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5> '석진단지(石珍斷指)',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완주 고산선비 유석진
유석진(兪石珍, 1378~1439)은 완주군 고산현의 아전이다. 그는 밤낮으로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면서 약을 구했다. 그리고 널리 의원과 약을 구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유석진이 즉시 왼손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그 말대로 하였더니, 그 병이 곧바로 나았다. '단지(斷指)'는 부모나 남편의 위중한 병에 피를 내어 먹이려고 손가락을 자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유석진 효자비는 고산읍 읍내리 428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실록 세종 2년(1420년) 10월 18일자에 유석진의 행적이 실려있다. 고산현의 향교 생도 지활(池活) 등이 유석진의 효행을 현감에게 고했고, 이를 전라도관찰사 신호가 나라에 올려 세상에 알려졌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뽑아 모두 105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 책의 맨 앞에는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도 서(三綱行實圖序)'가 있고, 이어서 목록에서 효자, 충신, 열녀의 고사를 제시했다.
그 구성은 정초(鄭招)가 '삼강행실 발(三綱行實跋)'에서 “'삼강행실도'는 이에 기재한 바 효자·충신·열녀 각각 110명의 행실을 기록하고, 또 형상을 그리고는 시(詩)로써 찬(贊: 사람의 사실을 서술한 뒤에 이를 평론하는 한 문체)했다'라고 한 바와 같이 행실에 대한 내용과 그림, 그리고 시(혹은 찬)로 이루어졌다.
바로 삼강행실도이 '유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石珍斷指)'가 실려 있다. 고을 사람들이 석진의 효행을 현(縣)과 도(道)에 추천하니, 세종대왕이 특별히 삼강행실도에 기술하라 하고 정려를 내렸다.
《삼강행실도》에 기록된 석진의 일화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유석진(兪石珍)은 고산현(高山縣)의 아전이다. 아버지 유천을(兪天乙)이 악한 병을 얻어 매일 한 번씩 발작하고, 발작하면 기절하여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유석진이 게을리 하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하늘을 부르며 울었다. 널리 의약을 구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하므로 유석진이 곧 왼손의 무명지無名指를 잘라서 그 말대로 하여 바쳤더니 그 병이 곧 나았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석진단지>를 보면, 세 장면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먼저, 병저 누운 아버지가 계시고 석진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드는 장면, 그 다음은 집 울타리 밖에서 만난 행인이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드는 비방을 알려주는 장면, 그리고 아버지가 계신 쪽에 칸막이를 치고 석진이 단지斷指를 감행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세 단락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에 모두 들어가 있다.
현재 정려는 고산면 읍내 고산양로당 입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유석진은 기계유씨로 고산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 성보의 손자이다. 원래 운제현 사람으로 고산현의 관리였다. 부친 천을(天乙)이 괴질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자 석진이 즉각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대로 시행하니 즉시 병이 치유됐다고 한다. 그는 죽은 후 사헌부 지평의 벼슬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 태종이 삼강행실을 보고 효순(孝純)이라는 제목으로 시 2절을 지었으며, 1430년 명정이 내려졌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주입하던 ‘효’의 모범 사례 중 특히 이해하기 힘든 단지(斷指)는 705건 중 186건으로 26%에 달한다. 병환 중인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병구완을 한 유석진의 효도란 조선시대 사람들도 감히 따라하기도 어렵고,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완주군의 효자와 열녀
'완주군지'에는 정려를 받은 효자로 강기환(姜琦煥), 구석린(具錫麟), 김광중(金光重), 김기도(金基燾), 김기종(金箕鐘), 김기헌(金基憲), 김복규(金福奎), 김상삼(金相三), 김수철(金守哲), 김원(金瑗), 김익성(金翊城), 김종옥(金鐘玉), 김중복(金中福), 김천동(金千同), 김춘(金春), 김형복(金亨福), 나한정(羅漢井), 박동순(朴東淳), 박상순(朴尙純), 백응만(白應晩), 백치언(白致彦), 송상복(宋相復), 신경은(辛景殷), 심계현(沈季賢), 양두흥(梁斗興), 오령노(吳齡老), 오희첨(吳熙瞻), 유석진(兪石珍), 유우근(柳禹根), 이광준(李光浚), 이기(李杞), 이기필(李起弼), 이동길(李東吉), 이협(李協), 임상인(林尙仁), 임응백(林應栢), 장개남(張凱男), 장몽웅(張夢熊), 정우홍(鄭禹洪), 채홍염(蔡弘念), 최성전(崔性全), 최성철(崔性喆), 최영호(崔永鎬), 최치준(崔致駿), 탁경춘(卓景春), 탁율(卓嵂) 등 47명이 기록되어 있다.
효열이 뛰어난 사람으로 고재충(高在忠), 국신경(鞠紳卿), 김창동(金昌東), 김창진(金昌振), 김형두(金衡斗), 박기열(朴基烈), 유영문(柳榮文), 이종영(李琮榮), 정학교(鄭學敎), 구석관(具碩寬), 구우(具禹), 구후(具垕), 국제익(鞠濟翼), 권계언(權季彦), 김사곤(金思坤), 김진(金瑱), 박상만(朴祥萬), 서병훈(徐炳勳), 손태서(孫泰瑞), 유태양(柳台養), 정삼몽(鄭三夢), 최병섭(崔秉燮), 최석임(崔錫任) 등 23명이 수록되어 있다.
정려를 받은 효부로는 임덕홍의 처 국씨, 박형문의 처 김씨, 최관철의 처 김씨, 정주현의 처 김씨, 송유의 처 박씨, 김상삼의 처 박씨, 우도홍의 처 송씨, 김익성의 처 송씨, 송규환의 처 안씨, 이기필의 처 숙부인 남원양씨, 박항검의 처 유씨, 최옥립의 처 유씨, 정약곤의 처 윤씨, 박함정의 처 이씨, 최이원의 처 이씨, 하명집의 처 이씨, 김언철의 처 장씨, 양국걸의 처 장씨, 이지석의 처 조씨, 이송배의 처 채씨, 장한식의 처 채씨, 박제민의 처 최씨, 김계옥의 처 하씨, 하해갑의 처 이씨, 유언형의 처 이씨, 김태석의 처 이씨, 유광의 처 한씨, 이종상의 처 최씨 등 28명의 생애가 기록되었다.
효열이 뛰어난 부인으로는 배현장의 처 강씨, 김영태의 처 강씨, 국은환의 처 고씨, 임병홍의 처 구씨, 김연배의 처 국씨, 배문영의 처 김씨, 국수갑의 처 박씨, 유인하의 처 서씨, 유영락의 처 신씨, 김상준의 처 양씨, 국규환의 처 오씨, 유영문의 처 이씨, 이상수의 처 이씨, 이종록의 처 이씨, 최극부의 처 임씨, 김용현의 처 장씨, 효부 전씨, 국장환의 처 정씨, 구연옥의 처 조씨, 이종순의 처 조씨, 국응심의 처 황씨, 심춘식의 처 황씨, 박세동의 처 이씨, 국사중의 처 임씨, 국치권의 처 임씨, 성재혁의 처 임씨, 박호순의 처 송씨, 임태순의 처 이씨, 국치응의 처 김씨, 유인혁의 처 김씨, 이용근의 처 김씨, 정영구의 처 김씨 등 36명이 수록되어 있다.
완주문화원이 발간한 『완주군 사료집』-효자·효열편에는 삼례읍 출신으로 유양원(柳良源), 이선배(李善培), 유기현(柳基賢), 유기섭(柳基燮), 유영철(柳英喆), 유지현(柳之賢), 유한철(柳漢喆), 유기창(柳基昌), 유양원 처 인동장씨, 신범균(申範均) 처 파평윤씨, 신태로(申泰魯) 처 경주김씨, 유발(柳誖) 처 남양홍씨, 유기호(柳基灝) 처 평양조씨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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