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삼킨 거위 이야기와 '윤회' 생각나세요.
1982년 '국민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를 꺼내보았습니다. 누렇게 빛 바랜 도덕 교과서 속에서 20여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감동과 추억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국어, 산수, 자연, 실과, 미술, 음악, 체육 등 여러 교과서 중에 유독 도덕책에 손이 많이 갔었습니다.
구슬을 훔쳐간 것은 바로 거위. "거위가 구슬을 집어 먹었소이다"라고 외치면 금세 오해를 풀 수 있지만 윤회는 거위를 살리기 위해 묘책을 내놓습니다. 하찮은 동물이라도 목숨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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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도 완전하고 오리도 구함_멱주완아(覓珠完鵝)_
조선 세종 때 윤회(尹淮)라는 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윤회가 길을 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일이다. 모처럼 가는 고향길에 날이 저물어 객사에 투숙하게 되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손님이 많아 주인이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려니 주인집 아이가 구슬을 한 개 가지고 나와 놀다가 마당에 떨어뜨렸다. 곁에 있던 오리란 놈이 그 구슬을 얼른 삼켜버렸다. 아이는 제대로 부모에게 말도 못 했다. 조금 있으니 주인집 사람이 쫓아 나와 윤회를 붙잡고 구슬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윤회는 기가 막혔으나 아무 말 못 하고 오라에 묶여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관가에 데리고 간단다. 윤회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저 오리를 내 옆에 같이 묶어 두시오."
하고 주인에게 청했다.
아침이 되자 오리가 똥을 누니 구슬이 그 속에 섞여 나왔다. 주인은 백배 사죄하고 왜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한다.
이에 윤회가 말했다.
"내가 어제 말을 했더라면 아마 당신은 저 오리를 죽여 확인을 했을 것이오."
동물 사랑도 이쯤은 돼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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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淮(윤회) 少時(소시)에 有鄕里之行
(유향리지행)하여 暮投逆旅(모투역려)
하니 主人(주인)이 不許止宿(불허지숙)
하여 坐於庭畔(좌어정반)이라.
윤회가 소싯적에 고향 시골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여관에 투숙하려니 주인
이 잘 것을 허락하지 않는지라 뜰 가에
앉아 있었다.
主人兒(주인아)가 持大眞珠出來(지
대진주출래)다가 落於庭中(낙어정중)
하니 傍有白鵝(방유백아)가 卽呑之
(즉탄지)라.
주인의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나오
다가 뜰 가운데 떨어뜨리니 곁에 흰
거위가 있다가 즉시 삼켜 버렸다.
俄而(아이), 主人索珠(주인색주)다가
不得(부득)하니 疑公竊取(의공절취)
하여 縛之(박지)하고 朝將告官(조장
고관)이라.
잠시 후 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찾을
수 없자 공(윤회)이 훔쳐 가졌다고 의
심하여 포박하고는 아침이 되면 장차
관가에 아뢰려고 하였다.
公不與辨(공불여변)하고 只云(지운),
“彼鵝亦繫吾傍(피아역계오방)”하라.
將朝(장조)에 珠從鵝後出(주종아후출)
이라. 主人慚謝曰(주인참사왈)
“昨何不言(작하불언)고?” 公曰(공왈)
“昨日言之(작일언지)면 則主必剖鵝
覓珠(칙주필부아멱주)리라 . 故(고)로
忍辱而待(인욕이대)라”
공(윤회)은 (주인과) 더불어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저 거위
역시 내 곁에 매 두시오” 하였다.
장차 아침이 되려는데 진주가 거위
항문으로 나왔다. 주인이 부끄러워
사과하여 말하기를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하니 공(윤회)이 말하기를
“에제 말했다면 주인은 반드시 거위를
갈라 진주를 찾았을 것이오. 때문에
치욕을 참고 기다렸던 것이오.”
하였다.
尹淮 (1380~1436)
조선전기의 학자이며 名臣(명신)
호는 淸香堂(청향당)
술을 좋아하여 세종이 석 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하자 연회 때마다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다는 일화가
전한다. 윤회는 고창 무장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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覓珠完鵝
尹淮는 茂松人이니 字는 淸卿 이요
號는 淸香堂 이라 少時에 作鄕行 할제
暮投逆旅 하니 主人이 不許宿 이어늘 坐於庭 이러니
主人兒가 持大眞珠出來落於庭中 하니 傍有白鵝하여 卽呑之라
俄而主人索珠不得 하고 疑公竊取 하여 縛之 하고 朝將告官 할새
公不與辨 하고 只云鵝亦繫吾傍 하라하더니 翌朝에 珠從鵝後出이어늘
主人이 慙謝曰 昨何不言 고하니 公曰若言則主人이
必剖鵝覓珠라 故 로 忍辱而待라 하다.
覓珠完鵝 멱주완아 - 구슬을 찾고 거위도 온전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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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堉)의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
조선(朝鮮) 세종때 윤회(尹淮:1380~1436)라는 분이 있었다.
본관은 무송(茂松, 지금의 고창 무장현),자는 청경(淸卿),호는 청향당(淸香堂), 관직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했고, 문도(文度)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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