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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최명표 연구서 ‘전북작가열전’

최명표 연구서 ‘전북작가열전’


<전북작가열전> (신아출판사·2018)은 절절한 연구서다.
많은 연구 서적이 어렵고 딱딱한 단어로 독자의 눈을 침침하게 만들고, 무분별하게 사료만 나열하거나 서술어를 반복해 독자를 게으르게 하지만, 이 책은 연구를 시작한 사연과 책에 담긴 이들의 곡절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전북작가열전> 은 나라의 기력이 쇠진해질 때, 배운 자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를 일러준다. 문학사에 명확하게 남은 기록마저 왜곡하고 위상을 낮게 평가하며 기존의 연구 성과만 반복하는 나태한 학자들을 질타하고, 전북의 ‘땅심’을 받고 자란 시인과 작가들이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새겨준다.

책에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취지문을 쓴 김제 출신 이기(1848∼1909)부터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인 박영근(1958∼2006)까지 전북과 연관된 작고 문학인 54명의 삶과 작품이 담겨 있다. 이 문학인들을 앞세워 이들과 멀리 가까이에서 전북 문단을 튼실하게 다진 문학인들을 꺼내 놓았다. 자료의 한계와 척박한 자료 밭을 일구는 연구자의 고됨으로 작가마다 지면은 울퉁불퉁하지만, 한두 줄로 툭 치고 들어간 이름마저 귀하다.

책에 담긴 문학인은 이병기·신석정·김환태·백양촌·박동화·박봉우와 같이 문학관과 문학비로 남은 문인도 있지만, 대부분 문단 활동과 전북과의 관계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존재마저 잊힌 시인과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적은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23년 한국 최초 필화사건의 주인공인 부안 출신 신일용(1894∼1950)과 해방 후 첫 필화사건의 당사자인 완주 출신 유진오(1922∼1950 추정), 신춘문예 역사에서 시 부문 첫 수상자(동아일보·1925)인 전주 출신 김창술(1903∼1950 추정),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에스페란토 시집 <자유시인> (1938)을 낸 익산 출신 정사섭(1910∼1944), 한국 최초의 여성 문학평론가로 여성해방문학을 앞서 주장한 전주 출신 임순득(1927∼2003), 호남평야에 담긴 역사의 비극을 시로 읊은 김제 출신 장영창(1920∼1995) 등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님도 일러준다. 삶을 수놓은 갖가지 풍경에는 그가 속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사회가 담겨 있다.

남원 출신 윤규섭(북한 이름 윤세평·1909∼?)이 고전문학 주해(注解)로 북한 문학연구의 초석을 다진 것은 해방 전부터 전주의 고서점에서 완판본을 대거 입수한 후 월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포가 고향인 곽복산(1911∼1971)을 한국 신문학(新聞學)의 선구자로 이끈 배경은 5세부터 외가인 김제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16세에 동아일보 김제지국 총무로 일하며 언론사와 인연이 시작됐고, 동시와 동화를 발표한 소년문사였다. 그의 동화 ‘새파란 안경’(1928)은 물욕에 눈먼 부자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것을 깨닫는 내용으로,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전주 출신 김완동(1905∼1963)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1930)에는 민의를 수용하지 않는 임금은 축출해도 무방하다는 혁명관이 내재돼 있다. 1926년 공립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사건을 겪으며 자연스레 쌓인 신념일 것이다. 전주 출신 정우상(1911∼1950 추정)은 13세에 매일신보 신춘현상공모 동화로 입선하고, 15세에 <조선문단> 에 시로 당선된 천재작가였다. 그의 동화에도 임금이 갖춰야 할 으뜸은 백성의 소리를 고루 들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라는 이상이 있다. 1929년 전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389건 중 전북에서 일어난 것이 314건이라는 기록은 이 작품들의 가치를 더 확고하게 한다.
사람은 가고, 작품은 잊혀도, 사람과 작품이 선사한 감동은 정신으로 남는다. 반듯하고 당당한 이들의 삶은 후세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결결이 새겨 놓은 위로이자 가슴 찬 자랑이다.

저자인 문학평론가 최명표 씨는 오랜 세월 전북 문학사의 변두리와 빈 곳, 잘못된 곳을 찾아 메우고 수정하는 고된 여정을 자처하며 새로운 문단사를 쓰고 있다. ‘문학은 작품으로 판가름 난다고 우기는 축이 있으나, 작가의 신념이나 몸부림은 작품을 낳은 모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저자의 강단 있는 주장은 독자를 더 흥분시킨다./최기우(전북일보 기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