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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5> '두릉(杜陵)'은 만경현(萬頃縣)의 옛 이름, 한국 고승의 본향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5> '두릉(杜陵)'은 만경현(萬頃縣)의 옛 이름, 한국 고승의 본향

법상종의 개종자인 진표와 선종 개종자인
영허 해일(暎虛 海日), 진묵, 탄허 등과 같은 명승이 바로 김제 만경출신 스님들이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도 이곳 출신이다.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의 속명은 일옥(一玉)으로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지역)에서 태어났다. 화포(火浦)는 불거촌(佛居村)의 다른 이름으로, 즉 ‘불(佛)’의 음을 취한 뒤 불을 뜻하는 ‘화(火)’자를 쓰고, ‘거(居)’가 개로 음이 변한 뒤 갯마을을 뜻하는 ‘포(浦)’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불거촌은 진묵대사와 같은 고승(高僧)을 낳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음은 해일(海日)스님(1541년∼1609년)
의 '영허집(暎虛集)' 의 '영허대사시집서(暎虛大師詩集序)'이다

나는 *운산(雲山)에 대해 생각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런 어느 날 저녁, 시골집으로 한 스님이 시고(詩藁)를 들고 찾아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은 우리 스승님의 시입니다. 나으리께서 우리 대사님의 시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감히 찾아와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시를 간행하려고 하는데 나으리께서 서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받아서 펼쳐보니, 시가 원명평담(圓明平淡)하여 그리 한초(寒峭)하지도 않고 *총령(葱嶺)을 넘어온 자취도 적었다. 요컨대 시는 성정에 근본을 둔다는 것에도 크게 어긋남이 없고, 유가(儒家)의 ‘덕이 있는 자에게는 좋은 말이 있다’는 말에도 합치하는 것이 실로 많았다. 대사여! 대사여! 선정(禪定)으로부터 지혜가 생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혼예(昏翳)를 모두 정화시킬 수 있었겠으며, 다름을 물리치고 같음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혼융(渾融)함을 말로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말할 바가 못 된다.
대사의 본가는 *두릉(杜陵)이며, *영주산(瀛洲山)에서 삭발했다. 나는 세속의 사람으로 대사와는 산 시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데, 비록 *도연명과 혜원의 결사(結社)한 일은 없었지만, 언제나 *허순과 지도림의 방외의 교류를 바랐다. 신심(神心)에서 느껴 깨달은 것은 아득하여 알기 어렵거늘, 지금 무료한 때에 그 시고를 얻어 보고 여산(廬山)과 회계(會稽)의 노닒을 혹시라도 아침저녁으로 그 자취를 따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내가 말로써 발휘할 것은 없지만, 이 시들이 흩어져 없어질까 염려되는바, 마침내 권면(卷面)에 써서 준다.
아! 나는 대사의 몸이 과연 어디로 돌아갔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시와 명성만은 아직도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았다고 본다.

숭정(崇禎) 을해년(乙亥年, 1635년) 3월에 천태산인(天台山人)이 쓰다.

暎虛大師詩集序 

舊聞師能詩。然詩本性情。浮屠不識性
又割情爲戒律。寧有於詩耶。設有之
謂若渠家所稱話頭之類。是不足觀也
已。或意山中人正㝎解脫。造語自然成
響。蹊逕不由。直至好境。而我猶未之
見耶。雲山之想。歲月已深。一夕於郊
扉。僧有執一詩藁。授余而言曰。此吾
師詩也。聞公欲見吾師詩。敢來相授
將詩入梓。願公之序之也。余受而披閱
之。則詩圓明平淡。未甚寒峭小。葱嶺
來氣。習要之性情。亦無大誖。其合於
儒之有本有言者實多。師乎師乎。不
能從㝎生慧。則安得以淨盡昏翳。不能
黜異求同。則安得以言出渾融。不同不
相謀。非今日所言也。師本家杜陵。上
瀛洲山落髮。余爲山下人。與師生世早
晩。雖無陶慧修社之事。每希許支方外
之交。神心感會。渺渺難了。何幸于今
無聊。獲見其詩什。廬山會稽之遊。倘
可朝暮追之無語發揮。恐詩零落。遂書
卷面相贈。噫。余未知師身果歸何。
獨詩與名尙在也。崇禎乙亥。三月。日。天台山人書。

1)운산(雲山): 세속과 떨어진 곳이란 의미로 주로 은자나 출가한 이의 거처를 일컫는다.

2)총령(葱嶺) : 즉 파미르 고원(高原). 북으로 뻗은 줄기가 중국과 서역(西域) 지방을 동서로 나누면서 천산 산맥과 이어져 있다. 불교가 바로 이 지역에서 왔으므로 곧 불교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3)두릉(杜陵): 만경현(萬頃縣)의 옛 이름으로 ‘두산(杜山)’이라고도 했다. 지금 전라북도 김제시 지역이다. 만경 두씨(萬頃杜氏)는 김제시 만경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4)영주산(瀛洲山):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소속의 변산반도 내변산으로 ‘능가산(楞伽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의 남쪽에 내소사(來蘇寺)가 있다.

5)도연명과~결사(結社)한 일 : 즉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말한다. 진나라 때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혜원법사(慧遠法師)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은 유불의 구분을 떠나 함께 도를 논의한 바 있다.

6)허순과~교류 : 허지(許支)는 진(晉)나라 때 명사(名士)였던 허순(許詢)과 당시 고승이던 지도림(支道林)으로, 이들은 비록 유자와 불자의 관계였지만 회계산(會稽山)에서 교유하면서 종유했다.

해학 이기는 '두릉(杜陵)' 등 작품을 통해 음식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두릉(杜陵)'

이기

두릉에선 한식날
풀이 천지에 가지런히 자라고
오래된 버드나무와 새로운 부들이
물 언덕에 피어 있다

몇 마디쯤 되는 미꾸라지는
잡을 만해서,
밤이 깊도록 아직도
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해학 이기(1848~1909)는 고향인 김제 만경의 다른 이름인 '두릉'이란 작품을 통해 큰 미꾸라지를 잡았다.

그는 유형원, 정약용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말 실학자이자 항일독립 투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했다.

이어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교육자로써 민중계몽에 힘썼으며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하려는 뜻으로 1909년 단학회 창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동짓날

동짓날 여행중이던 서울 사람이 찾아오다(至日客中洛人見過)

이기

때를 알리는 북소리 들으며
세상일 주고받는다
동짓날 또한 깊은 인연이 있겠지
팥죽은 어찌하여 세모를 재촉하나!
매화는 이제부터 고운 때를 만나리라.

어촌에서 술을 사오고
이별한 지 삼 년 만에
거문고 안고 밤을 보내는데
말도 꺼내기 전에
옛 기억이 새삼스럽다.
시종이 손수 찻물을 끓인다.

감로천(甘露泉)

명부 박항래와 함께 천은사에서 놀다(同朴明府恒來遊泉隱寺)

이기

지리산 산속에 있는
감로천(甘露泉)은
원천이 백길 높이에 있어
우러러 쳐다본다

그곳엔 불성이 담겨 있어
허공에 떠 있고
위로는 신선이 사는
소유천(少有天)이 접해 있다

군수의 이번 행차는
참으로 좋은 일이고
지난밤엔 절간에서
잠도 편히 주무셨단다

찻사발로
푸른 구름을 마시면서
스님들과 마주 앉아
지나온 한 해를 주고받았다

절에 감천(甘泉)이 있다고 들었다
한번 마시면 폐병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말발굽을 햇볕이 비추고,
매미 소리는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많이 들린다

관청 부엌에 술이 있어
사람들은 모두 취하고
선방(禪房)에는 티끌 하나 없어
손님들이 잠을 잔다

어찌하면 집을 옮겨
가까운 곳에 살면서
차 화로 곁에서 경전을 읽으며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을까

들 절로 돌아와
감로 샘을 찾아간다
이끼 빛 들쭉날쭉한
돌계단이 걸려 있다

활짝 갠 풍경이
유달리 교외에 많고
싸늘한 바람은 언제나
숲 하늘에 남아 있다

관청 술은 바다처럼
많이 마실 수 있지만
나그네 베개는 가을처럼
도리어 잠이 부족하다

정토 세계 응답하지 않고
백발만 자라는데
술잔 앞에서 웃으면서
스님 나이를 물어본다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는 천은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우측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지리산 3대 사찰’ ‘구렁이의 전설이 깃든 감로천’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수홍루’ 등의 표현은 마치 천은사를 대표하는 핵심 문구처럼 부각된다.

인근 화엄사, 하동 쌍계사와 더불어 지리산을 대표하는 이 절집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인도 출신 덕운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도선국사가 중창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 이후로 번성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사찰의 역사는 잊히고 지워졌다.

이후 1610년 소실된 가람을 중창해 명맥을 이었고, 1679년엔 감로사였던 절 이름을 천은사로 바꾸었다. 앞서 소개한 ‘구렁이의 전설’도 절 이름과 관련됐다.

절 샘가에 출몰한 큰 구렁이를 잡아 죽인 후로 물이 솟지 않아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가 되었다는 것.

 하지만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등 불상사가 끊이질 않자 원교 이광사(1705~1777)가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로 일주문 현판을 써주자 그 후론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예쁜 무지개다리 수홍루가 보인다. 천은사의 아름다움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수홍루를 건너 경내로 들어서면 아직은 초록인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와 석등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지난 5월 지방유형문화재였다가 보물 제2024호로 승격된 극락보전이 나온다.

천은사의 숨겨진 비밀은 팔상전을 돌아 담장 밖으로 나설 때 진가를 발휘한다. 야생차밭을 지나 계곡을 건너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알파피넨 성분이 풍부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쉬엄쉬엄 이 길은 수홍루 앞에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