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빌라에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추정되는 40대 여성이 숨지고 4세 아들이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 가정은 수년째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했지만 정부와 지자체는 위기 징후를 제때 포착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아이는 출생신고 없이 태어난 ‘미등록 영아’인데도 얼마 전 정부의 대대적인 전수조사 대상에서도 빠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2020년 ‘방배동 모자’, 2022년 ‘수원 세 모녀’ 사망 사건 등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은 참극이 또 반복됐다.
전주시는 원룸에서 네 살배기 남자아이를 곁에 두고 숨진 채 발견된 40대 여성과 관련, 복지 사각지대 위기가구 1만 명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지난 8일 전주시 서신동 빌라 원룸에서 A씨(41)가 숨진 채 발견됐다. 옆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B(4)군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며 현재 의식이 돌아왔다. 8년 전 이혼한 것으로 알려진 A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공과금 등을 체납해 정부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에 포착됐고,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18일 전주시 등 각 지역에 A씨 등과 유사한 명단을 일괄 통보했다. 이에 전주시는 7월 28일 안내문 발송→8월 16일 전화→8월 24일 가정방문→9월 4일 우체국 등기를 통해 A씨를 찾았지만, 연락과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시는 그러면서 "단전·단수·가스비·관리비 체납 등 39종 위기가구에 대한 통보를 받은 수가 1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복지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전수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생활고에 시달린 끝에 이른 죽음이 대개 그렇듯 숨진 여성의 집에서는 20만 원이 넘는 밀린 전기료를 포함해 각종 공과금을 독촉하는 고지서가 발견됐다. 정부는 체납 고지서에서 위기 징후를 감지하고 올 7월 이 여성을 ‘위기가구’로 분류해 전주시에 통보했다. 전주시는 여성을 도우려고 안내 우편물을 보내고 전화도 걸어보고 지난달 말에는 빌라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여성이 전입신고 당시 정확한 호수를 기록하지 않아 집을 못 찾았다고 한다. 빌라 집집이 두드리며 여성을 확인했더라면 살았을까. 한계 상황에 이른 가구를 돕는 복지 행정은 언제나 한발 늦는다. 송파 세 모녀 사건 후에야 체납 정보를 활용한 위기가구 발굴 정책을 마련했다. 수원 세 모녀 사건 후엔 위기가구임을 확인하고도 사는 곳이 주민등록 주소지와 달라 생기는 사각지대 해소책을 세웠다. 이번에는 상세한 주소를 적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기가구는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 줄 모르거나 알아도 쓸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다. 한발 앞선 적극 행정이라야 비극을 막을 수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으로 불행하다"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말하는 안나 카레니나 법칙의 탄생이다. <총균쇠>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는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사회과학적으로 더 발전시켰다. 그 결론은 "성공은 모든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하며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사회(복지)정책은 안나 카레니나 법칙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현상의 한 측면만 바라보거나 상황판단의 필요충분조건을 누락했을 경우 그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책실패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정부부처에는 수많은 상설(임시) TF팀과 위원회가 있다. 이들의 입체적인 노력과 다각도에 걸친 판단과 결정이 정책입안과 결과의 성공을 좌우한다. 송파 세모녀 사건과 유사 사건(수원 세모녀 사건 등)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복합적 차원으로 보지 못했다. 정치권과 정부부처는 선제적이고 섬세한 상황판단과 정책 대응이 필요함에도 예산 부족과 전문성 결여, 인력 부족 문제로 늘 변명하며 복지 사각지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사회의 비극은 계속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에서는 국가의 기초생활보장과 복지급여 등의 수급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다. 그러함에도 이를 국가가 주는 특별한 혜택으로 보는 시각과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적 정서 때문에 한계가정에서 국가기관에 선뜻 손을 내밀기 힘든 것이다.
2023년은 송파 세모녀의 비극(2014. 2)이 일어난 지 9주기가 되는 해이다. 우리 사회는 그때로부터 진지한 반성을 하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더 진보한 사회가 되었는가? 정치권에서 거미줄 같은 복지정책을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적 약자인 수급자들을 위한 최저한도의 재원을 언제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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