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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홀로 일제 주재소 습격 ‘괴도 김춘배’ 아시나요

홀로 일제 주재소 습격 ‘괴도 김춘배’ 아시나요


기자박임근
수정 2019-02-28 18:11


홀로 일제 주재소 습격 ‘괴도 김춘배’ 아시나요
이승철 완주 향토문화연구소장
 삼례 출신 독립운동가 조명 ‘29년’
 함경도 등서 무장투쟁하다 무기형
 “고향서도 아는 사람 별로 없어”

“전북 완주군 경천면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기리는 독립운동추모공원이 있어요. 하지만 선열 28위를 모신 이곳조차 이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흔적이 없고 그를 아는 사람도 없어요.”

한 독립운동가를 29년 동안 천착한 이승철(86) 완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의 안타까움이다. 동상이나 기념비는 고사하고 유족을 빼면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며 3·1운동 100년을 계기로, 더 늦기 전에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생가터 매입과 기념사업회 결성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설명한 독립운동가 김춘배는 1904년 전주군 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학교인 만주의 영신학교를 다녔고 1917년 일가 모두 간도로 이주했다.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에 1927년 가입했고, 중국 옌지(연길)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을 하다가 붙잡혀 8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 풀려났다.

그해 10월 홀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를 공격해 총기 8정과 실탄 700발을 탈취했다. 2만여명이 동원된 일제 포위망을 피해 일본인 순사부장 등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활약했으나, 서울로 내려오다가 19일 만에 붙잡혔다. 혼자서 주재소를 습격한 이 항일운동은 ‘함남권총사건’, ‘북청권총사건’ 등으로 불렸다. 해방 뒤 출옥했지만 1946년 12월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본 순사가 썼다는 책 <괴도 김춘배>의 복사본.
일본 순사가 썼다는 책 <괴도 김춘배>의 복사본.
“3·1독립선언서에 참가한 33인은 최고형이 대부분 징역 3년 정도인데, 김춘배는 무기징역형을 받았어요. 독립운동이 모두 소중해 활약상의 경중을 따질 순 없지만, 홀로 치열하게 무장활동을 한 김춘배는 아직도 의사, 열사, 지사 등 호칭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어요. 조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국사 교사 출신인 이 소장이 독립운동가 김춘배에 빠져든 것은 1990년 8월15일 <전북일보>에 게재된 활약상을 읽고 나서다. 유족을 만나 얘기를 들었고 호적·족보 등을 열람했다. 일제강점기 때 활약상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찾아냈고, 일본 순사가 썼던 책 <괴도 김춘배>도 구했다. 하지만 자료가 빈약했다. 독립운동으로 도피 생활을 했을 땐 신분을 숨겨야 해서 이름도 ‘길동’, ‘춘산’ 등 여러 개였단다. 묘지도 확인하지 못했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기록도 찾지 못했단다.

그는 지난해 7월 유족들이 106쪽짜리 소책자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발간하는 데 힘을 보탰다. “돈이 부족해 사진 등을 많이 넣어 보기 좋게 만들지 못해 아쉬워요.”

정부는 1990년 독립운동가 김춘배에 대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를 보도한 <전북일보>의 1990년 8월15일치 지면.
정부는 1990년 독립운동가 김춘배에 대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를 보도한 <전북일보>의 1990년 8월15일치 지면.
이 소장은 3·1운동 100년을 맞는 지금이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3·1운동 100돌을 맞아 신문·방송에 일회성으로 한 번만 소개된 채 끝나선 안 됩니다.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조명해서 후속 조처를 끌어내야죠. 흔히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해 많이 얘기합니다. 지속적인 선양 사업이 가능해지려면 기념사업회가 조직돼야 하는데 유족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많아요. 행정기관 등에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1운동 100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고민해야 합니다.”

글·사진/박임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