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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송태회의 '성산기(聖山記)'

송태회의 '성산기(聖山記)'

고창에서 북쪽으로 백여 걸음이 못되는 곳에 산이 있으니 '성산(聖山)'이라 한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늙은 소나무가 우거져 썩 볼만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산발치에 문묘(文廟孔 내신 곳)가 있고, 문묘로부터 왼쪽에 생울타리로 둘려져 있는 곳이 교촌(校村)이요, 오른쪽으로 깎아 지른 듯한 낭떨어지 아래 으리으리하여 화엄루각(華嚴樓閣)같이 우뚝 솟은 새로 지은 건물이 고창고등보통학교이다. 
내 매양 학교수업이 끝나면 능선을 타고 이 산에 오르고 하는데 대개 이 산이 쪽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왔으니, 곧 여지승람에서 말하는 바 노령(蘆嶺)산맥이 이것이다. 
방장산이 남쪽으로 내려가 문수산(文殊山)이 됐다. 문수산 못미쳐 다시 북쪽으로 접어들면서 십여리를 꾸불거리고 내려와 모양성(牟陽城) 곧 옛날고을 관사가 있던 곳이 됐다. 
여러 묏뿌리와 어울러 시가지의 집들이 책상을 벌여 놓은 것 같고, 여러 골짜기 물들이 합하여 반룡천이 되어 시가지 가운데를 꿰어 흐르는데 마치 옷고름 짝과 허리띠를 두른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운산(雲山)이 훤히 터져 바다로 통하는 연안에 넓은 들판이 열려 있다.

내 생각에 산 이름이 반드시 문묘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고을 있는 곳에 반드시 문묘가 있고, 문묘는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있게 마련이라 성산이라고 할만한데 유독 이 산만을 성산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군지(郡誌)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307년 전에 이 고을 선비 오희길(吳希吉)과 안지) 등 여러분들이 이 산의 동쪽 기슭 학당(學堂)고을(지금 산소골 벽산사 부근)로부터 문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했으니 혹 그때부터 이르는 이름이냐? 
그렇지 안으면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이름이냐? 
사람이야 응당 성(聖)과 우(愚)가 있게 마련이거니와 산도 또한 같단 말이냐? 그러나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에 어진 사람은 산을 즐겨한다 했는 바 산의 중후한 품이 인(仁)의 도(道)에 가까운 까닭이라. 
윗사람이 그 말씀을 생략하여 인산(仁山)이라 하니 이를 미루어 보건데 성산이란 호칭도 그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 산에 올라서서 전망하는 데만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떨어져 바라다보면 엄연하여 단정한 신사가 정장하고 서있는 것 같고, 가까이 가보면 알현하여 점잖은 군자가 인자한 모습으로 음양하는 것 같으니 말하자면 보통 범산은 단연 아니다. 
더구나 문묘가 있어 옛 성현들이 강림하시고, 학교가 있어, 새로운 인재들을 양성해 내니, 이대로 간다면 성현이 되기를 희구하는 무리들과 기를 완성하고 문리를 통찰하는 학자들이 배출되어 안으론 윤리도덕을 양하고, 밖으론 과학 기술을 발휘하여 신구가 함께 아름답고, 문질이 서 공헌하여 찬란히 빛나면 그 이름에 그 의의가 또한 거룩하지 않겠는가? 
다만 한가지 두려운 것은 일이란 원래 이름이 근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내 인사들이 쪼들리는 형편에 적은 힘이나마 다 보태어 이 굉장한 건물을 지어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삼으니 이는 사람과 산이 한데 어울려 서로 영광(榮光)이 되는 것인 바, 만약 후배들이 능히 끝을 맺지 못하고 한갓 이름만 근사하게 내세우고, 오래 유지하는 계책이 따르지 못할 지경이면 이는 교육계에 웃음거리가 될뿐만 아니라 거듭 이 산에 대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저 눈앞의 오밀조밀한 경관이 무슨 보탬이 될가보냐. 
이 어찌 힘쓸 일이 아니냐? 교사 준공이 되었으니 나는 이 산을 향하여 축원하고 또 그 이름을 가지고 글을 쓰노라.

1926년 병인 삼월 중순(양력 4월 23일)

여산후인 염재 송태회(礪山後人念齋 宋泰會) 짖고 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