익산 출신 소두산(1627∼1693, 평안도병마절도사)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렸습니다.
전동흘은 이상진과 함께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평생 뜻을 같이 합니다. 두 사람 우정과 관련된 우화가 여럿 전해집니다.
이상진은 전의이씨로 시조(이도, 李棹) 묘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습니다. 천안전씨 시조 묘단이 있는 천안 풍세면 삼태리와는 10여 km 떨어진 가까운 곳입니다.
전동흘과 이상진의 먼 조상인 전낙·이도는 모두 고려 태조를 도운 인물들입니다.
이상진과 전동흘의 이야기는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며 전북 정신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리 신드롬이 불 정도로 의리 키워드가 핫한 한국 사회에서, 의리를 지키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오늘날, 의리의 사회란 무엇인가요.
나라에 대한 의리, 국민에 대한 의리, 부모에 대한 의리, 자식에 대한 의리, 형제, 자매에 대한 의리,ㅍ친구에 대한 의리, 동료에 대한 의리, 상사에 대한 의리, 부하직원에 대한 의리,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리, 너에 대한 의리, 나에 대한 의리가 잘 지켜지는 유연하고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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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統使) 전동흘은 전주(全州) 읍내에 사는 중인(中人)이었다. 풍골이 준수하고 지략이 깊었으며, 또한 사람을 보는 눈도 있었다. 소시에 상국(相國) 이상진(李尙眞)이 인근에 살고 있었는데, 편모를 모시고 고달프게 살아갔다. 쓸쓸한 집으로 가을에도 곡식 한 섬이 없었다. 극도로 빈궁하여 편모를 봉양할 변변치 못한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언변과 외모가 뛰어났고 학업에도 힘써 주야로 열심히 책을 읽었다. 동흘은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항상 이공(李公)의 사람됨을 기특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문경지교(刎頸之友)를 맺었다. 그리고 항시 돈과 곡식을 나누어 이공의 어려움을 도왔으며, 이공도 동흘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였다. 어느 해 10월말에 동흘은 이공을 보고 말했다. "공의 외모로 보아 이 뒤에는 마땅히 부귀를 누릴 것이나 아직 시운(時運)이 이르지 않아서 이와 같이 빈곤한가 봅니다. 위로 노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식솔을 거느리자면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으니 공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십시오." 그리고 동흘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쌀 다섯 말과 누룩 몇 장을 가지고 와서 이공에게 주었다. "이것으로 술을 빚어 다 익거든 나에게 알리십시오." 이공은 동흘의 말대로 술이 익자 그에게 알렸다. 동흘은 인근 사람들을 두루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이 선비님이 지금은 비록 빈곤하지만 훗날 재상이 되실 분입니다. 집에 편모를 모시고 있는데 조석거리가 자주 떨어져 살아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라 이번에 영농을 시도하여 생계를 해결해보고자 하신답니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것이 버드나무와 가죽나무 말목이라 하니, 여러분들은 이 술을 드시고 각기 길이 한 자 반쯤 되는 버드나무나 가죽나무 말목 50개씩을 가져다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평소에 동흘을 신뢰하고 또 이공을 존경해온 터라 모두들 한 목소리로 응낙하였다. 동흘은 그 술을 내다가 2백여 명을 대접하였다. 며칠 뒤에 그들이 모두 버드나무와 가죽나무 말목을 부탁한 갯수대로 가져오니 수만여 개의 말목이 모였다. 동흘은 마소를 내다가 말목을 전부 싣고 이공과 함께 건지산 기슭의 시장(柴場)으로 갔다. 시장은 동흘의 소유였다. 풀이 말끔히 베어져 있었는데 동흘은 이공과 더불어 하인들과 함께 말목을 한 자 남짓 깊이로 촘촘히 꽂았다. 동흘이 이공에게 말했다. "명년 봄에는 이곳에 서숙을 파종합시다." 이듬해 봄 해동한 뒤에 동흘은 이른 서숙씨 몇 말을 구해 가지고 이공과 함께 건지산 기슭으로 갔다. 말목을 뽑아내고 그 구멍마다 서숙씨를 7, 8낱씩 집어넣고 새 흙을 약간씩 구멍에 넣어 덮었다. 여름에 서숙싹이 구덩이를 뚫고 나오는데 아주 탐스러웠다. 그 중 볼품없는 것을 솎아버리고 한 구덩이에 서너 그루만 남겼다. 풀이 나면 뽑아주며 잘 가꾸었더니 결실 때에 모가지가 방망이만큼이나 컸다. 타작을 하니 50여 섬이 나왔다. 이공은 크게 기뻐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이다. 버드나무와 가죽나무의 진(津)은 본래 비옥한 것이며, 한 자 깊이의 땅 속은 흙의 기운이 온전하고 새로우며, 겨울을 지나면서 눈과 빗물이 구덩이 속에 스며들어 말목의 진과 융합되어 깊이 적셔주므로 서숙의 싹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종자가 땅속 깊이 묻히면 항상 윤택한 기운을 띠기 때문에 바람과 추위를 겁내지 않는다. 또 종자가 풀뿌리 밑으로 들어가 풀뿌리와 거리가 멀면 풀이 그 지력(地力)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서숙의 결실이 굵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동흘은 농리(農理)를 깊이 터득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이공은 살림이 다소 펴져 노모를 공양하는데 한시름 놓게 되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부엌에서 불이 일어나 집 전체에 번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세게 불어 불길은 치솟는데 바람이 맹렬하여 도저히 불을 끌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쌓아 둔 서숙까지 함께 불길 속에 휘말려 한 톨도 안 남고 다 타버리고 말았다. 이공은 ‘운명이 궁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거두어들인 서숙도 먹을 복이 없다’고 자탄하였다. 그들 모자는 서로 붙들고 한바탕 통곡할 따름이었다. 동흘은 마음이 상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天道)는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구나. 이 선비는 그 기상이나 인품이 결코 궁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거늘, 지금 천재(天災)가 혹심하여 싸라기 한 톨도 남겨 놓지 않았으니 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혹시 내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것일까?" 때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과거를 보이니 동흘이 이공에게 권했다. "공은 서울에 가서 과거나 한번 보시구려. 복마(僕馬)와 식량은 내가 마련할 것이니 걱정 마시고." 이공은 동흘의 도움으로 상경하였다. 이때 이공의 친척 아저씨가 되는 명환(名宦)이 있었으므로 이공이 그를 찾아갔더니, 그 아저씨는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아저씨는 이공의 공령문자(功令文字 : 과거문자)를 내놓게 하여 보더니 기뻐하며, "이처럼 체제가 정결하고 구법(句法)이 청신한데, 아직 초시(初試)도 못 하였다니 늦었구나. 이번 과거는 힘써서 보아라." 하고 과거에 필요한 도구들을 도와주었다. 이공은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직접 짓고 직접 써서 일찌감치 남먼저 시권(試卷)을 바쳐 과연 장원으로 뽑혔다. 아저씨는 응방(應榜)의 도구도 마련해 주고 또 조정에서 이공을 자랑했다. 이공은 곧 청직(淸職)으로 뽑혀 한림(翰林)·옥당(玉堂)을 거쳐 명성을 높이 떨쳤다. 이에 모친을 서울로 모셔와서 비로소 집 모양을 갖추었다. 이때 동흘 또한 이미 무과(武科)에 올랐다. 이공은 동흘을 불러다가 자기 사랑에 두고 함께 기거했다. "그대와 나는 신교(神交)라 할 것이네. 지체와 문벌은 아예 논하지 않겠거니와 문무간의 체모도 갖출 필요 없네. 비록 여러 사람과 같이 하는 자리라 하여도 공대하지 말고 평교(平交)로 대하여 피차 간격을 없애도록 하세나." 이윽고 옥당의 동료들이 이공의 집에 놀러왔다. 동흘은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이공은 동흘의 소매를 붙잡아 앉혀 인사하고 좌중에 참석케 했다. 그리고 이공은 동흘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오. 지모와 역량이 비범하여 요즘 사람에 비할 수 없다오. 일후에 나라에 힘이 되어 장차 크게 쓰일 사람이니 형들은 보통 무변으로 보지 말고 깊이 사귀었으면 하오." 그들은 동흘이 신수가 훤하고 용모가 당당한 무인인 것을 보고 서로 칭찬을 하면서 자기들에게 찾아오라고 하였다. 동흘은 그들을 두루 찾아다녔는데 그 달변이 사람들을 경동(驚動)시켰다.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칭찬하니 조정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동흘은 드디어 서반(西班)의 정직으로 나아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여러 곳의 진장(鎭將)을 역임하였다.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군사를 잘 통솔하여 혁혁한 명성을 떨쳤으므로 온 조정의 찬양을 받았다. 병·수사(兵水使)로부터 통제사(統制使)에 이르렀고 80까지 살아 장수를 누렸다. 그의 자손이 번성하고 계속 무과에 올라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빛나는 무변의 한 가문이 되었다.(청구야담)'
새전북신문 -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50219
신의가 사라진 시대, 이상진과 전동흘
“두 사람 우정과 관련된 여러 우화가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있다"
기사 작성: 이종근 기자 - 2019.10.15 17:01
이 종 근-문화교육부장
이 종 근-문화교육부장
'절친의 표상' 이상진과 전동흘의 관계를 엿보게 하는 '전주정승(全州政丞)'이야기가 ‘청구야담’ 과‘학산한언(鶴山閑言)’에 실려있다. 제목은 학산한언에 없고, 청구야담에 ‘전통사시미 식재상(田統使時微 識宰相)’이라 한 것을 알기 쉽게 '전주정승'으로 붙였다.
이상진(李尙眞, 1614~1690)은 숙종 연간의 명신이고 전동흘(田東屹, 1610~1705)은 당시 훌륭한 무인이다. 장화홍련전 고사의 철산부사(鐵山府使)로 자원해 내려가서 원통하게 죽은 두 자매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인물이 곧 전동흘인 것으로 되어 있다. 지혜가 밝고 사려가 깊은 전동흘의 도움을 입어 곤궁한 처지의 이상진이 과거에 급제해 후일 우의정까지 올라갔으며, 이상진의 추장(推奬)으로 전동흘도 출세할 수 있었다.
문인들이 무인을 멸시해서 문(文) 무(武)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그 시대 분위기에서 이 두 사람의 우의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전동흘이 이상진을 위해 산지를 개간해 조를 많이 수확하는 대목은 새로운 농업의 시도로 재미있다.
젊었을 때 이상진은 집안이 가난해 끼니를 굶을 때가 허다했다. 한 번은 추석이 다가오자 노모(老母)를 위해 쌀자루를 들고 이웃 마을에 사는 전동흘을 찾아갔더니 말하기를 “비록 지금은 곤궁할지라도 장차 크게 부귀하실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오” 하고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친분이 두터워진 그들은 전동흘이 이상진의 노모와 살림살이를 맡고 이상진은 서울에 올라가서 과거 공부를 한 결과 마침내 이상진은 대과에 급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상진의 영달이 전동흘의 은덕이었으므로 정승이 된 이상진은 진정으로 전동흘에게 벼슬 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진동흘은 굳이 사양했다. 한 번은 이상진의 집에 경사가 있어 대신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 전동흘을 불러 앉히고 이상진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은인인 전동흘이오. 비록 지금 벼슬자리는 없지만 지식과 재주가 뛰어나고 의리가 태산처럼 무거워서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니 부디 모두 잊지 말아 주시오” 했다. 모든 대신들도 전동흘의 인물을 알아보았고 따라서 전동흘은 곧 무과로 나아가서 선전관을 거쳐 통제사까지 지냈다.
전동흘의 용맹함이 당시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의 눈에 띄어 중용된다. 평북 철산부사 등 여러 곳의 외직을 거쳐 황해도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총융사·포도대장 등 주요직을 역임한다. 전동흘의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그는 죽마고우 이상진과 익산 출신 소두산(1627∼1693, 평안도병마절도사)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렸다. 전동흘은 이상진과 함께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평생 뜻을 같이 한다. 두 사람 우정과 관련된 우화가 여럿 전해진다. 이상진은 전의이씨로 시조(이도, 李棹) 묘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다. 천안전씨 시조 묘단이 있는 천안 풍세면 삼태리와는 10여 k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전동흘과 이상진의 먼 조상인 전낙·이도는 모두 고려 태조를 도운 인물들이다.
이상진과 전동흘의 이야기는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며 전북 정신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의리 신드롬이 불 정도로 의리 키워드가 핫한 한국 사회에서, 의리를 지키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오늘날, 의리의 사회란 무엇인가. 나라에 대한 의리. 국민에 대한 의리. 부모에 대한 의리. 자식에 대한 의리. 형제, 자매에 대한 의리. 친구에 대한 의리. 동료에 대한 의리. 상사에 대한 의리. 부하직원에 대한 의리.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리. 너에 대한 의리. 나에 대한 의리가 잘 지켜지는 유연하고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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