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이 각종 영화 ·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사극 촬영을 위한 각종 영상세트장과 함께 산, 들,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안영상테마파크가 있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강흔(1739~1775년)은 '부안 격포행궁기'와 '하설루기'를 지었다.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는 변산에 있었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두루 살펴보고 썼다. 여행의 과정을 묘사한 솜씨도 빼어나며, 부안 행궁을 찾았다. 조선시대 전북엔 부안 격포, 위봉진, 무주 무풍 등에 행궁이 있었다. 그는 변산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꼼꼼하게 적었다. 그러나 이 글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국난에 대비하려고 요충지에 구축한 요새가 부실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무너져 있다. 젊은 지방관으로서 민심도 군사 대비도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태를 관찰하고 개탄과 우려를 담아 감개하게 서술했다. 부안 행궁의 실상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우환 의식을 구체적 체험을 통해 밝힌 의의가 있는 글이다.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
부안현 관아의 서문을 나와 들길로 이십 리를 가면 변산이다. 변산은 둘레가 구십여 리인데 그 반쪽이 바닷물에 들어가 있다. 산을 안고서 동남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웅연도(熊淵島)이다. 여기에서 바닷배를 타고 산을 따라 아래로 삼십 리를 가면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북쪽은 바로 산이다. 산세가 갈수록 둥그렇게 둘러싸고, 풍기(風氣)가 갈수록 단단하고 빽빽해지는데 이곳이 바로 격포진(格浦鎭)이다. 격포진은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고, 진 앞에 있는 만하루(挽河樓) 밑까지 조수가 곧장 밀려들어 온다. 진에서 꺾어 서쪽으로 일 리를 가면 그곳이 바로 행궁(行宮)이다.
행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뒤로 높은 봉우리에 기대 있다. 봉우리 뒤는 큰 바다이지만 사면을 산이 감싸고 있어 행궁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음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정전(正殿)은 열 칸이고 동서 날개집은 여덟 칸이며 누각 네 칸, 행각(行閣) 네 칸이다. 바깥문은 세 칸이고 안문은 두칸으로 답을 둘러쳤다. 단청이 심하게 벗겨졌으나 건물의 규모는 거창했다. 변산 지역 승려를 불러 모아 행궁을 지키고 있다.
선조 임금 18년 경진년(1580년)에 삼남순검사(三南巡檢使) 박황(朴璜)과 *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고, 경종 임금 4년 갑진년(1724년)에 관찰사가 또 조정에 보고하여 이 행궁을 지었다. 행궁의 지세가 높은 산에 의지하여 험준하고, 또 험한 바다에 걸쳐 있어서 요새로 삼았다.
이 지역은 몹시 가파른 산이 백 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큰 바다가 여기에 이르면 칠산(七山) 앞바다에 막혀 해로의 목구멍이 된다. 돛을 달고 북쪽으로 항해하면 하루 밤낮 사이에 강화도에 곧장 도달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지형이다. 선배들이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조차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진을 설치하고 행궁을 지었다. 그 큰 책략과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다.
정전 뒤편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만 리에 층층이 이는 파도가 눈 아래 아스라하다. 서쪽으로 고군산도나 계화도 등 여러 개의 섬을 바라보니 바둑판이 벌려 있고 별이 펼쳐진 모습이다. 주변 풍경을 두루 살피면서 감개한 기분으로 배회했다.
이윽고 격포진의 장교를 불러 무비(武備)에 관해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의 서쪽 일 리쯤 되는 곳에 대변정(大變亭)이 있는데 무기고입니다. 창은 부러지고 검은 무뎌졌으며, 깃발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어느 것 하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함 한 척과 양곡선 두 척, 척후선 세 척이 있어서 삼 년에 한 번 보수하고 십 년에 한 번 지붕을 교체하는 것이 군율입니다. 지금 십여 년이 흘렀지만 감영이나 수영(水營)에서 물자와 인력을 대 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것은 벌써 훼손되어 버려 지금은 한 척도 남은 배가 없습니다”
오호라! 국가가 태평스러워 바다에 외침의 물결이 일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쁜 소리를 듣지 못한 지 수백 년째다. 만에 하나 변경이 안정되지 않아 외적이 침략할 때 무비가 이렇듯 엉성하다면 지리상 이점을 활용할 길이 없다.
바닷가 백성들은 소금 독점과 어세(漁稅)에 핍박당해 생계를 잇지 못한 지 오래다. 풍속이 본디 교활하고 변덕이 심하므로 인화(人和)도 말할 것이 못 된다. 이런 사정이야 군현을 맡은 낮은 관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만 조정의 많은 현명한 분들이 술 마시며 노래하고 흥겹게 잔치하는 여가에 잠깐만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 나는 모르겠다.(도움말 한국산문선)
*웅연도(熊淵島);일명 곰섬으로, 곰처럼 생겨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우리말로 '곰소가 됐다고 한거.
*관찰사 원두표(元斗杓): 원두표(1593~1664)는 전라관찰사를 세 번이나 지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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