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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홀기’ 여러 곳에 ‘몽금척(진안 금척무)’ 소개 눈길

 

 

몽금척(진안 금척무)’ 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잔치에서 선보인 기록들이 여러 곳에 선보여 눈길을 끈다. 진찬정재홀기(進饌呈才笏記), 정재홀기(呈才笏記) ·무법(舞法),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 등에 몽금척이 소개됐다. 이처럼 여러 자료에서 한꺼번에 몽금척이 소개된 것은 처음이다.

 

국립국악원이 궁중 잔치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홀기'를 수록한 '한국음악학자료총서' 58집을 펴냈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홀기'류를 영인·해제해 수록한 책이다. '홀기'란 집회, 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 및 절차를 미리 적어 낭독하게 하는 의례 문서다. 궁중에서 행해진 진연과 진찬 등 각종 연회에서 공연되는 정재를 연습할 때 사용한 춤사위의 순서, 반주음악과 가사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궁중의궤와 함께 조선시대 의례와 예술사 연구에 중요하게 활용된다. 지금까지 각 소장기관 홈페이지에 일부만 공개돼 있어 홀기의 전체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이번 한국음악학자료총서에 고화질로 새롭게 촬영한 홀기 전체를 담아냈다. 편집자

 

이 가운데 진찬정재홀기(進饌呈才笏記), 정재홀기(呈才笏記) ·무법(舞法),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 등에 몽금척이 소개된다.

 

금척무(金尺舞)’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으로부터 조선 삼한을 다스리라는 계시와 함께 받았다는 금척(金尺)’을 주제로 한 공연이다.

금척무(金尺舞)’는 궁중정재(대궐잔치의 가무).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금(태조)이 등극하기 이전에 꿈에 신인(神人)금으로 된자’(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을 사람은 경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정도전이 1393(태조 2) 7월에 몽금척무의 가사와 악보를 지어 올리므로 이후 국가의례의 3대주악으로 제정되어 조선왕조 500년간 나라의 경사 때마다 시행되어 온 것이다.

궁중정재인 이 몽금척무가 진안지방에서 재현 공연되어 오는 까닭은 조선환여승람등의 기록에 태조가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장소가 진안 마이산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이산에 들른 이태조는 산의 모양이 꿈 속에서 본 금척과 너무도 흡사, 이에 그 산이름을 고쳐 이르기를 속금산(束金山)’이라 명했다고 한다. 여기에 유래하여 마이산이 소재한 진안지방에서 몽금척무(夢金尺舞)를 발굴 복원됐다.

'한국음악학자료총서' 58집 진찬정재홀기(進饌呈才笏記), 정재홀기(呈才笏記) ·무법(舞法),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 등에 몽금척이 소개된다.

 

진찬정재홀기(進饌呈才笏記)

 

진찬정재홀기(進饌呈才笏記)’의 맨 앞부문에 몽금척(夢金尺)이 나온다.

이 책에 수록된 정재는 몽금척을 비롯, 선유락, 춘앵전, 처용무 등 15종에 달한다. 차비여령(女伶差備)은 내부와 외부로 나뉜다. 내부는 의녀, 상방(尙方), 혜민서에서 차출됐고, 외부는 평양, 황주, 성천, 선천, 영변, 안악, 송화, 서흥, 재령, 경주, 안동, 순창 등에서 많은 인원이 진찬례를 위해 선상기(選上妓)로 차출됐다.

 

정재홀기(呈才笏記) ·무법(舞法)

 

정재홀기(呈才笏記)’의 맨 앞에 몽금척이 소개된다.

진찬의궤가 몽금척 등 13종목, ‘정재홀기(고궁 3786)’13종목, ‘진찬정채홀기(고조 29)’15종목으로 다르지만 역시 맨 앞에 몽금척이 나온다. ‘무법(舞法,고궁2360)’엔 초무에 이어 몽금척이 나온다. 모두 20종목이 소개된다.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와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는 봉래의, 몽금척, 헌선도, 헌천화 등 27종이,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은 봉래의 몽금척 등 16종의 정재가 각각 소개됐다. ‘정재무도홀기 언해본(呈才舞圖笏記 諺解本)’엔 몽금척을 몽금텩으로 기술했다.

 

관련 기사:몽금척(夢金尺)

 

몽금척(夢金尺)은 금척(金尺), 몽금척지기(夢金尺之伎), 개몽금척지기(改夢金尺之伎) 등으로 부른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당악정재의 하나로, 이성계가 꿈에 하늘의 명을 상징하는 금자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의 악장을 부르며 추는 춤이다.

몽금척은 조선 전기의 당악정재이다. 금척을 든 무용수가 등장하여 여러 무용수와 함께 춤춘다. 금척(金尺)이란 금으로 만든 자로서 하늘의 명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금척을 든 무용수가 등장하여 여러 무용수와 함께 춤춘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은 부르는 악장을 노래하는데, 악장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가 꿈에 금척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금척을 받은 것은 태조가 하늘의 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몽금척의 유래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서 시작되었다. ‘태조실록’ 1392717일의 기사에 따르면,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경복흥(慶復興, ?~1380)은 청렴하나 이미 늙었고, 최영(崔瑩, 1316~1388)은 강직하나 고지식하니, 금척을 가지고 나라를 바르게 할 사람은 바로 이성계뿐이라 하면서 금척을 주었다. ‘금척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는 만물의 측량과 조절이라는 역할을 하기에,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했다. 금척을 받는 태조의 꿈이 공연예술로 탄생한 것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개국에 힘을 쏟았던 정도전을 통해서였다. 1393(태조 3) 726일에 정도전은 악장 금척을 태조에게 지어 올렸고, 세 달 뒤인 1027일에 몽금척이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1402(태종 2)에 몽금척 정재를 국왕과 종친들의 잔치에 쓰도록 정했다. 그러나 태종은 몽금척이 태조 이성계의 실제 덕을 묘사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과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예언을 담은 점을 들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하는 연회의 첫 번째 곡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악부(樂府)에만 기록하도록 했다. 이후 1432(세종 14)의 회례연에서 태종대의 몽금척을 수정하여 개몽금척지기(改夢金尺之伎)를 공연했다. 순조대 ‘(기축)진찬의궤에도 태조께서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곳 또는 기간)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이 금척을 주었는데, 세종조에 이를 본떠서 춤 을 만들었다라고 하여 세종대에 몽금척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몽금척지기가 등장한 때를 춤을 만든 시기로 본 듯하다. 성종대 악학궤범의 향악정재 분류에서는 금척이라고 기록했다. 영조 병술년(丙戌年, 1766) 진연 때에는 영조가 친히 몽금척 정재의 유황사(維皇詞)’성인사(聖人詞)’를 지어, 내연에서 악장으로 썼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무동과 여령이 몽금척을 춤추었다가, 20세기 초반에 단절을 겪었다. 현대에 와서 국립국악원의 주도로 복원된 몽금척 정재가 무대화되었다.

몽금척은 꿈에 신인(神人)이 태조 이성계에게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의 춤이다.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금척이라는 상징물에 담았다. 두 명이 죽간자(竹竿子)를 들고, 한 명이 족자(簇子)를 들고 앞에 서고, 한 명이 금척을 들고, 한명이 황개(黃蓋)를 들고 뒤에 선다. 열두 명이 좌우로 나누어 두 줄을 만들고, 나아가고 물러서거나 돌면서 춤춘다.

도입부에서 악학궤범금척의 초입배열도처럼 죽간자ㆍ족자ㆍ황개를 중심으로 하여 무용수가 양편에 세로로 늘어서 있다가, 죽간자 두 명이 진구호를 한 뒤에 무용수 열두 명이 두명씩 이동, 작대도의 형태처럼 가로로 늘어선다. 진행부에서 금척을 든 자의 치어가 이어지고 열두 명의 좌우대는 금척사1장을 노래하면서 손을 여미고 족도라는 발디딤 동작을 한다./이종근기자. 도움말=국립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