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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고창 연기사터 사천왕상, 어떻게 영광 불갑사의 문화재가 됐나





영광 불갑사 사천왕상은 1987년 9월 18일 전남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천왕상은 진흥왕 1년(540)부터 35년(574)까지 연기조사 만든 것으로, 조선 고종 7년(1870)에 설두대사가 나무배 4척을 동원해 현재의 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불갑사 사천왕상은 원래 연기사에 있던 것으로, 현재 불갑사 사천왕문에 안치돼 있다는 것이다.‘조선 말기 불교 탄압은 불갑사라고 비켜 갈 수 없었다. 유생과 토호들이 사찰에 난입하여 승려와 신도들을 괴롭히고 능멸했다. 또 이에 편승한 요승들이 득세하니 제대로 된 스님들이 절을 지킬 수 없었다. 절하는 이 없으니 절은 절이 아니었다. 폐사지에 다름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그때 설두 대사가 나타나 7창 중수를 했다. 설두 대사는 사천왕상을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서 불갑사로 옮겨왔다. 여기에는 슬프고도 아린 사연이 스며있다. 연기사는 38개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가람이었다. 그런데 연기사 터가 명당이라서 전라감사가 탐을 냈다. 부친의 묘를 쓰려고 절을 비우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부처님 계신 곳을 인간의 유택으로 내줄 수는 없었다. 전라감사는 관군을 풀어 절을 접수하라 명했다. 관군이 재를 넘어 기어 올라왔다. 스님들은 목탁 대신 쇠붙이를 들고 죽기로 싸워 관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관군은 반대편 강을 타고 올라와 한밤중에 불을 질렀다. 울며 저항하는 스님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연기사는 연기로 사라졌다. 다만 사천왕상만 강가 갈대숲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불갑사 불사를 하고 있던 설두 스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사천왕은 비를 맞고 있었다. 사천왕이 말했다. “우리는 연기사의 사천왕이다. 지붕을 씌워주면 가람과 삼보를 지켜주겠다.”'
불갑사 재건에 가장 큰 공을 세운이가 설두스님이다. 하루는 꿈에 사천왕이 나타나 위의 말을 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고 난 설두스님은 고창 흥덕에 연기사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일단 찾아가 보기로 했다. 흥덕이 고창면 관내이고 너무 생생한 꿈이라서 면민을 동원해서 사천왕을 배에 싣고 지금 법성포에 도착하는 길이라고 했다. 설두스님은 법성포에서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 포구로 나갔다. 그때 네 척의 배가 포구에 닿았다. 배 한척마다 커다란 사천왕이 실려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설두 스님은 ‘비 맞는 사천왕상’을 찾아 폐사지 연기사로 갔다. 연기사는 흔적도 없고 커다란 무덤만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정말 사천왕상이 강가 갈대숲에 빠져 있었다. 스님은 네 척의 배에 사천왕상을 나눠싣고 서해 바다로 나와 법성포로 들어갔다. 사천왕상의 몸집이 거대해 불갑사까지 새로 길을 내야 했다. 설두스님은 사천왕상을 법성포에서 달구지 네 대에 옮겨 싣고 불갑사까지 옮겨 모셨다. 그렇게 사천왕상은 연기사를 떠나와 불갑사를 지키게 됐다. 그후 불갑사에는 적어도 전각이 불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연기사(烟起寺) 터는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산 149-3번지 일대에 자리한다. 연기사 창건에 대해서 연기조사 창건설과 도선국사 창건설이 있다. 연기조사가 절을 창건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기도 한 연기조사는 황룡사 출신 승려로, 신라 경덕왕 때의 인물이다. 연기사의 창건 경위나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연기사 터의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창성했던 사찰임을 추정케 한다.
고려시대 연기사는 대가람이었으나, 조선 시대 때에는 사세가 줄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 전기 이후의 것이다. 연기사 터가 있는 소요산은 삼신산(三神山)이라고도 부른다. 소요산 방면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으며, 특히 북쪽으로 곰소만(줄포만)이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장연강(장수강 또는 주진천이라고도 함)을 사이에 두고 고찰 선운사의 도솔산과 마주한 연기사 터는 소요산 중턱 높이 50여m의 완만한 사면에 자리한다. 지금은 연기제(연기저수지) 확장으로 인하여 절 터의 대부분이 수몰됐다. 2002년 농촌용수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연기제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연기사 터를 정식으로 조사했다. 조사 결과, 10여 동의 건물지와 부속 시설, 연못지, 석축, 기단열 등을 확인하였다. 추정되는 가람 배치로는 입구에서 사역의 상단까지 이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하는 배열을 들 수 있다. 사역의 중심 배열에는 부속 시설이나 누각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사역의 확장에 따라 동서 방향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은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등의 명문이 새겨진 막새류와 분청사기, 흑유 등 조선 전기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불갑사 사천왕상은 원래 연기사에 있던 것으로, 현재 불갑사 사천왕문에 안치돼 있다. 불교 교설(敎說)과 관련한 판목(목판본)이 연기사에서 제작되기도 하였다. 현재 발견되는 판목으로는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과 '불설대목연경(佛說大目蓮經)' 등이 있다. 연기사 터를 통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함께 볼 수 있다. '유석질의론'과 '불설대목연경' 등 조선 시대의 불교 교설과 관련한 판목(版木)의 연원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