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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1> 전라감영 전라관찰사 선정비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1> 전라감영 전라관찰사 선정비

전라감영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56개 군·현을 관할하던 관청이다. 감영은 관찰사·도백으로 불리던 감사가 행정권·군사권·사법권을 행사하던 곳이다.
2020년 복원을 끝마친 전라감영엔 웅장한 외관과 우아한 곡선의 팔작지붕이 돋보이는 선화당과 내아, 내아행랑, 관풍각, 연신당, 내삼문, 외행랑 등 7동의 핵심 건물이 들어섰다.
선화당 내부에는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공사관 무관인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의 사진자료를 재현한 6폭의 디지털 병풍이 있다.
선화당 동쪽에는 관찰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누각인 관풍각이, 선화당 북쪽에서는 200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회화나무 근처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취하던 연신당, 관찰사 가족들이 지내던 내아와 내아행랑이 있다. 다가공원에 있던 전라감사 선정비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담장을 따라 가면 어디서 본듯한 비석 27개가 한일(一)자로 서있다. 판관이돈상영세불망비, 판관민치준영세불망비, 관찰사서기순청백선정비,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전라감영 선정비로는 조선시대 세워진 관찰사 18기, 판관 5기, 중영장과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비석이 있다.
1884년 세운 ‘관찰사김공성근영세불망비’를 보면 전주를 보호하는 성 동쪽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큰 연못의 연대가 오래되어 붕괴해 백성들이 가뭄 피해를 입어 매년 흉년을 걱정하게 되자 이를 가엾게 여긴 해사 김성근 관찰사가 제방을 부서 동쪽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재앙을 구제하려 창고를 풀고 부역을 경감하고 세금을 줄였다네. 
제방을 쌓고 정자를 지어 함께 즐기고 
망친 농사가 다시 살아나도록 광대하게 물을 댔다네. 
은택이 흘러 끝이 없으니 이 돌처럼 닳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네’

賑災損廩 輕徭省帖
蘇提爰築 歐亭共樂
病農昭蘇 漑灌溥慱
澤流無垠 玆石不泐

진재손름 경요성첩
소제원축 구정공락
병농소소 개관부단
택류무은 자석불륵

비의 뒷면을 보면 김성근관찰사가 인봉리저수지의 축조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저수지 둑방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봉리(麟峰里)는 기린봉(麒麟峰)의 인봉에서 비롯됐다. 말 그대로 기린봉 마을 즉 기린봉의 산자락으로 감싸 안긴 동네이다. 
조선시대 전주부성과 인봉리 사리에는 인봉지 즉 인봉리방죽이 있었다. 이 방죽은 전주부성의 동문과 북문 사이의 담에서부터 인봉리에 이르는 지대가 모두 논과 밭이었기 때문이다.

 인봉리 방죽 가운데에는 ‘일육정(一六亭(또는 육일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실용적인 기능은 물론 유원지로서도 기능을 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대에 전라관찰사 김성근이 전주의 북쪽에 있는 밭의 한해를 구제하기 위해 이 연못을 수축하고 연못 가운데 1칸6각의 정자를 지어 일육정이라 하고 연못에 배를 띄워 축연하였다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에는 ‘인봉제(燐峰堤, 麟자가 아닌 燐)’는 전주부의 동쪽 5리 기린봉 아래에 있다. 전주부의 동북성 밖에는 물의 근원이 없어 능히 물을 댈 수가 없었던 바, 관찰사 서정수가 바로소 제를 만들었다. 둘레는 1,742자, 수심은 5자이다’고 기록됐다.

 서유구의 ‘완영일록(完營日錄)’ 1834년(순조 34) 5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인봉제의 채정(彩亭)은 제언(堤堰)을 파내어 소통시키는 일을 마친 뒤에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쌓아 그 위에 조그만 ‘육모정(六茅亭)을 지었다.(육모정은 여섯 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 처마가 여섯 모가 되게 지은 정자를 말한다.) 육모정을 짓고는 기와를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전돌을 까라 마루를 만들며 계단 둘레에 잔디를 입히고 섬을 빙 둘러서 나무을 심어 한가한 날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또 작은 배 한 척을 만들어 난간을 채색하고 베돛을 달아 정자 아래에 매어두고서 고기를 낚거나 연꽃을 감상하는 도구로 삼았다. 남고별장(南固別將) 김기중(金基中) 공사를 돌보게 했다.

오늘날 문화촌(文化村)이라고 불리는 중노송동 옛날 공설운동장 자리가 방죽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기린봉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계곡물과 빗물이 흥건하게 고였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도시 중심변의 유일한 유원지였다. 

6.25사변 이후까지도 그 아름다운 정취가 시민들의 눈길을 자주 끌어 들었는데 그 자리를 메우고 1949년 전주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상단은 경마장, 하단은 공설운동장이 되었는데 주로 하단을 인봉리 방죽이라고 했다. 이후 전주종합경기장은 설립 당시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설비가 충당되고 지난 1963년 제44회 전국체전시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또, 1892년에 세워진 ‘암행어사이공면상영세불망비’를 볼 땐 선정의 내용과 다른 이면도 함께 보아야 한다.
조선의 마지막 어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면상에 대한 평가는 흑이 많다. 전남 송광사에 가면 그의 선정비가 반절로 쪼개져 계단석으로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니고 있다. 전라감영 선정비에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주는 대목이 없고, 선행을 했다는 기록만을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비석은 어디에서 옮겨온 것인가.

당초 전라감영의 정문은 포정루(布政樓)였다. 포정루는 명견루(풍남문)가 보이는 도청 동쪽 경계와 전주완산경찰서 동쪽 경계를 잇는 경목선도로 중앙지점 즉 전주상공회의소 앞 사거리로 보인다. 조영국 전라관찰사때 신문고가 설치되면서 백성들의 민원을 전라감사에게 직소할 수 있었다. 안쪽에는 팔달, 바깥 쪽에는 포정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전주의 중심도시 팔달로 역시 사통팔달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와 함께 전라감영의 출입문이었던 이 포정루에서 기인한다.
훗날 경찰국은 전주 시내 곳곳에 주인없이 넘어지고 파묻힌 비석을 다가산 밑 제방 위로 옮겨 정돈식을 거행, 커다란 비석군을 이뤘다. 

1954년 4월 25일 안진길 전주시장때 다가공원으로 옮긴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때문에 66년 만에 원래의 자리가 있던 곳으로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