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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6> '1455년 단종실록의 전북 효자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6> '1455년 단종실록의 전북 효자들

효와 충은 5백년 이상 조선왕조의 수명을 지탱한 원동력이다. 가정에서의 사랑과 공경이 나라에 대한 충으로 연결되면서 나라의 질서가 확립됐다. 때로는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효와 충을 실천하였다. 부모를 위한 헌신, 봉사, 희생이 효라면 그것이 확장하여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충이라 했다. 
조선초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문화전성기를 구가한 군주로 세종대왕을 말한다면, 그 손자 단종은 불운한 임금이었다. 숙부의 왕위 강탈로 한순간 임금의 자리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유배와 사약까지 받는 역적의 신세가 되었다. 유배지 영월을 단종 애사(哀史)로 자리매김한 사유다. 영월의 또 다른 명물 고씨동굴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단종과 고씨동굴, 모두 효와 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어린 단종은 대단한 효자로서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못다한 효행을 적극적인 효행자 포상정책으로 당대 효자들을 기리었다. 
이를 위해 왕조실록은 주요한 자료가 됐다.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 2월 29일 을사 2번째 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의정부에서 효자·열녀 등을 아뢰다

의정부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전 역승(驛丞) 홍간(洪簡)은 아비가 죽자 분묘(墳墓)를 지켰고, 그 어미가 또 복통(腹痛)을 만나서 곡도(穀道, 대장(大腸)과 항문(肛門)가 통하지 못해 몸이 뻣뻣해져서 거의 죽게 되자, 홍간이 정강이 살을 베어 잘게 썰어서 가루로써 환(丸)을 만들어 술에 타서 드렸더니, 곡도(穀道)가 드디어 통(通)하고 그 병이 조금 나았습니다. 이튿날 또 드리니, 커다란 흰 지렁이가 곡도(穀道)를 따라서 나와서 그 병이 아주 고쳐졌습니다.

전 부사정(副司正) 김맹방(金孟倣)은 그 아비가 악성 종기(腫氣)를 앓아서 죽으려 하자, 스스로 정강이 살을 베어 잘게 썰어서 술에 타서 바치니, 그 아비가 즐겨 마시려 하지 않았는데, 김맹방이 먼저 맛을 보니, 아비가 그제서야 마셔서 그 병이 조금 나았습니다. 뒤에 아비의 병이 다시 생기자, 또 '살을) 베어서 바치니, 곧 나았습니다.

'위의 사람들은 '모두 효행(孝行)이 특이(特異)하여 사람들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정문(旌門)하고 서용(敍用)하소서.

김제현(金堤縣) 학생(學生) 한계충(韓繼忠)은 나이 2세에 어미가 죽고, 나이 10세가 못되어 아비가 또 죽으니, 무덤 옆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哭)하고 전(奠)드리어 3년을 마쳤습니다. 나이 30에 이르러 몸소 스스로 흙을 져다가 다시 어미의 무덤을 만들고 거친 옷[麤衣]에 짚신을 신고서 또 3년을 마쳤습니다. 또 적모(嫡母)가 죽자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친히 스스로 음식을 끓여서 '전(奠)드리고' 무덤을 3년 동안 지켰습니다. 또 아비와 어미의 모습을 그려 놓고, 나갈 때 고(告)하고 돌아와서 뵈었습니다.

부안현(扶安縣) 양녀(良女) 소사(召史)는 그 남편인 선군(船軍) 한을생(韓乙生)이 죽으니, 15년 동안 해어(海魚)와 육류(肉類)·파·마늘을 먹지 않았고, 세월이 오래 되어 옷이 해어지면 다시 흰 옷을 입었습니다. 그 형제가 그녀의 가난하고 자식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금구현(金溝縣) 학생(學生) 유구원(柳九源)이 죽자, 그 아내 잉질덕(芿叱德)은 무덤을 3년 동안 지켰고, 지금까지 8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또 남편의 모습을 그려서 방(房) 안에 걸어 놓고 아침 저녁으로 곡(哭)하고 전(奠)드리었고, 관복(冠服)을 좌우에 두고서 이를 섬기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습니다.

금산군(錦山郡)의 고 주서(注書) 길재(吉再)의 딸은 유학(幼學) 이효성(李孝誠)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舅姑]를 섬기기를 부모(父母)를 섬기듯이 하였습니다. 26세에 그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자, 모든 상제(喪制)에 관계되는 일을 한결같이 '가례(家禮,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따르고 부도(浮屠)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 시아버지가 이효성의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여러 아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으나, 길씨(吉氏)의 효성(孝誠)에 감복하여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길씨(吉氏)가 그 뜻을 알고서 시아버지에게 다 돌려주고 자기의 노비(奴婢)를 거느리고 봉양(奉養)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시부모가 감복하여 뉘우쳐서 그 노비와 전지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정사년(1437 세종 19년)에 이르러 그 어미가 병이 나자, 친정 집으로 돌아와서 곁에서 모시다가 '어미가' 죽게 되자 그대로 머물렀지만, 매 절기(節氣)에 반드시 의복(衣服)과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서 돌아가 시부모를 뵈었습니다. 그 오라비 길사순(吉師舜)이 서울에서 벼슬살이할 때에 길씨(吉氏)와 그 언니 김석정(金石精)의 처(妻)가 동심(同心)으로 그 양미(糧米)를 보내 주었습니다. 길사순이 죽자 아들이 모두 어리고 약하니, 조카를 시켜 시체를 맞아 와서 집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또 조카로 하여금 상례(喪禮)를 주장하게 하였고, 길씨(吉氏)는 길사순의 아내와 같이 거처하면서 상복(喪服)을 기년(期年) 동안 입었습니다. 또 김석정(金石精)의 처(妻)가 죽자 3년 동안 심상(心喪, 상복(喪服)은 입지 않으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고 근신(謹愼)하던 일)했습니다. 또 시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몸소 스스로 약(藥)을 받들었고, 죽게 되자 울다가 눈이 어두워졌으며, 여러 아들들이 불사(佛事)를 행하려고 하였으나, 길씨(吉氏)가 장자(長子)의 아내로서 먼저 삭제(朔祭)를 행하니, 여러 아들들이 이로 인하여 감탄하고 깨닫고서 다만 삭망전(朔望奠)177) 만을 행하였습니다.

창평현(昌平縣) 학생(學生) 김하손(金河遜)이 죽자, 그 아내 안씨(安氏)는 나이 22세였는데, 집 북쪽에 장사지내고 아침 저녁으로 곡(哭)하고 전(奠)을 드리면서, 3년을 마치었습니다. 그 아비는 그녀가 일찍 과부가 되고 가난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서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위의 사람들은' 그 부녀(婦女)로서의 행동이 가상(可賞)하니, 마땅히 아울러 복호(復戶)하소서.

전주(全州)의 유학(幼學) 복윤문(卜閏門)은 어미가 죽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친히 스스로 음식을 꿇여서 지성(至誠)으로 전(奠)을 드리었고, 집이 15여 리(里)의 거리였는데도 매일 아비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방에 문안을 드리던 것을 말함)하면서 3년을 마쳤습니다. 어미의 영정(影幀)을 깨끗한 방에 걸어 놓고 삭망(朔望, 초하루 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그 시물(時物, 절기(節氣)에 따른 물건)을 바치고, 나갈 때 고(告)하고 돌아와서 뵈오면서 섬기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습니다.

김제현(金堤縣) 전 부사정(副司正) 김손지(金遜之)는 어미가 죽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었고, 비록 날씨가 춥더라도 망혜(芒鞋, 짚신) 를 신고 따뜻한 옷을 입지 아니하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습니다. 또 그 아비가 병으로 고생하자, 똥[糞]을 맛보면서 소리내어 울고 자기의 몸으로써 대신하기를 빌었습니다. '그 아비가' 죽게 되자, 한결같이 어미의 상(喪)과 같이 하였으며, 그 계모(繼母)를 섬기기를 친어미를 섬기듯이 하였습니다.

옥구현(沃溝縣) 학생(學生) 이경문(李景文)은 그 아비가 죽을 때에는 어미의 묵은 병 때문에 여묘(廬墓)살이할 수가 없었는데,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친히 스스로 음식을 끓이어서 두 무덤에 전(奠)을 드리었으며, 3년을 마친 뒤에도 상복(喪服)을 벗지 아니하고 그대로 아비 무덤에 거처하면서 비통하게 슬피 우는 것이 초상(初喪)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위의 사람들은' 모두 효행(孝行)이 가상(可賞)하니, 마땅히 재주에 따라서 서용(敍用)하소서

남원부(南原府) 김자강(金自江)이 병으로 고생하자, 그 아내 연금(衍金)은 음식(飮食)을 끊었고, '남편이' 죽게 되자 함께 죽고자 하니, 부모(父母)가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바깥에다 풀섶으로 장사지내고 그날로 죽었습니다. 마땅히 정문(旌門)하여 절개를 권장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29장 B면, 국편영인본 7책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