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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7> 구슬 삼킨 거위 이야기와 '윤회' , 그리고 술버릇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7> 구슬 삼킨 거위 이야기와 '윤회' , 그리고 술버릇

1982년 '국민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를 꺼내보았습니다. 누렇게 빛 바랜 도덕 교과서 속에서 20여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감동과 추억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국어, 산수, 자연, 실과, 미술, 음악, 체육 등 여러 교과서 중에 유독 도덕책에 손이 많이 갔었습니다.

구슬을 훔쳐간 것은 바로 거위. "거위가 구슬을 집어 먹었소이다"라고 외치면 금세 오해를 풀 수 있지만 윤회(尹淮:1380~1436, 고창 무장출신)는 거위를 살리기 위해 묘책을 내놓습니다. 하찮은 동물이라도 목숨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조선 세종 때 윤회라는 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윤회가 길을 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일이다. 모처럼 가는 고향길에 날이 저물어 객사에 투숙하게 됐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손님이 많아 주인이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게 됐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려니 주인집 아이가 구슬을 한 개 가지고 나와 놀다가 마당에 떨어뜨렸다. 곁에 있던 오리란 놈이 그 구슬을 얼른 삼켜버렸다. 아이는 제대로 부모에게 말도 못 했다. 조금 있으니 주인집 사람이 쫓아 나와 윤회를 붙잡고 구슬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윤회는 기가 막혔으나 아무 말 못 하고 오라에 묶여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관가에 데리고 간단다. 윤회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저 오리를 내 옆에 같이 묶어 두시오."
하고 주인에게 청했다.
아침이 되자 오리가 똥을 누니 구슬이 그 속에 섞여 나왔다. 주인은 백배 사죄하고 왜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한다.
이에 윤회가 말했다.
"내가 어제 말을 했더라면 아마 당신은 저 오리를 죽여 확인을 했을 것이오."

동물 사랑도 이쯤은 돼야 하겠다.

이는 구슬도 완전하고 오리도 구한다는 '멱주완아(覓珠完鵝)'고사다.

윤회의 본관은 무송(茂松, 지금의 고창 무장현),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관직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했고, 문도(文度)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려 말 찬성사 윤택(尹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윤구생(尹龜生)이다. 아버지는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소종(尹紹宗, 1345~1393)이며, 어머니는 박경(朴瓊)의 딸이다.

윤소종은 고려 말에 조준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고려 후기 진안 용담 현령을 역임한 문신이기도 하다.

윤회는 세종대왕으로부터 특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은 천재형 학자이자 신하로 외교문서 작성에 능한 청백리이자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여 매일 술독에 빠져 있어 근심꺼리였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세종대왕은 건강을 염려하여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게 했다. 연회 때마다 큰 놋쇠 그릇으로 석 잔씩을 마셨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세종실록 3년 8월 26일자에 실려 있는 윤회의 시(詩)를 소개한다.
 
여름 밭두렁 산들바람에
보리이삭은 길어지고
가을 들판에 빗물이 넘쳐
벼꽃이 향기롭다
우리 임금 한번 놀이로
삼농(三農-봄 갈이, 여름 김매기, 가을 추수)에 바라보니
시월달 타작마당에
풍년은 들고 말리
 
위 시를 읽다보면 들녘의 아름다운 풍경과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윤회가 얼마나 백성들의 먹거리를 걱정하고 풍년을 기원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세종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 태평성대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삽화:윤회와 거위 이야기(그림 오희선 작가, 출처 우리문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