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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0> 남원 활쏘기 풍습과 고수 태조 이성계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0> 남원 활쏘기 풍습과 고수 태조 이성계

남원은 악성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현재의 운봉 옥계동)에서 거문고를 완성, 전수하며 만년을 보냈다고 하며, 판소리 동편제와 춘향가 흥부가의 본고장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활쏘기와 지리산 오르기, 북 장단을 모르면 남원 사람이 아니라고 할 만큼 풍류를 즐겼다고 하며, 조선 시대의 유명 국악인들은 대부분이 남원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남원은 기원 초 백제의 고룡군이었다. 통일신라(685년)때 남원소경이 설치된 이후 남원이라 부르기 시작한 지 1,300여 년이 된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삼남을 휩쓸고 남원까지 침범한 왜구를 운봉황산 협곡에서 섬멸하는‘황산대첩’을 이룩하였으며,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 싸움에서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군·관·민 일만여 명이 ‘만인의총’에 모셔져 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남원에는 무술연마와 향사례의 도장으로 사장이 여러 곳에 설립되었는데, 부(府)의 남쪽에 분위정, 한남정이 세워지고 부(府)의 동쪽에 관덕정이 세워졌으나 퇴락되었다. 읍승정은 300여 년전에 남원 노계소(기로회)에서 개설하였는데, 이후 읍승정은 관설사정인 관덕정(觀德亭)으로 개정되어 운영됐다. 또, 조선 선조(宣祖) 이후에는 관설 사정을 개방하는 과정에 소계소에서 분위정을 개정했고, 그리고 중민계층이 주축이 되어 한남정이 연이어 개정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에 남원 풍속에는 고을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면 용담(龍潭) 혹은 율림(栗林)에 모여 술을 마시며 활을 쏘는 것으로 예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남원에서 있었던 궁술단체와 관련한 당시의 신문기사이다. 민족의 암울한 시대인 일제 강점기하에 남원의 여러 사정(射亭)이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다수가 폐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가 탄압한 내용은 관덕정기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이러한 내용을 뒷 받침하는 자료가 1929년 8월 9일 동아일보의 기사에도 나와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이러한 탄압에 분연히 일어서 일제와 맞선 사람은 다름아닌 사정(射亭)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육예중에 하나인 사예(射藝), 즉 활을 쏘던 사람들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많은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남원 관덕정이야말로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한국의 유산이라 말하고 싶다.
남원 관덕정은 일련의 고난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는 계승공간으로 남원 춘향제와 함께 전국궁도대회를 1931년부터 지금까지 개최하여 전국한량들로부터 명실공히 명문대회로 인정받고 있다. 시대의 흐름과 풍속의 변천에서도 우리의 것을 지키려는 남원 관덕정의 행동이야말로 역사의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지난 70여년 전에 개최된 궁술대회(1920년 - 1940년 당시 궁술대회 자료)에서는 1등의 영예를 얻은 사람에게는 황소 1마리를 주었으나 요즈음에는 현금 1백원 내외가 부상으로 지급된다.

태조가 이두란(李豆蘭)과 더불어 사슴 한 마리를 함께 쫓는데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에 가로막아 있고 사슴은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나니, 두란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다. 태조는 나무 위로 뛰어넘고, 말을 나무밑으로 빠져 나갔는데, 즉시 잡아타고 뒤쫓아 사슴을 쏘아 잡으니, 두란이 놀라 탄복하면서 말했다. “공(公)은 천재(天才)이므로 인력(人力)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아기발도(阿其拔都)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이두란(李豆蘭)에게>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곧바로 투구를 쏘아 또 정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였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태조 이성계는 남원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훗날 조선을 세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29번째 기사엔

태조 이성계가 화살 하나로 다섯 마리의 까마귀를 떨어뜨린 것을 발설치 못하게 하다

태조가 젊을 때,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는 이를 이상히 여겨 태조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

하였다. 김씨는 환왕(桓王)의 천첩(賤妾)이니, 곧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어머니다.

○太祖少時, 定安翁主 金氏見墻頭五烏, 請射之。 太祖一發, 五烏頭皆落, 金氏異之, 謂太祖曰: "愼勿洩此事。" 金氏, 桓王賤妾, 卽義安大君 和之母也。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면

-태조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담비(蜜狗)가 달려 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한 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스무 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살아 도망간 놈이 없었으니, 그 활 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태조가 젊었을 때,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쫓아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갑자기 백 길(仞) 낭떠러지에 다다르니, 그 사이가 겨우 한 자(尺)도 되지 않았다. 태조는 말 뒤로 몸을 빼어 섰고,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 사람이 알리기를, “큰 범(虎)이 아무 숲속에 있습니다.” 하니, 태조는 활과 화살을 쥐고, 또 화살 한 개는 허리 사이에 꽂고 가서 숲 뒤의 고개에 오르고, 사람을 시켜 아래에서 몰이하게 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보니, 범이 자기 곁에 있는데 매우 가까운지라, 즉시 말을 달려서 피하였다. 범이 태조를 쫓아와서 말 궁둥이에 올라 움켜 채려고 하므로, 태조가 오른손으로 휘둘러 이를 치니, 범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태조가 말을 돌이켜서 이를 쏘아 죽였다.

-태조가 휘하 군사들에게 산 뒤에서 노루를 놀라게 했더니, 일곱 마리의 노루가 즉시 달려 내려오는지라 태조가 다섯 번 쏘아 다섯 마리의 노루를 죽이고, 또 한 마리의 노루를 쫓아서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마침 큰 못이 앞에 가로막아 있고, 얼음이 얼었으므로, 태조는 말고삐를 잡고 질러 건너가서 이를 쏘고, 또 나머지 한 마리의 노루를 쏘아 죽이고는, 화살이 떨어져서 그치었다. 또 일찍이 강음江陰 산수(酸水)의 땅에서 사냥했는데, 한 떼의 다섯 마리 노루를 쫓아서 다섯 번 쏘아 다 죽였다. 평상시에도 3, 4마리의 노루를 연달아 쏘아 죽인 것은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숨어 엎드린 꿩을 쏠 적에는 반드시 놀래어서 두서너 길 높이 날게 한 다음에 쳐다보고 쏘아 번번이 맞히었다.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 우는 화살의 하나)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鶴)의 깃으로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깍지(哨)를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사람의 쓸 것이 못된다.” 하면서, 이를 땅에 던지니, 태조는 이를 주어 화살통에 꽂고 앞에 섰는데,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태조가 달려가서 쏘니 화살 한 개에 죽었다. 또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이같이 한 것이 일곱 번이나 되니, 환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웃었다.

-태조가 환조를 따라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짐승을 보고 빙판의 비탈길에 말을 달려서 쏘면, 번번이 맞히어 한 마리도 빠져 도망가지 못하였다. 야인(野人)이 놀라 탄식하기를, “사인(舍人)께서는 세상에서 당적할 사람이 없겠어요.” 하였다. 또 들에서 사냥하는데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태조에게 달려들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말고삐를 돌리지 못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피해 가는데, 깊은 못의 얼음이 처음 얼어서 굳지 않았으므로, 사람도 오히려 건너 갈 수 없었으나, 말이 얼음을 밟고 달아나매 발자취가 뚫어져서 물이 솟구쳐도 마침내 빠지지 않았다.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 밖에 서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 쏘니 다 떨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賀禮)했다.

-우왕 9년(1383) 9월, 태조가 동북면으로부터 이르렀다. 이번 행차에 태조가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밭 한가운데의 뽕나무에 모여 있는지라, 태조가 이를 쏘니 한 번에 비둘기 두 마리가 함께 떨어졌다. 길가에서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었으니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인데, 이를 보고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잘도 쏘네요. 도령(都領)의 활솜씨여!” 했다.

'관덕정(觀德亭)'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쏘는 것이다.(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에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공자가 '예기(禮記)'에서 '활쏘기를 말하면서 활쏘기를 통해서 활쏘는 사람의 덕행과 마음씨를 알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덕을 살핀다'는 관덕(觀德)은 곧 활쏘기를 말한다(射以觀德). 

관덕정은 광주광역시 관덕정(국가등록문화재 제694호)를 비롯, 대구광역시, 남원시, 익산시, 사천시 , 보성군, 함평군, 강진군, 함양군 관덕정이 있다. 서울 남산 석호정 주련(柱聯) 중 하나에 '관덕정심중(觀德正心中). 덕을 살피는 활쏘기로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한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문화재청은‘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했다. 
나주 인덕정 사대 앞 뜰에 보면 한자로 '백보천양(百步穿楊) 삼년관슬(三年貫蝨)'이란 말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백보 거리에서 버드나무 잎을 맞히고 삼년이면 이를 꿰뚫는다'라는 말로, 이는 매우 뛰어난 활솜씨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이는 고대 중국의 명궁인 양유기(養由基)와 기창(紀昌)의 고사에서 유래다. 초(楚)나라의 양유기는 활을 잘 쏘아 100보 떨어진 곳에서 버드나무 잎을 맞혔는데, 100번을 쏘면 100번 모두 명중했다고 한다. 그는 백보 밖의 버드나무 잎에 빨간 점을 그려 놓으면 그 점을 명중시키는 실력이 있었다. 양유기가 초나라 공왕을 따라 전쟁에 나갔는데, 초 공왕이 진나라의 장수 위기(魏奇)의 화살에 맞아 눈을 다쳤다. 공왕이 양유기를 불러 화살 두 개를 주고 위기를 잡으라고 하자 양유기가 단번에 위기를 명중시켜 절명시키고 화살 한 대를 반납했다. 

공왕이 크게 기뻐하고 “양일전(養一箭)이로다! 백보천양 (百步穿楊)이 사실이로구나!” 라고 했다. ‘관슬’은 ‘관슬지기(貫蝨之技)’라고도 한다. 중국에 감승(甘蠅)이라는 명궁이 있었는데, 달리는 짐승이나 나는 새를 쏘아 빗맞히는 일이 없었다. 감승의 제자인 비위(飛衛)는 스승보다 활솜씨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기창(紀昌)이라는 사람이 비위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비위는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방법을 먼저 익히고 나서 다시 오라고 했다. 기창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가 일하는 베틀 밑에 누워서 왔다 갔다 하는 북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훈련을 했다. 기창은 아주 조그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이를 쏘아 꿰뚫었는데, 이를 묶어 놓은 털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기창이 다시 비위를 찾아가 사실대로 말하니, 비위는 "그대는 이미 활쏘는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며 좋아했다.

전주 다가산의 ‘다가(多佳)는 ‘아름다운 사람 많아 미인은 얼굴이 옥과 같다네(多佳人美者顔如玉)’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완산8경’의 하나인 ‘다가사후(多佳射侯)’는 ‘다가 천변 활터에서 활 쏘는 모습’을 말하며, 주 무대는 천양정(穿揚亭, 전북문화재자료 제6호)이다. 혹자는 천양정 입구 안내문에 적힌 글귀처럼 “‘천양(穿楊)’이란 뜻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것으로,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화나 전설 등의 관련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활쏘기는 사대(射臺)에 서서 두 팔로 전통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과녁에 맞추는 행위로, 전국 활터를 중심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씨름(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과 마찬가지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활쏘기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인가.

전주 천양정은 이성계와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