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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1934년 '자천대' 옮기게 된 사연 알고보니

1934년 '자천대' 옮기게 된 사연 알고보니

‘1934년, 일제시대 군용비행장이 만들어지며 옥구 자천대가 옮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34년 6월 10일 자 ‘매일신보’와 1934년 6월 11일 자 ‘동아일보’를 통해 이같은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받고 있다.

군산의 대표적인 최치원의 문화유적으로 자천대는 현재 옥구군 상평읍 옥구향교에 옮겨졌지만 본래는 선연리 하제의 바닷가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자천대(紫遷臺)는 서해안에 있다. 지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샘과 돌이 가히 사랑할만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고 했다. 이중환은 ‘택리지’는 "임피의 서쪽은 옥구로, 서해안에 닿아있으며 자천대가 있었다. 작은 산기슭 한 줄기가 바닷가로 뻗어 들어가는데 그 위에 두개의 돌함이 있었다. 신라 때 최고운(치원)이 태수가 되어 함 속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고 했다. 최치원이 노닐던 정자이자 비서(秘書)가 있는 것이 자천대라고 보면 된다.



‘원래 옥구군 선연리의 동산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후기 군용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이를 상평마을로 옮기고 경현재라 하였다가 1967년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한다.’

이는 전북 문화재자료 제116호 자천대(紫泉臺)의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1934년 6월 10일 자 <매일신보>를 보면, 자천대와 최학수 옥구군수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황폐화 된 자천대를 보며 섭섭해 하는 유림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최군수가 현지를 시찰해 모 은행 소유의 토지임을 확인하고 매입, 완공하기까지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리 발(發) 기사는 16~17일 양일간 성대한 낙성식과 함께 기념백일장도 개최한다며, 시제(詩題)와 형식(七律, 五律)까지 제시하고 있다.

1934년 6월 11일 자 <동아일보>는 "옥구군 옥구면 선연리 자천대는 1500~1600년 전 문창후(文昌侯: 고운의 시호) 최고운(치원)선생의 '유상 독서지'로 지금까지 일반 유림이 경모하여 내려오던 터인데 불행히도 이것을 기념할 만한 정각(亭閣)이 없었으므로 옥구 최학수군수의 철저한 후원과 유림들의 열성으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자천대를 신축했다"며 오월 단오일에 낙성기념 백일장을 거행한다고 소개한다.

자천대는 본래 옥서면 선연리 하제 인근 바닷가의 작은 바위산을 칭(稱)하는 명칭이었다. 그 산 위에 2층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천대가 있던 선연리는 군산 서남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선연리는 '신선과 인연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까지 섬(島)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가 됐다. 1919년 1월 일제가 발행한 지도에도 한자 표기의 '자천대'가 발견된다. 이곳은 뽕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했으며 조선시대 옥구팔경(沃溝八景) 가운데의 하나인 '화산낙안'이라고 해서 상제, 중제 마을의 모래사장으로 내려앉는 기러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신문을 통해 최치원이 20세기 초까지 군산 지역 유림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전설과 고문헌, 옛날 신문 등에 등장하는 최치원 이야기는 육지와 섬(島)을 넘나든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시가 전한다. 송태회선생의 국역 ‘염재유고’엔 ‘자천대 중건록’ 서문이 실려 있다. ‘옥주(沃州)의 자천대는 세상에 전해지기를 최지원선생이 글을 읽던 곳으로 바닷가의 풍경이 밝고 고우며 암석과 골짜기가 빼어나고 기절하다고 한다. 계유년에 선생의 후손 학수(學洙)씨가 마침 이 고을을 맡아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그 곳에 나아가 한 건물을 세우고 그 다음해인 갑술년 5월 5일에 문예 모임을 베풀며 낙성을 했다. 시문 몇 편과 기념 시부(詩賦) 및 고풍(古風) 여러 편을 아우르니 아속(雅俗)이 함께 이르고 지금과 옛것이 볼만하다. 그 책머리에 쓰기를 자천대중건록(紫泉臺重建錄)이라 하고 대의 사진도 찍어 장차 인쇄하려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이 글은 병자년 12월 상순에 썼으며, 이때는 1936년에 해당한다.

이처럼 군산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최치원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온 생활문화의 한 축을 차지한다. 지금 군산은, 전북은 이를 문화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나. /이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