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이 처음 소개하는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
이종근(한국문화 스토리작가, 새전북신문 편집부국장)
부안이 각종 영화 ·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사극 촬영을 위한 각종 영상세트장과 함께 산, 들,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안영상테마파크가 있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강흔(1739~1775년)은 '부안 격포행궁기'와 '하설루기'를 지었다.
호는 삼당재(三當齋), 본관은 진주(晉州)로 증조부 강백년(年), 조부 강현(姜), 아버지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으로 이어지는 소북(小北)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763년 25세의 나이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그가 관계에 진출한 뒤 아버지 강세황 역시 영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관직에 나섰다. 얼마 뒤 영남 지방에잠깐 근무하며 각지를 두루 여행했다. 1767년 사헌부검열과 대교, 병조 좌랑을 거쳐 1769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772년 이조 좌랑과 승지 등을 두루 지냈고, 문장을잘 짓는다는 명성을 누렸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강흔은 재기 발랄한 문인으로 시와 산문 모두 경쾌한작품을 다수 남겼다. 그 가운데 '담배를 읊은 열 편의시(詠烟茶草十首效)'는 담배가 간절하게 떠오르는 순간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산문 가운데 서(序)와 기(記)의 문체에 볼만한 작품이 많다. 문집으로 필사본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가 전한다.
그는 1769년 가을 전라도 부안의 현감에 제수되어 부임했다. 부안은 그가 산 37년의 짧은 인생에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부안에서 강흔은 읍지를 만들고, 후루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부임한 이듬해 봄에는 남들처럼 아버지를 모셔 구경을 시켜 드렸다. 강세황은 아들 덕에 1770년 5월 채석강과 격포진 일대를 유람하고서 '격포유람기'와 '유우금암기'와 '우금암도(禹金巖圖)'를 남겼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이 18세기 부안을 배경으로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인 ‘우금암도(미국LA 카운티미술관 소장)다.
‘우금암도(禹金巖圖, 지본수묵, 25.4×267.34㎝)’는 강세황이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하던 당시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다. 이는 실경산수화로, 강세황이 그림과 함께 적은 글은 ‘표암유고’의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변산 특유의 암산(巖山)의 분위기를 굵은 갈필(渴筆)로 표현, 명승지를 지나며 빠른 필치로 각 장소의 특징을 사생한 작품으로,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지역이 금강산이 아닌, 부안 일대를 그린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한 시기를 고려해 보면, 1770년 2월 혹은 이듬해 2월에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구성은 이동 경로에 따라 우금암(禹金巖)→문현(文懸)→실상사(實相寺)→용추(龍湫)→극락암(極樂庵)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금암과 문현 사이의 장면은 지명이 적혀 있지 않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우며, 극락암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주변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소다.
직각으로 가늘게 쪼개진 벽의 무늬가 마치 비단과 같다고 기록한 ‘우금암’에 깊은 인상을 받아 묘사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
는 변산에 있었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두루 살펴보고 썼다.
여행의 과정을 묘사한 솜씨도 빼어나며,
부안 행궁을 찾았다. 조선시대 전북엔 부안 격포, 위봉진, 무주 무풍 등에 행궁이 있었다.
그는 변산의 행궁을 찾아가 지형과 구조,
건립의 역사에 관리 실태까지 꼼꼼하게 적었다.
그러나 이 글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국난에 대비하려고 요충지에 구축한 요새가 부실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무너져 있다. 젊은 지방관으로서 민심도 군사 대비도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태를 관찰하고 개탄과 우려를 담아 감개하게 서술했다. 부안 행궁의 실상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우환 의식을 구체적 체험을 통해 밝힌 의의가 있는 글이다.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
부안현 관아의 서문을 나와 들길로 이십 리를 가면 변산이다. 변산은 둘레가 구십여 리인데 그 반쪽이 바닷물에 들어가 있다. 산을 안고서 동남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웅연도(熊淵島)이다. 여기에서 바닷배를 타고 산을 따라 아래로 삼십 리를 가면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북쪽은 바로 산이다. 산세가 갈수록 둥그렇게 둘러싸고, 풍기(風氣)가 갈수록 단단하고 빽빽해지는데 이곳이 바로 격포진(格浦鎭)이다. 격포진은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고, 진 앞에 있는 만하루(挽河樓) 밑까지 조수가 곧장 밀려들어 온다. 진에서 꺾어 서쪽으로 일 리를 가면 그곳이 바로 행궁(行宮)이다.
행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뒤로 높은 봉우리에 기대 있다. 봉우리 뒤는 큰 바다이지만 사면을 산이 감싸고 있어 행궁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음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정전(正殿)은 열 칸이고 동서 날개집은 여덟 칸이며 누각 네 칸, 행각(行閣) 네 칸이다. 바깥문은 세 칸이고 안문은 두칸으로 답을 둘러쳤다. 단청이 심하게 벗겨졌으나 건물의 규모는 거창했다. 변산 지역 승려를 불러 모아 행궁을 지키고 있다.
선조 임금 18년 경진년(1580년)에 삼남순검사(三南巡檢使) 박황(朴璜)과 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고, 경종 임금 4년 갑진년(1724년)에 관찰사가 또 조정에 보고하여 이 행궁을 지었다. 행궁의 지세가 높은 산에 의지하여 험준하고, 또 험한 바다에 걸쳐 있어서 요새로 삼았다.
이 지역은 몹시 가파른 산이 백 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큰 바다가 여기에 이르면 칠산(七山) 앞바다에 막혀 해로의 목구멍이 된다. 돛을 달고 북쪽으로 항해하면 하루 밤낮 사이에 강화도에 곧장 도달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지형이다. 선배들이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조차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진을 설치하고 행궁을 지었다. 그 큰 책략과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다.
정전 뒤편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만 리에 층층이 이는 파도가 눈 아래 아스라하다. 서쪽으로 고군산도나 계화도 등 여러 개의 섬을 바라보니 바둑판이 벌려 있고 별이 펼쳐진 모습이다. 주변 풍경을 두루 살피면서 감개한 기분으로 배회했다.
이윽고 격포진의 장교를 불러 무비(武備)에 관해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의 서쪽 일 리쯤 되는 곳에 대변정(大變亭)이 있는데 무기고입니다. 창은 부러지고 검은 무뎌졌으며, 깃발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어느 것 하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함 한 척과 양곡선 두 척, 척후선 세 척이 있어서 삼 년에 한 번 보수하고 십 년에 한 번 지붕을 교체하는 것이 군율입니다. 지금 십여 년이 흘렀지만 감영이나 수영(水營)에서 물자와 인력을 대 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것은 벌써 훼손되어 버려 지금은 한 척도 남은 배가 없습니다”
오호라! 국가가 태평스러워 바다에 외침의 물결이 일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쁜 소리를 듣지 못한 지 수백 년째다. 만에 하나 변경이 안정되지 않아 외적이 침략할 때 무비가 이렇듯 엉성하다면 지리상 이점을 활용할 길이 없다.
바닷가 백성들은 소금 독점과 어세(漁稅)에 핍박당해 생계를 잇지 못한 지 오래다. 풍속이 본디 교활하고 변덕이 심하므로 인화(人和)도 말할 것이 못 된다. 이런 사정이야 군현을 맡은 낮은 관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만 조정의 많은 현명한 분들이 술 마시며 노래하고 흥겹게 잔치하는 여가에 잠깐만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 나는 모르겠다.(도움말 한국산문선)
*웅연도(熊淵島);일명 곰섬으로, 곰처럼 생겨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우리말로 '곰소가 됐다고 한거.
*관찰사 원두표(元斗杓): 전라관찰사를 세 번이나 지낸 원두표(1593~1664)는 전라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부안 줄포에 사는 세도가 김홍원(1571~1645)에게 아들의 첩을 구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 전라감사 유임 명령이 내려진 1640년(인조 18년) 7월 14일부터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드릴 말씀은 저희 큰아이가 혼인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아직 태기가 없습니다. 또 며느리가 심한 배앓이를 해서 귀여운 손자를 얻을 것이라는 온 집안의 희망이 이제는 끊겼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안의 피를 이은 여자를 구한 지 오래 되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문으로 듣건대 김 안주목사에게 서녀가 있다고 하던데 만일 그녀를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된다면 반드시 절의(節義) 높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 좋은 말로 한 번 주선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만일 이 일이 절박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감히 영감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부디 소홀히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영감님께서 그 댁에 한 차례 왕림해주십시오. 경진년(1640) 8월 10일, 원두표가 머리를 조아리고 아룁니다”
김홍원은 여러 곳에 집과 정자를 소유한 부자로 진사와 문과 초시에 합격한 문인이다. 김준 안주목사는 고려 명장인 김취려의 후손으로 교동현감을 역임하고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의주부윤에 임명됐다. 원두표는 김준과 일면식이 없었다. 김홍원과 김준이 친한 사이인 것을 알고 이 같은 사적인 부탁을 한 것이다. 원두표의 바람이 성사됐는지는 이후 편지가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공무 중 병든 아내와의 사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김홍원의 아들 김명열(1613~1672년)은 성균관 전적, 예조와 형조 및 공조의 좌랑과 정랑 등을 역임했다.
전라관찰사를 3번 지낸 원두표
'인조실록'을 보면 원두표는 남들은 한 번 임명되기도 어렵다는 전라관찰사를 세 차례나 역임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1634년(인조 12년) 2월이었다.
치적이 좋다는 이유로 임기가 1년 연장돼 2년 동안 재임했다.
두 번째로 임명된 것은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637년(인조 15년) 3월이다. 이번에는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임기가 1년(~1638년 6월) 더 연장됐다.
'전라감사 1년에 한정하여 그대로 근무시키는 일에 대한 비변사(備邊司)의 계(啓)' 인조 16년 1638년 2월 13일의 내용이다
아뢰기를 '전라감사 원두표(元斗杓)의 임기가 이번 달에 만료되는데 지금 남방(南方)의 형편으로는 잘 다스리는 감사를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1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근무시키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啓曰, 全羅監司元斗杓, 箇滿在於今月, 而此時南方善治監司, 遞易重難, 限一年仍任, 似爲宜當敢啓, 答曰, 依啓。
마지막으로 제수가 된 것은 1639년(인조 17년) 8월이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임기가 만료되자 이때에도 국왕은 진휼을 잘 처리토록 하라면서 다음 해 봄(1641년 4월)까지 유임시켰다고 한다.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위의 편지를 보낸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원두표는 뒷날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그는 문과에 급제한 사람도 아니었다. 조선조 역사상 연산군 이후의 후기에 음보(蔭補)로 정승에 오른 이는 이 한 사람뿐이다. 광해군의 혼조를 무너뜨리고,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의사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일화 중, 특히 두 가지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다.
그 하나는 '예송문제'(禮訟問題)로 나라 안이 시끄러웠을 때의 일이다. 서인과 남인의 당파 갈등이 심하였다. 이때 서인이었던 원두표는 남인의 주장을 따른 대왕대비(趙大妃)의 3년복제에 손을 들었다. 이를 꺼리고 싫어하는 서인에게, 원두표는 '자기 소신을 말하여,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느냐'는 태연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무작정 패거리로 들고 일어나는 저때의 폐단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심지(心志)였던 셈이다.
또 하나의 일화는 그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효종조를 지나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는 내의원과 군기사의 도제조를 겸직하였다. 자기 소신으로 이것이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그 소신을 들어내어 말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왕때의 일인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금께 직언한 일화도 전한다. 임금이 뇌물 받은 관리(贓吏)를 논하는 자리에서 목소리와 얼굴빛이 거칠고 사나워졌다. 원두표는 앞으로 나아가 '임금은 소리가 법이 되고 몸이 척도(尺度)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노여움이 있더라도 성색(聲色)을 크게 할 것이 아닙니다'는 아룀이었다. 임금도 곧바로 사례했다고 전한다.
좌의정의 자리에선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건의하여 오는 일이 있으면 먼저 귀기울여 듣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즉석에서 가로막거나 속단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는 그의 마음슴의 도량(度量)과 국량(局量) 까지를 엿볼 수 있다.
이만한 일화라면 뭐 그리 대견해 할게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사실 대견하달 것도 없다. 원두표로서도 상식을 좇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당시 문과급제자가 아니고도 저만한 처신과 아량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상식에 통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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