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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3> 전주출신 화가 석계 최명룡, 신선을 동경하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3> 전주출신 화가 석계 최명룡, 신선을 동경하다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1567~1621년)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는 그의 대표작으로,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화풍을 따르고 있다.

깊은 산 속 커다란 바위 아래 네 명의 선인이 학을 둘러싸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다. 

네 사람 중 퉁소를 지닌 인물은 한상자, 박을 치는 인물은 조국구일 가능성이 있다. 오래 살아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함께 어우러진 선인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흥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흑백 대비가 심한 절벽 표현, 거칠게 그린 나뭇가지와 나뭇잎 처리, 인물을 강조한 구성, 굵고 진하게 표현한 옷 윤곽선 등은 당시 유행하던 절파 화풍의 영향이다.

오른쪽 위에 적힌 ‘석계(石溪)’는  최명룡의 호다. 그는 역학, 음양학, 불교학 등에 능통했다.


仙자는 ‘신선’(a mountain wizard)이란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뫼 산’(山)과 ‘사람 인’(亻)을 합쳐 놓은 것이다. 

仙(선)이라는 글자는 人(사람 인) 변에 山(외 산) 자를 합해 만든 것이다. 人이라는 글자는 '사람' 이 다리를 내딛고 모로 서 있는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山이라는 글자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 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仙이라는 글자는 산 (山)에 있는 사람 (人)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산에 살면 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앞에서 본 영어 단어도 그렇듯이, 신선과 산은 불가분의 관계다.

최명룡의 자는 여윤(汝允)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정묘년(1567, 명종22) 전주에서 태어났다. 완산인(完山人)으로,  최위(崔渭)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매일매일 옛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었다. 1578년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는데 상장(喪葬)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큰 어른처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상을 마친 후 최명룡은 우죽(友竹) 이정기(李廷麒)를 찾아 그의 문인이 됐다. 이정기는 최명룡의 총명함에 감복해 그를 지극히 아끼며 “오늘도 명룡은 나를 가르치러 왔다”라고 했다 한다. 

1586년 어머니 상을 당한 후로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부안 변산(邊山) 등운사(登雲寺,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던 절)로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사서(四書)와 '염락제가(濂洛諸 염계 사람 주돈이, 낙양 사람 정호와 정이를 비롯한 송나라 성리학자들을 가리킴)'의 책을 섭렵했다.

 또한 음양(陰陽), 역학(易學), 천문(天文), 지리, 방기(方技), 도교, 불교, 산학(算學) 등 다방면에 걸쳐 공부했으며, 양명학(陽明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바로 절에서 내려와 의주로 떠나는 선조를 호위하기 위해 상경했다. 도중에 경기도 파주에 이르러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았다. 성혼은 최명룡과 대화를 나눈 뒤 “마침내 우리의 도가 의지할 곳이 생겼다”라며 감탄했다. 

그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전북 금마(金馬)현감으로 부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김장생은 최명룡과의 만남을 매우 기뻐했다. 
이후 김장생과 최명룡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됐다. 최명룡은 김장생의 글이라면 모두 섭렵했다. 그리하여 당시 최명룡의 박식함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최명룡은 1620년(광해군 12)에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명룡의 소식을 들은 김장생은 몹시 슬퍼하며 공자가 안자(顔子)를 잃었을 때의 슬픔에 견주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영전에 올렸으며, 나중에는 묘갈명(墓碣銘)까지 지어 주었다. 
 
그는 전주출신의 화가였다. 당시 김준엽(金峻葉), 김동준(金東準)과 함께 삼현(三賢)으로 칭송받던 작품으로 선인무악도,산수도, 월야주옥도, 석점이 전해오고 있다.

최명룡은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그림에도 소질이 뛰어났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가 그의 작품이며, 최명룡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선객도(仙客圖)'도 있다.

 저서로 '석계집(石溪集)'이 있으며, 전주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됐다. 1650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명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다. 1663년에 김동준(金東準)을, 그 뒤 김동기(金東起)·정상룡(鄭祥龍)·이기경(李基敬)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했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동재(東齋)·서재(西齋)·강당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