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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옛 이야기로 부안을 만나다] ② 강흔의 '하설루기'


표암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흔(1739~1775)의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 전함)'엔 1769년 가을 부안현감으로 부임했다고 나온다. 부안읍지를 만들기도한 강흔은 이 해 12월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이 '하설루기(賀雪樓記)'를 통해 드러난다.
이 당시 부안 관아엔 이 누정 외에 부풍관(扶風館), 역락헌(亦樂軒), 단소헌(但嘯軒), 망월루(望月樓), 제민헌(濟民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엔 한양에서 벗들과 어울려 멋지게 논 것(遊雪), 영남 가는 조령의 눈길에서 멋지게 여행한 것(行雪), 대궐에 눈이 내릴 때 멋지게 시를 지은 것(詠雪), 수리산에 내린 눈을 멋지게 감상한(賞雪)까지 하나하나 정취있는 사연으로 넘쳐난다. 하설루에서 눈 구경이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눈을 감상하는 기문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부안의 눈맞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눈이 올 무렵에 갖는 설숭어축제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

부안 관아의 후선루(仙樓)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눈이 크게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께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붉은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무성(武城)과 영주(濠洲), 김계(김제) 여러 군의 산은 백옥 같은 봉우리와 고개가 한가지 빛이고, 성곽 서북쪽의 숲과 골짜기도 온통 흰빛이었다. 관아 건물의 높은 대와 대를 둘러싼 다락에는 떨어지는 꽃잎과 휘날리는 솜버들 사이로 구슬 같은 용마루와 옥 같은 기와가 불쑥 나타났다가 어느새 사라졌다. 상쾌한 기운이 폐부로 스며들 때 술잔을 들어 손님들께 권하며 말했다.

“지금 이 눈은 납일(臘日) 전에 내린 세 번의 서설인데 한 길 높이로 쌓였으니 음산한 요기가 스르르 사라지고 아직 남은 메뚜기 알이 땅속으로 숨어들 겁니다. 내년에는 참으로 풍년이 오리라는 것을 점쳐서 알 수 있습니다. 도적은 틀림없이 일어나지 않을 테고, 송사도 틀림없이 늘어나지 않을 테지요. 그러면 나는 이 누각에 올라 즐겁게 지낼 겁니다. 옛날 소동파(蘇東坡, 소식)가 비가 내릴 때 '희우정(喜雨亭)'을 완성한 것처럼 나는 눈이 내릴 때 이 누각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 이 누각의 이름을 눈을 축하한다는 뜻의 '하루(賀樓)' 로 바꾸렵니다"

술잔이 여러 번 오가고 나자 서글피 예전 일이 떠올랐다. 임오년(1762년) 한양에서 나그네로 지낼 때였다. 귀족과 호걸 집안의 한두 친구가 대설이 내리자 편지를 보내 나를 불렀다. 저물녘에 대문을 나서 나귀에 걸터앉았다. 골목을 지나 큰길을 뚫고 대지의 눈길을 헤쳐 나갔다. 백옥 빛천지에서 친구와 상봉해 어깨를 부딪고 손을 부여잡으며 추위를 몰아낼 난방 도구를 벌여 놓았다. 그 뒤에 운을 나눠 시를 짓되 소동파가 옛날 취성당(聚星堂)에서 한 것처럼 했더니 기분이 몹시도 호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논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해 남쪽 지방에 벼슬살이하러 떠나 *조령에 이르렀을 때 대설을 만났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 곳이라 늙은 나무가 어지러운 삼줄기처럼 솟아 있어 한기가 평야의 열 곱절이나 더했다. 때때로 소나무는 쌓인 눈 무게를 못 견뎌 가지가 부러지고 황새가 깜짝 놀라 날아올랐다. 절정에 올라 저 아래로 일흔 개 고을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몹시도 상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여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다음 해 홍문관(弘文館)에 숙직할 때 대설을 만났다. 푸른 나무와 검푸른 추녀만이 어우러져 있을 뿐이었다. 달빛이 환해 금청교(禁淸橋)를 산보하노라니 자줏빛 옷을 입은 내시가 임금님의 보묵을 받쳐 들고 와서 문신들에게 눈을 반기는 시를 지어 올리라는 하명을 전했다. 절을 하고 받들어 시를 지어 바치고 나자 기분이 몹시도 즐거워 눈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시를 지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다음 해 산으로 돌아와 은거하노라고 문을 걸어 닫은 채 겨울을 날 때 또 대설을 만났다.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문을 나서서 매화가피었는지 더듬어 가다 내친걸음에 수리산(修理山)의 절에 올랐다. 선루(禪樓)와 요사채가 눈에 덮였고, 소나무가 눈에 묻혀 대숲을 가두어 거의길이 끊겼다. 문을 두드리자 장작처럼 깡마른 스님이 향불을 사르고 불경을 읽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도 호젓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눈을 감상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축(己丑)년 올해 나는 또 이 누각에 올라 눈이 온 것을 축하했다. 십 년 이래 한 몸이 노닌 자취가 또렷하게도 마음과 눈에 떠오르건만, 머리를 돌려 보면 종적조차 찾을 길 없다. 마치 눈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같다.

인간 세상 세월이란 이처럼 손아귀에 잡고 즐길 수 없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 만에 어디에 몸을 부쳐 몇 길의 눈을 만나 몇 번이나 즐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내가 이제 이 글을 지어 여기에 남겨 두면 곧 관복을 벗고 떠나리라. 고향에 돌아가 지낼 때 육칠월이 되면 불우산은 허공에서 불타고 시방세계는 가마솥 같으리라. 초가집 처마 밑이나 토방 위에서 나뭇잎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새 한 마리 울지 않을 때 낮잠 끝에 목침에 기대 누워이 글을 읽는다면 맨발로 꽝꽝 언 얼음을 밟는 기분이 들리라.(도움말 한국산문선)



*조령(鳥嶺)은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험한 고갯길로서 남에서 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죽령이 그 역할을 했으나 조선 들어 한반도에 8대 대로를 개통하면서 영남대로의 핵심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죽령과 계립령 하늘재가 주요 통로였다. 죽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라 죽죽장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기 위해 넘었던 최초의 길로서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된다.



*기축(己丑)년:1769년

 

<글 저작권 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