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규 목포대학교 전 총장(사학과 명예교수)은 한국학호남학진흥원의 '풍경의 기억' 쉰번째 이야기를 통해 '동국통감'이 나올 즈음에 ‘호남’ 정서의 원형도 형성됐다고 했다.
당초 '동국통감'의 편찬은 1458년에 세조가 “우리나라[본국]의 서기(書記)가 탈락되어 완전하지 못하므로,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쓰고자 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취하여 해를 따라[逐年] 그 아래에 모아 써 넣게” 지시하면서 시작했다. 1485년에 새로 편찬한 '동국통감'은 모두 382편의 사론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았다.나머지 204편은 찬자 자신들이 새로 써넣은 것들이었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고 전해진다.
‘전라도’라는 명칭은 고려 때인 1018년(현종 9)에 처음 나타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팔도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행정구역의 명칭일 뿐이다. 그보다 정체성 등의 단어에 걸맞게 정서적으로 구분되는 칭호는 ‘호남’이란 별칭이다.
‘호남’이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나? '고려사'에는 그런 말이 아예 없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실록'에 처음으로 한 번 나온다. 즉 1447년(세종 29) 집현전 교리 하위지(河緯地)의 상서(上書)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 후 '세조실록'에 2건, '성종실록'에 4건 등 아주 드물게 나온다. 성종대 기사 중 호남 관련,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사신의 논평에 영광군수 기찬(奇禶), 익산군수 이계통(李季通)과 김제군수 최반(崔潘) 등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 대간(臺諫)을 역임하였으나, 하루아침에 외리(外吏)가 되고서는 염치없이 탐학을 자행하였다고 비난하며, “사람들이 이들을 가리켜 호남 삼걸(湖南三傑)이라 하였고, 또 기찬은 삼절 중의 으뜸이었다”라고 기술했다.
이는 '성종실록' 181권, 성종 16년(1485) 7월 6일 3번째 기사다.
여기에서 ‘호남 삼걸’이라 하여 ‘전라도’ 대신 ‘호남’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때 호남이 지역의 별칭으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16세기 '중종실록'(재위 1506∼1544)부터는 ‘호남’이란 호칭이 흔해진다.
“남방의 삼도(三道)는 천부(天府)의 땅인데 호남 일대는 더욱 부유한 곳입니다”라거나 “호남과 영남은 국가의 부고(府庫)인데”라는 표현도 나온다. 또 “영남과 호남 두 지방은 생산이 풍부한 지방으로 인물이 살기 좋은 땅이라서 실로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호남에는 황충이 날아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고, 영남에는 풍수의 재해로 가옥이 떠내려가고 인명이 손실되었습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호남이란 호칭은 지역의 정체성을 담는 별칭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영남’이란 말도 ‘호남’과 병칭으로 사용될 만큼 익숙하게 자리잡았다.
세조 이후 성종(재위 1469∼1494), 중종을 거치면서 등장하는 ‘호남’이란 별칭은 이제 전라도가 단지 행정구역상 구분되는 곳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구분되는 지역성을 갖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오늘날로 이어지는 ‘호남’ 운운함도 이때의 별칭에서 찾아야 한다.
왜 이때 행정구역들이 정서적 의미를 띄는 별칭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자리 잡은 호남의 정서적 특징은 무엇일까? 16세기 전후한 시기에 정치적으로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훈구와 대립하고 이를 대체해 가면서 향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지배체제를 정립해 나갔다. 전국적으로 지역사회가 성장하고 지역문화가 형성되면서 사림의 영향력은 커갔다. 이에 따라 군·현 단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고, 그 결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각종 읍지(邑誌)가 편찬되었다. 군·현이 지역인식의 기본 단위가 되었으며 단순한 행정 단위에서 벗어나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생활권으로 인식됐다. 이와 같은 군·현의 지역정체성을 토대로 도(道) 단위의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도’를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도’ 별칭들의 탄생이었다.
조선시대에 경기도는 기전(畿甸), 강원도는 관동·영동, 충청도는 호서, 전라도는 호남, 경상도는 영남, 평안도는 관서, 황해도는 해서, 함경도는 관북을 별칭으로 각각 불렀다. 이 도의 별칭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대체로 1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542년(중종 37) 7월 행 부사과(行副司果) 어득강(魚得江)이 상소에서“신의 생각으로는, 젊고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가려 사절(使節)처럼 금년에는 관동 지방을, 다음해에는 영남 지방, 호남 지방, 호서 지방, 서해 지방, 관서 지방, 삭방(朔方)을 차례로 드나들면서 모두 탐방하게 하되 마음대로 실컷 유람하면서 그 기(氣)를 배양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하여 시문에 뛰어난 젊은이들을 전국을 지역별로 유람하게 하여 지역성을 품은 기(氣)를 배양하며 역량을 키우게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때 팔도의 행정명 대신 전국 모두에 통틀어 별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때쯤이면 지역마다 다른 기를 가진 정서가 전국적으로 분명히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별칭들은 처음에는 행정 단위로서의 도(道)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됐다.
한편 사족지배체제가 정립되어 가던 이때 일부 사림들은 절의를 지키기 위해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라도를 찾아와 호남 사림, 내지 호남 사족들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절의·비판·실천정신 등 의향(義鄕)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호남이란 정서적 지역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었다고 본다. 그 결과 16세기 중반에 들어와 전라도 일대가 ‘호남’이란 정서적 지역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는 학파로도 구분되어 호남의 정서적 맥락을 잇는 시원이 됐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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