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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 임실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 임실

이종근 새전북신문 편집부국장(한국문화 스토리 작가)

행복한 시간들이 치즈처럼 고소하게 흘러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국수 가락이 당신의 지난 삶처럼 정갈합니다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이 임실인가요, 한자로 '열매의 고장'이 임실(任實)인가요.

전북에서도 가장 내륙에 위치한 곳, 임실은 순우리말로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입니다.

오랜 기억 속의 임은 왠지 소박하고 고요한 마을에 살 것만 같습니다. 이름처럼, 임실은 바로 그런 동네입니다.

시내도 산 아랫마을도 모두가 사이좋게, 비슷한 속도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마냥 심심하기만 한 건 또 아닙니다. 걷다보면 작은 동네마다 오직 임실만이 가진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수록 더 마음이 가는 동네.

강물이 쉬어가는 곳, 옥정호 붕어섬
이른 아침, 국사봉 전망대에 오릅니다.

일망무제(一望無際). 끝없이 멀고 먼 운무가 산 골골마다 내려앉습니다. 일교차가 큰 이맘 때, 운무가 발달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입니다.

부지런히 산을 오른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임실의 선물입니다.

날이 밝아오자 운무 사이로 섬진강 옥빛 물길이 드러납니다.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달려온 물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쉼 없이 흐르던 물은 잠시 옥정호에서 머뭅니다. 숨고르기를 마친 강물은 곧 동진강 유역으로 향할 것입니다. 호남평야의 젖줄이 되기 위해, 물은 이곳 옥정호에서 진로를 바꿉니다.

조상들이 지어놓은 땅에 대한 지명을 분석하다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예언성 땅 이름은 경탄할 정도로 딱딱 맞아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름의 우합(偶合)인 셈입니다.

오래 전부터 불러오고 있는 땅이름이 후세에 와서 이상하게도 그 땅이름의 뜻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써 땅이름에서 우리 선인들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고, 다시 한번 땅이름의 신비를 실감하게 됩니다.

임실군 강진면에도 옥정리(玉井里)가 있는데, 이 마을은 '옥처럼 맑고 찬 샘'의 뜻을 지녔습니다. 조선 중기에 어느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멀지 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적중한 곳입니다. 

1965년 이곳에 농업용수 공급과 전력생산을 위한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수위를 높였고 운암면의 가옥 300여 호와 경지면적 70%가 수몰돼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이 바로 '옥정호'입니다.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 마을 뒤(현 도로 중앙)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담리와 문방리간 도로를 개설하면서 없어졌습니다. 
본래의 옥정 샘은 옥같이 물이 맑고 맛이 좋아 옛 사람들이 옥정이라 이름지어 부르게 됐습니다. 마을 전체가 대대로 이를 사용, 이로 인해 마을이름도 옥정이라 했습니다. 

운암댐이 1965년 12월 준공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장에서 운암댐은 구댐이 있어 부르던 이름이기에 다른 이름을 찾아 보라는 지시에 옥정호(湖) 옥정댐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운암댐, 섬진강댐, 옥정댐 등 각자 편리한 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정용어상으로는 옥정호(댐)으로 표기해 부르고 있으므로 비록 샘은 없어졌지만 옥정샘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옥정호의 중앙엔 붕어섬이 있습니다.

붕어섬은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호수 깊이 잠겨있습니다. 운무가 걷히며 금붕어의 형상이 점점 더 또렷이 드러납니다. 올해 다음 달 이 섬을 갈 수 있는 다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옥정호에 강물이 쉬다 가듯, 붕어섬은  얼마 전, 좋은 휴식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1,000만 관광시대’로 목표로 전북 임실군이 야심차게 사업을 추진·완료했던 옥정호 출렁다리와 붕어섬 생태공원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임실군의 목표 달성이 한층 더 가까워 졌다는 평가입니다.

임실군은 지난해 10월 22일 첫선을 보인 옥정호 출렁다리 및 붕어섬 생태공원의 누적 방문객이 80만명을 넘을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10월 임시개장 기간 45만여명이 방문한 데 이어 올해 3월1일 유료화로 전환해 정식개장한 이후에도 35만여명이 방문했습니다.

특히 지난 10월에는 가을을 맞아 붕어섬 생태공원에 조성된 국화꽃 경관과 코스모스, 구절초 등 가을꽃들이 형형색색 장관을 이루면서 관광객이 대폭 증가했습니다.

같은 시기 열린 치즈축제와 치즈테마파크 국화꽃 경관과 맞물려 옥정호 출렁다리와 붕어섬생태공원까지 이어진 연계관광이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또 출렁다리 아래까지 가득찬 물에 꽃들이 만개한 수려한 경관까지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의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인산인해를 이뤘스비다.

옥정호 출렁다리와 붕어섬 생태공원이 이처럼 인기를 끈 데는 다녀간 관광객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한 전국적 확산력이 주효했고 편의를 위해 제공된 셔틀버스의 운행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방문객이 급증에 따라 이들이 임실군 각지로 유입되면서 지역경제도 모처럼 숨통이 트였습니다.

음식점과 카페, 치즈판매장 등의 매출이 올랐고 관내 음식점과 숙박업소 등의 매출도 상승곡선을 그렸습니다.

군은 앞으로 옥정호 일원에 한우 맛집, 카페, 로컬푸드 직매장 등 먹거리 시설을 보강하는 한편 케이블카와 집라인, 모노레일 등 체험 관광시설도 갖추는 등 종합적인 관광 인프라를 보강해 나갈 계획입니다.

금성리 치즈마을을 지나면 근처엔 임실 치즈테마파크가 있습니다.

치즈숙성실, 체험관 등이 있는 이곳은 임실 치즈의 역사를 담아낸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지정환 신부의 동상을 봅니다. 그는 1958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을 찾은 벨기에 출신 신부입니다.

귀족 출신이던 그는 1964년 임실의 척박한 농토 앞에서 무기력한 주민들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산양 2마리를 들여와 우유를 짰고, 그 우유를 오래 보존시키기 위해 1966년 이곳 성가리에 치즈공장을 세웠습니다.

이제 와 보니 말은 쉽지만 당시 한국엔 ‘치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 입장에선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치즈를 만들겠다는 이방인이 달가웠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디디에 세르테벤스는 ‘지정환 신부’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평생토록 이곳을 지켰습니다.

겨우 산양을 키워내고, 겨우 치즈를 만들어내고, 겨우 그 치즈를 한 호텔에 팔았습니다. 모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정환 신부는 포기하지 않아 결국 임실이라는 한 작은 동네를 치즈의 고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십 년 후, 임실은 이 동네만이 가진 고유의 이야기들을 큰 테마공원으로 꾸몄습니다. 바로 이곳, 임실치즈테마파크입니다.

모르고 갔다면 그저 잘 꾸며진 공원 정도겠지만 지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달리 보입니다. 한 사람의 노력이 한 마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임실 치즈가 있는 한, 고 지정환 신부의 정신은 이곳에 영원히 살아 빛납니다.

치즈테마파크 시계탑 아래, 작은 빵집 하나가 있습니다.

임실에서도 보기 드문, 프랑스 가정식을 파는 식당입니다.

 들어가니 임실 치즈를 이용한 음식은 물론 직접 재배한 밀로 빵도 만든다는데. 아이 둘을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어 귀농했다는, 젊은 부부의 고향은 둘 다 서울입니다.

농촌 경험이 없으면 좀처럼 힘든 타향살이를 올해로 14년 째 하는 중이랍니다. 서울의 한 IT 기업을 다니며 만난 부부의 첫 로망은 지리산자락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임실이 그렇게나 살기 좋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성수산자락 아래, 집을 지었습니다. 계획한 곳은 아니었지만 소문 그 이상으로 임실은 참 따뜻한 곳입니다.

모든 마을이 산 속에 오목하게 들어 앉아있는 느낌. 그래서 이제 부부는,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서울보다 임실이 더 고향 같습니다.

요즘 임실 치즈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부부는 프랑스 치즈 요리에 삼매경. 매일 작은 주방에서 복닥복닥 옛날 빵과 가정식을 만듭니다. 인생에서 다시없을 행복한 순간. 부부의 시간들이 치즈처럼, 고소하게 흘러갑니다.

읍내를 지나다가 한 독특한 집 하나를 봅니다.

2층 나무 사이, 열린 지붕 아래 국수 가락을 말리는 곳입니다.
들어가 보니 오래된 기계 앞 한 남자가 국수를 뽑고 있습니다. 

50여년 간 이 집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한 부부는 매일 1층 집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와 국수 뽑습니다. 볕 아래에서 실내로, 다시 또 다른 공간으로. 일주일 간 4번을 옮겨가며 말리는 태양건조국수는 번듯한 홍보 하나 없이도 알음알음 단골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직원은 오직 부부 뿐. 여든을 바라보는 부부의 몸은 조금씩 주저앉고 있습니다. 국수를 건 나무 대. 수없이 오가다 무너진 나무 계단처럼. 그래도 국수가 장수와 복을 의미해서일까요. 

50년 국수 공장 하며 부부는 자랑할 일이 많습니다. 잘 키운 자식 셋도, 유명 야구선수 사위도, 최근엔 서울대 의대에 붙은 손주까지. 열심히 산만큼 복도 많은 부부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여든이 넘은 지금도 부부는 국수 공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쉼 없이 복이 들어오라고. 묵묵히도 국수를 뽑아냅니다.

볕에 내놓은 태양건조 국수에 작은 태양 빛이 걸립니다. 빛을 머금고 반사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국수 가락이 꼭 부부의 지난 삶처럼 정갈합니다.

3개도 12개의 시군을 지나는 육백 리 섬진강은 어머니입니다.

수 많은 생명들이 섬진강 주위로 나고 자랍니다. 봄볕 따라 바위 틈 위로 올라오는 다슬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섬진강 상류를 지나다가 강가에서 다슬기 잡는 주민을 만납니다.

임실의 토박이들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따라 이 섬진강변에서 다슬기를 잡았습니다.

당시엔 남녀노소 누구나 다슬기 채취가 가능했습니다. 다슬기를 잡는 법은 다양합니다. 

호미나 손으로 얕은 강물을 파는 것부터, 작은 배에 도구를 묶고 강바닥을 긁어 잡는 방식까지. 보통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물속에 들어가 ‘거랭이’로 다슬기를 잡는 전통 방식을 선호합니다. 어깨에 건 도구를 한 번씩 털어낼 때마다 한 바구니, 다슬기가 쏟아집니다.

한평생 이 동네 주민들은 다슬기 때문에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도 다슬기는 섬진강변 사람들에게 참 각별한 존재, 요긴한 식재료입니다. 어머니 섬진강이 주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5월, 홍매화가 흐드러진 임실 길을 걷습니다.

옥정호 주위를 지나다가 낯선 배 한 척, 막 출발하려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납니다. 고향 집으로 향한다는 그. 사실 어르신의 고향은 너른 옥정호, 물 아래에 있습니다. 1961년 섬진강 댐 공사로 18개의 마을, 2만여 명 가까운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임실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상을 약속 받고 부안, 안산 등 간척지로 이주했습니다.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폐 염전과 갈대밭이 무성한 간척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사람이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옥정호 근처로 돌아왔습니다.

수몰민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 고향이 그리워질 때 이곳을 찾습니다. 11살 겨울 무렵, 고향을 떠났던 기억이 생생한 최 어르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의 흔적은 나무가 자라고 땔감을 주웠을 산꼭대기만 남아있습니다. 바로 잠기지 않은, 그 산꼭대기가 지금의 붕어섬입니다. 아무 것도 없지만 섬이 된 산에 올라 11살 그때로 돌아갑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