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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사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국가무형유산돼야

매년 대한민국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예향의 고장인 전주에서 국악축제가 펼쳐진다. '사습놀이'란 조선 숙종때의 마상궁술대회와 영조때의 물놀이와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놀이를 일컫던 말이다. 영조 8(1732) 지방 재인청(신청)과 가무 대사습청의 설치에 따라 전주에 4개정(군사정, 의방정, 다기정, 진북정)을 두었고, 최초로 대사습대회가 베풀어진 뒤 매년 연례행사로 실시됐다.

안타까운 것은 대사습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김제출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뿐이다. 그러나 조선창극사의 기록마저도 대사습의 기원이나 유래, 또는 성격에대한 서술이 전혀 없이 오로지 대사습에 참가하였다는 기록정도만 보일 뿐이어서 매우불충분하다 조선창극사중에서 대사습과 관련된 명창은 유공열과 정창업 뿐이다. 그 중에서 유공열 명창과 관련해서는 “30세 경에 전주대사습장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비로소 명성을 얻게되었다는 정도이다.

대사습이란 판소리 명창들의 학습을 보여주는 큰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조선 숙종 이후 전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타고 활쏘는 활쏘기대회의 일종이었으므로 대사습(大射習)’으로 쓰기도 했다. 그 뒤 영조 무렵 물놀이가 함께 연행(演行)됐고, 철종 무렵 여러 가지 놀이와 더불어 판소리경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연방법은 지금과 같이 심사위원에 의한 심사가 아니었고, 어느 특정인에게 명창의 칭호를 안겨 주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대중들에 의해 명창으로 불리게 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연은 전주의 전라감영과 전주부의 통인청(通引廳) 주관으로 해마다 동짓달에 전주의 다가정(多佳亭)과 같은 정자에서 열렸다. 이 두 통인청은 따로 잔치를 벌이며 판소리 명창들을 불러다 소리를 시켰는데, 서로 보다 뛰어난 명창을 불러 청중들에게 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많은 돈과 극진한 대접으로 명창들을 확보하였고, 또한 숨은 명창들을 찾는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동지 때가 되면 전국의 명창들과 젊은 판소리 학도들이 치열한 경연을 벌였고, 판소리를 즐기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판소리의 가장 큰 잔치로 발전했다.

순조 때의 주덕기, 철종 때의 박만순·정창업·김세종, 고종 때의 유공렬 등이 대사습을 통하여 배출된 대표적인 명창들이다.바로 이같은 노력의 결과로 대사습에서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은 거의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젊은 판소리 학도들은 여기서 기량이 인정되면 판소리 명창으로 판가름이 나기 때문에 이를 등용문으로 생각하여 다투어 참여했다고 한다. 대사습은 한말 이후 중단되었다가, 1975년 전북지방 유지들의 힘으로 70여년 만에 부활됐다.

대사습은 예나 지금이나 해마다 많은 명인과 명창들을 탄생시켜 우리의 민속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전주대사습놀이가 무형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등재되기 위해서는 국악예능 경연대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민이 함께하는 전통축제의 현장으로서 중심이 바로 잡히도록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16일 한국전통문화전당 교육실에서 열린 전주대사습청과 무용역사기록학회가 주최하고 전주시,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가 후원한 ‘2024 전주대사습청 학술포럼에서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전통의 복원을 넘어 다양한 예술이 공존하는 경연과 축제의 장으로서 문화재창조에 기여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문화로 지역 공동체적 가치와 지속성과 발전 가능성을 기반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역사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문헌에 대한 정리, 기록 등에 있어서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근거와 조사, 연구로 복원과 함께 그 자료와 정교한 논리를 축적한다면 가능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