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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백년을 약속하는 이 밤에 어찌 죽음을 말하랴' 원광대 김창호교수, 한국학호남학진흥원 '호남학산책' 마흔여섯번째 이야기 '송덕봉, 유희춘 부부'가 주고받은 시 소개





16세기 전반, 조선 중종 무렵, 열심히 글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던 스물네 살 호남 선비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열여섯 살 홍주 송씨(宋氏) 집안의 딸 덕봉(德峰)과 혼인을 한다. 북적이던 예식도 끝나고 밤이 되어 두 사람은 신혼 방에 마주 앉았다. 백년의 가약을 맺은 사이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신랑 유희춘은 멋쩍게 한 마디 말을 꺼낸다. “부인,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아시오?” 상식이라 할 삼종지도를 모를 리 없지만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뜻이었다. 덕봉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지요.” “그럼 한 번 말씀해 보시오.” 덕봉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老從子(집에 있을 때는 친정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늙으면 아들을 따른다)입니다”, “거, 夫老從子가 아니라 夫死從子(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가 아니오?” 그러자 덕봉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모르는 바 아니나, 평생을 기약하는 이 밤에 어찌 죽음[死]을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늙을 老(로)’로 대신한 것입니다"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는 한국학호남학진흥원의 '호남학산책' 마흔여섯번째 이야기를 통해 무장현감과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낸 유희춘이 부인 송덕봉의 기지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백년을 약속하는 이 밤에 어찌 죽음을 말하랴'
그는 송덕봉, 유희춘 부부가 주고받은 시를 소개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는 '공자가어'에 나옴다여자가 어릴 때는 부모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노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동시대의 도덕률(道德律)이었다. 여자에게는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것이 유교적 이념이었으며, 이 삼종(三從)의 교훈은 실로 여성의 생애를 지배하는 근본관념이었다. 또한, 일단 출가하여 남의 아내가 되면 그 남편에 좇을 뿐 아니라 그 시부모를 섬기며 가사잡무에 헌신하고, 때에 따라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절을 다한다는 것이 부녀자의 의무였고, 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 또한 최상의 의무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부터 서구로부터의 기독교의 전래와 현대적 교육의 보급으로 이제는 남녀동등한 세상이 됐다.
유희춘은 평소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서사(書史)를 다 외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집안일에는 서툴렀고 관심도 없었다. 송덕봉은 명민(明敏)한 성격에 경전과 사서에 능했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었다. 남편에게 살림살이를 알리거나 재촉하기보다는 알아서 잘 꾸려가는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정이 두터웠다. 때로는 격의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어느 날 둘이 함께 있을 때였다. 남편 유희춘은 송덕봉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몇 글자를 적어갔다.

“出門鼻先出”(문을 나서니 코가 먼저 나오고)

부인 송덕봉이 코가 다소 컸는데, 그것을 비유하며 놀린 것이었다. 이것을 본 송덕봉은 입을 꾹 다물고는 자신도 몇 글자를 적었다.

“坐席纓掃地”(자리에 앉으니 갓끈이 땅바닥을 쓰네)

남편 유희춘은 키가 작았다. 이것을 돌려서, 자리에 앉을 때면 갓끈이 땅바닥을 쓴다고 한 것이다. 부인을 골려 주려다가 골림을 당한 꼴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평소에도 둘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때로는 가족들이 시작(詩作)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전하지 않지만 유희춘은 아내의 시를 모아 '덕봉집'이란 시집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벗이기도 했다. 넓은 이해의 폭을 가졌지만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희춘의 허세 섞인 자랑에 송덕봉이 자중하라는 일침을 놓는가 하면, 유희춘의 담담한 고백에 송덕봉이 염려의 마음으로 감싸기도 했다. 말년에 주고받은 작품을 하나 소개한다.



정원의 꽃 화려해도 볼 것이 없고
악기 연주 듣기 좋아도 관심이 없네
좋은 술 고운 자태에 흥미일랑 없고
참된 맛이란 오직 서책에만 있구려

至樂吟, 示成仲

園花爛熳不須觀 絲竹鏗鏘也等閑
好酒妍姿無興味 眞腴惟在簡編間

유희춘은 공부를 최고의 재밋거리로 삼았다. 어느 날 그런 마음을 노래한 시를 덕봉에게 보였다. 울긋불긋한 정원의 꽃, 귓가에 일렁이는 음악 소리, 그리고 향기로운 술이며 아름다운 여인. 세상에서 즐거움으로 삼는 것들이지만 자신은 손때 묻은 책 속에서 참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다. 학문에 열심인 남편을 추켜세울 만도 하지만, 덕봉은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봄바람에 아름다운 경치 예로부터 감상했고
달 아래 거문고 연주 또한 하나의 한가로움
술 역시 근심 잊고 정 넘치게 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서책에만 빠져있으신지

次韻

春風佳景古來觀 月下彈琴亦一閑
酒又忘憂情浩浩 君何偏癖簡編間

송덕봉의 마음은 이랬던 것 같다. “선비가 책을 읽는 것은 중하고 중하지요. 그렇지만 책에만 매몰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으니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보시지요. 좋은 풍광 속에 술 한 잔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공부 밖으로 제쳐 둔 것들을 다시 공부의 테두리에 담아 상대를 다독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은 함경도 종성 유배였다. 유희춘이 26세(1547년) 때에 종성에 가자 송덕봉은 고향에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림을 꾸려갔다. 1558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송덕봉은 삼년상(三年喪)을 치른 후 먼 북단의 종성을 찾아간다.


걷고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는 끝이 없이 거울처럼 잔잔하네
만 리 길의 부인이 무슨 일로 이르렀는가
삼종의 의리 중요하고 이 한 몸 가벼워서라네

行行遂至磨天嶺 東海無涯鏡面平
萬里婦人何事到 三從義重一身輕

종성에 가려면 마천령(摩天嶺)을 넘어야 한다. 마천령은 함경남도 단천과 함경북도 김책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서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을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천령을 넘던 덕봉은 잠시 쉬며 가쁜 숨을 내쉰다. 순간 툭 트인 동해가 눈에 들어왔다. 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 나를 여기에 이끈 것은 무엇인가. 순간 혼례를 치뤘던 그 날의 밤이 생각났다. 어색함 속에 주고받던 ‘삼종지도’라는 말. 그 안의 끈끈한 믿음이 오늘의 이 길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덕봉은 첫날밤에 ‘죽음[死]’ 대신 ‘늙음[老]’을 말했던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유희춘은 ‘적인종부(適人從夫)’의 ‘從(종)’을 상호적 가치로 여기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통시대의 가정이 엄숙주의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이러한 선입견의 적용을 어렵게 한다. 쾌활한 생활 모습과 온기있는 정(情)의 나눔. 관념의 유학을 넘어 그러한 현장성의 포착과 발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