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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3> 퀴즐라프, 전북 해안(또는 태안 앞바다)에서 감자 재배법을 가르켜주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3> 퀴즐라프, 전북 해안(또는 태안 앞바다)에서 감자 재배법을 가르켜주다

김창한의 ‘원저보’는 영국 선교사에 의해 감자가 전래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엠허스트호에 네덜란드 선교사 퀴즐라프(Charles Gutzlaff)가 전북 해안(또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다. 그때  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으며 김창한이 그 재배법을 수록,  ‘원저보’를 편찬했다고 한다. 해안이라면 부안, 군산 등일 확률이 크다. 

이는 남방유입설이며,  국내에는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1824년 북방유입설 기록이 최초이다.

감자의 본고장은 남미대륙이다. 페루, 안데스산맥이다. 고구마가 먼저 들어오고, 감자는 나중에 들어왔다. 한반도에 감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820년대였고 당시의 청나라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정확하게 감자를 기록했다. 

 '북저는 일명 토감저(土甘藷)라 하는데 순조 24~25년에 관북에서 처음 들어온 것이다”라고 했다. 순조 24년은 1824년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감자의 전래시기를 1824~1825년으로 특정한다.

감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백두산 지역으로 산삼을 캐러 다니던 청나라 채삼자(採蔘者)가 우리 국경에 몰래 들어와서 산삼을 캤다. 이들이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산골짜기에 감자를 심어 먹었다. 이들이 떠난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밭에 남아 있던 감자를 발견, 옮겨 심었다. 이게 감자의 한반도 전래 시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신빙성은 있다. 

잎은 순무 같고 뿌리는 토란 같다는 평도 남아 있다. 이보다 몇 년 후인 임진년(1832년) 충청도 홍주 지역으로 감자가 전해진다. 

김창한의 '원저보(圓藷譜, 1862년 발간)'에 기록된 상세한 내용이다.

“‘북방으로부터 감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7~8년 지난 순조 32년(1832년)에 영국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가 전북 해안에 약 1개월간 머물고 있었는데, 이 배에 타고 있었던 네덜란드 선교사 귀즐라프가 김창한의 아버지에게 씨감자를 주면서 그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기에 감자를 재배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창한은 아버지가 감자 재배법을 습득하여 전파한 내력과 재배법을 편집해 30년 후인 1862년 ‘원저보’를 출간했다. 영국 상선과 선교사의 이름, 시기, 장소 등이 정확하게 적혀 있다. 북방에서 감자가 먼저 들어왔다는 사실도 또렷하게 기록했다. 

1824년 북관으로, 1832년 전북 해안으로, 8년의 간격을 두고 감자는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외에도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감자 전래 사실은 많다. 

당시 전북 해안과 북관을 통해 전해진 감자 품종이 어떤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두 감자는 달랐을 것이다. 

북관과 전북 해안은 멀다. 기후, 토양도 다르다. 북관의 감자는 북관의 방식으로 재배하고, 전북 해안의 감자는 전북 해안에 맞게 길렀을 것이다. 이 두 곳 이외에도 감자는 여러 경로로 전래한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길렀고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종류의 감자는 서서히 한반도에 정착한다.

조성묵이 1832년(순조 32년)에 지은 ‘원저방(圓著方)’ 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 들어오기는 북개시(北開市)의 영고탑(寧古塔)이니 이것을 북감저(北甘藷)라 부르고 본래 중국의 서남쪽이 원산지인데, 여기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동쪽으로까지 전해진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를 따르면 우리나라의 재래종 감자가 북방으로부터 전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서경창이 1813년에 지은 것으로 기록된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에 의하면 신종민(申種敏)이 1830년에 북관진에서 감자 몇 개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어 

 1912년 ‘조선농회보’ 7월호에는 감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에서 감자재배가 근년에 시작된 것이 아님은 일반으로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역사가 확실하지 않다. 함경북도의 조 참여관(趙 參與官)이 말하기를, 1873년 조선팔도가 일대 천재를 입어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파종이 늦어진데다 음력 8월11일에는 팔도에 첫서리가 내려서 농작물이 전멸했다. 다음 해에 감자가 비로소 들어왔는데, 이것이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것인지 선교사가 직접 수입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서울에는 1879년에 선교사가 들여왔고, 1883년경에는 선교사의 손을 거쳐 감자가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엄(1719~1777년)은 영조 40년(1764년) 6월 18일의 일기에 고구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해사일기)

“이 섬(쓰시마)에 먹을 수 있는 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효자마는) 일본 발음으로 ‘고귀마(古貴麻)’라 한다. 생김새는 산약(山藥, 마)과 같고 무 뿌리[菁根, 청근]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진득진득하고 반쯤 구운 밤 맛과도 같다. 날로 혹은 굽고, 삶아서 먹어도 된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 남경(南京)에서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육지와 여러 섬들에 많이 있다는데, 그중에서도 대마도가 더욱 많다”

조엄은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를 보았다. 식량으로 혹은 구황작물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두 차례 고구마 종자를 동래 일대로 보낸다. 1763년 일본에 도착한 후 바로 보낸 것은 재배에 실패했다. 다행히 이듬해 귀국 길에 보낸 종자는 재배에 성공한다.

숨은 또이야기가 있다. 조엄 이전에 고구마를 한반도에서 기르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영조 때의 문인 칠탄 이광려(1720~1783년)는 중국을 통하여 구황식물로서의 고구마 존재를 알았다. 종자를 구해서 여러 차례 고구마 재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고구마의 한반도 정착은 드라마틱하다. 칠탄 이광려가 여러 차례 실패하고 고구마 재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동래의 고구마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 조엄의 고구마 기르기도 한 차례 실패로 끝난다. 칠탄은 동래로 직접 가서 자신의 ‘실패담’을 전한다. 조엄이 고구마 모종을 다시 구해오고, 칠탄이 실패담을 더하면서 고구마는 어렵게 한반도에 정착한다.

정조 때 호남지방의 기근을 살펴보기 위하여 파견된 서영보의 보고에 의하면 도입된 지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서 고구마는 종자를 구할 수 없는 상당히 희귀한 작물이 되었을 정도로 재배가 원활하지 않았다.

‘정조실록’(1794년 12월 25일)에는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나간 서영보가 고구마에 대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한 후 “이 곡물은 우리나라가 종자를 얻은 것도 일본에서였으니, 이것의 성질이 남방의 따뜻한 지역에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기록해 고구마가 주로 남쪽지방에서 잘 자랐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고구마의 보급을 고려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보급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주목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