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8> 전북 장수 녹반석과 곱돌그릇 각섬석암
'산고수장(山高水長)' '장강수청(長江水淸)'의 고장이 전북특별자치도 장수(長水)다. 높고 수려한 산세와 굽이굽이 휘도는 물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고장이다.
장수(長水)라는 군 지명을 비롯, 6개 읍면 가운데 5곳의 지명에 물을 의미하는 수(水)와 계(溪), 천(川)이 들어간다. 산은 높고 골이 깊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이름하여 수분령(水分峙).
수분령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으로 흘러 섬진강이 되고 북으로는 장안산과 백운산을 감고 돌아 금강이 되니 바로 여기가 하늘에 있는 냇물이라 해서 천천(天川)이라 부르는 것 같다.
벼루는 물을 넣고 먹을 가는 도구로 갈고 나면 당연히 먹물이 담겨져 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에게는 유독 애착이 가는 벼루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소연명'(小硯銘)이라는 글에서 "벼루야, 나는 너랑 함께 돌아갈 것이니/ 죽는 것도 사는 것도 함께 하자꾸나"라고 고백했다.
이 벼루는 물이 고이는 웅덩이가 비록 한 치(3㎝)에 불과했지만, 이규보는 "너의 작음은 수치로 여길 것이 아니다"라며 "나의 무궁한 생각을 쏟아내게 한다"고 예찬했다.
장수 녹반석(綠斑石)'의 역사와 한국의 벼루
한국의 벼루는 2,0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 벼루 산지는 장수군이 유일하다.
국내의 몇 몇 논문에는 장수의 벼루 원석 ‘녹반석(綠斑石,녹색얼룩무늬돌)’이 기록되어 있다. 초록색 돌 속에 다른 성분의 점이 박혀 있어 ‘녹반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태봉 장인은 작업 초기 장수의 어느 지역에서 채석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곱돌’을 가공하는 석장에서 지역민들을 만나 20여년 동안 추척 및 연구 끝에 2015년 ‘장수군 싸리재’의 높은 골짜기에서 ‘녹반석(綠斑石)’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헌에 이 돌은 조선 후기부터 석등(石燈)과 동물 형상 등의 공예품과 함께 벼루로 만들어 졌다고 전해진다.
오래 전, 장수에서는 ‘녹반석’이라는 돌로 벼루를 만들었다. 초록색 돌 속에 다른 성분의 점이 박혀 있어 ‘녹반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담금질을 마친 쇠라면 자귀(짜구)로도 가공이 가능할 정도로 비교적 무른 돌이며 점처럼 박힌 다른 돌 성분으로 인해 정밀조각이 어려우나 먹이 잘 갈리고 물이 마르지 않는다. 연마 후에는 검은색 기운을 띠는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일반적인 벼루와는 색과 성질이 다르다.
고태봉은 작업 초기 장수의 어느 지역에서 채석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곱돌’을 가공하는 석장에서 지역민들을 만나 20여년 동안 추척 및 연구 끝에 2015년 ‘장수군 싸리재’의 높은 골짜기에서 ‘녹반석(綠斑石)’을 발견하게 됐다.
문헌에 이 돌은 조선 후기부터 석등(石燈)과 동물형상 등의 공예품과 함께 벼루로 만들어 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벼루장은 정철조를 이은 홍성의 김도산과, 남포의 신경록이 있으며, 지역을 알 수 없는 방효량, 채정묵, 종성의 김영수 등이 있다. 근대 벼루장은 보령 남포의 송병요가 대표적이다. 송병요의 뒤를 이은 김형수, 신철휴, 김갑룡, 노장성과 노두성 형제, 신권우 등이 활동했고, 진천은 김인수가 활동했다.
현대의 벼루장은 각 지역에 분포하는 연석산지에 따라 남포에 이창호, 김진한, 원창재, 이영식, 노재경, 권태만, 조중현 등이 벼루를 제작하고 있다. 단양에 신병식, 신근식과 신명식 삼형제와 신재민(신명식 아들), 진천에 권혁수, 언양에 유길훈, 장수에 고태봉 등의 벼루장이 대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이어가는 장수의 벼루장 고태봉
장수의 녹반석 벼루는 만들었다는 기록과 전하는 말이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이제야 그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벼루를 사용하는 사람이 급격히 감소하고 미래의 가치가 존재할 지조차 잘 모르는 상황에서 묵묵히 이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벼루가 전통예술이며 어쩌면 탁본 예술과 인연이 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디 이 마음이 미래에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장수산 곱돌, 단순한 식기 제품이 아닌 문화재의 재료
공주 무령왕릉 석수(국보 제126호)와 지석(국보 제163호), 완주 갈동 동검동과 거푸집(보물 제2033호)의 재질이 각섬석암 이른 바 '장수산 곱돌'로 분석돼 눈길을 끌고 있다.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가 묻힌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8일 배수로 공사 중 우연한 기회에 발견됐다.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4,687점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이 가운데 12건 17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출토된 유물 중 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정보 외에 왕비의 장례와 합장한 연도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펴낸 '무령왕릉 신(新)보고서'에 따르면 석수와 지석 재질은 화성암의 일종인 각섬석암으로 동일하다.
각섬석암은 공주 일대에는 산지가 없고, 전북 장수에서 많이 나온다고 적시했다. 이른바 '곱돌'이라고 하는 돌이 각섬석암이다.
장수 인근인 남원 아영면에서도 각섬석암이 산출된다.
이 보고서는 공주에서 100㎞ 이상 떨어진 장수나 남원에서 돌을 조달해 석수와 지석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완주 갈동 동검동과 거푸집(보물 제2033호)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와 주조 기술을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갈동 유적은 초기철기시대의 분묘 유적으로 2003년과 2007년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나와 한반도 서북지역의 철기문화가 한강 이남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은 갈동 1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거푸집 2점이다.
한 점은 세형동검의 거푸집만 새겨져 있고, 다른 한 점은 동검과 동과(銅戈)가 양면에 새겨져 있다.
출토 고분의 편년 및 거푸집에 새겨진 세형동검의 형식 등으로 볼 때, 이 유물은 기원전 2세기경에 실제로 사용된 후 무덤에 매납된 청동기 제작용 거푸집에 해당한다.
이 거푸집의 석질은 각섬석암으로 분석됐으며, 장수군 일대에서 산출된 석재로 추정됐다.
'문화재 38호(2005)'의 '완주 갈동유적 출토 청동기 용범의 재질 특성 및 산지 해석(이찬희, 김지영, 한수영)'은 갈동유적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용범 1조를 대상으로 재질 특성 분석과 원료의 산지를 해석했다.
이 용범과 동일한 재료의 산지를 추정하기 위해 유적 주변의 광역적인 암석 분포를 조사한 결과, 직선거리로부터 약 50km 떨어진 장수군 장수읍 대성리, 식천리 및 번암면 교동리, 남원시 아영면 일대리에서 용범과 동일한 각섬석암 또는 반려질암의 산출지를 확인 두 암석 간에 재질의 유사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각섬석암은 재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가공성이 뛰어나다.
즉, 활자나 미세한 문양을 조각하기에 다른 암석보다 용이하고 금속광물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열전도율이 역시 뛰어나다.
바로 이같은 장점 때문에 용범 제작의 원료로 선택되었을 터이다.
이 지역의 각섬석암은 현재까지도 채석되어 석제 식기제품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주변에는 이들의 가공공장이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거푸집의 석재는 장수군 일대보다는 활석광산이 소재하고 있는 완주지역에서 자체 조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동의보감>에서 곱돌은 ‘활석’이라고도 불리며, 방광에 염증이 있거나 몸 안에 열 기운이 있을 때 열을 식혀 주면서 노폐물을 배출시키는 성질이 있다.
또, 일반 돌과 달리 열을 받아도 깨지지 않는 것이 특징인 곱돌은 미네랄 성분과 원적외선을 방출해 음식물의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 시키며, 보온성이 뛰어나 그릇으로도 안성맞춤이다.
과거 전북 장수에 귀양을 간 전 금부도사 최재민이 곱돌을 숙종에게 진상했고, 곱돌 판에 구운 고기 맛에 감탄한 숙종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은 6세기에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백제 특유의 불상이다.
신라의 중심 월성과 황룡사지 등지에서도 곱돌 조각 등이 자주 출토된다. 조선조에 실록을 보면 돌솥 요리가 왕의 수랏상에 올랐으며, 곱돌은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한 기록이 보일 정도로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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