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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31> 이종근이 처음으로 소개하는 강흔의 '하설루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31>  이종근이 처음으로 소개하는 강흔의 '하설루기'

이종근(한국문화 스토리작가, 새전북신문 편집부국장)

강세황의 격포유람기, 울금바위 유람기,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하설루기'에 부안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강세황이 부안을 배경으로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인 ‘우금암도(미국LA 카운티미술관 소장)’는 강세황이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1770년 8월~1772년 1월)하던 당시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다. 
우금암은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우금산(329m)의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그 아래에는 천년고찰 개암사가 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기녀의 춤사위를 보면서, 사냥꾼이 변산에서 잡아온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소주 한 잔을 하는 기분이 어떨까.

 ‘부안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큰 눈이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게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바로 이때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삼당재유고)’

표암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흔(1739~1775)의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 전함)'엔 1769년 가을 부안현감으로 부임했다고 나온다.
부안읍지를 만들기도한 강흔은 이 해 12월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이 '하설루기(賀雪樓記)'를 통해 드러난다. 

이 당시 부안 관아엔 이 누정 외에 부풍관(扶風館), 역락헌(亦樂軒), 단소헌(但嘯軒), 망월루(望月樓), 제민헌(濟民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엔 한양에서 벗들과 어울려 멋지게 논 것(遊雪), 영남 가는 조령의 눈길에서 멋지게 여행한 것(行雪), 대궐에 눈이 내릴 때 멋지게 시를 지은 것(詠雪), 수리산에 내린 눈을 멋지게 감상한(賞雪)까지 하나하나 정취있는 사연으로 넘쳐난다. 하설루에서 눈 구경이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눈을 감상하는 기문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부안의 눈맞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눈이 올 무렵에 갖는 설숭어축제가 예사롭지 않다.
  
강흔의 '서설을 반기는 누각' 하설루기(賀雪樓記)
 
부안 관아의 후선루(仙樓)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눈이 크게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께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붉은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무성(武城)과 영주(濠洲), 김계(김제) 여러 군의 산은 백옥 같은 봉우리와 고개가 한가지 빛이고, 성곽 서북쪽의 숲과 골짜기도 온통 흰빛이었다. 관아 건물의 높은 대와 대를 둘러싼 다락에는 떨어지는 꽃잎과 휘날리는 솜버들 사이로 구슬 같은 용마루와 옥 같은 기와가 불쑥 나타났다가 어느새 사라졌다. 상쾌한 기운이 폐부로 스며들 때 술잔을 들어 손님들께 권하며 말했다.

“지금 이 눈은 납일(臘日) 전에 내린 세 번의 서설인데 한 길 높이로 쌓였으니 음산한 요기가 스르르 사라지고 아직 남은 메뚜기 알이 땅속으로 숨어들 겁니다. 내년에는 참으로 풍년이 오리라는 것을 점쳐서 알 수 있습니다. 도적은 틀림없이 일어나지 않을 테고, 송사도 틀림없이 늘어나지 않을 테지요. 그러면 나는 이 누각에 올라 즐겁게 지낼 겁니다. 옛날 소동파(蘇東坡, 소식)가 비가 내릴 때 '희우정(喜雨亭)'을 완성한 것처럼 나는 눈이 내릴 때 이 누각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 이 누각의 이름을 눈을 축하한다는 뜻의 '하루(賀樓)' 로 바꾸렵니다"

술잔이 여러 번 오가고 나자 서글피 예전 일이 떠올랐다. 임오년(1762년) 한양에서 나그네로 지낼 때였다. 귀족과 호걸 집안의 한두 친구가 대설이 내리자 편지를 보내 나를 불렀다. 저물녘에 대문을 나서 나귀에 걸터앉았다. 골목을 지나 큰길을 뚫고 대지의 눈길을 헤쳐 나갔다. 백옥 빛천지에서 친구와 상봉해 어깨를 부딪고 손을 부여잡으며 추위를 몰아낼 난방 도구를 벌여 놓았다. 그 뒤에 운을 나눠 시를 짓되 소동파가 옛날 취성당(聚星堂)에서 한 것처럼 했더니 기분이 몹시도 호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논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해 남쪽 지방에 벼슬살이하러 떠나 *조령에 이르렀을 때 대설을 만났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 곳이라 늙은 나무가 어지러운 삼줄기처럼 솟아 있어 한기가 평야의 열 곱절이나 더했다. 때때로 소나무는 쌓인 눈 무게를 못 견뎌 가지가 부러지고 황새가 깜짝 놀라 날아올랐다. 절정에 올라 저 아래로 일흔 개 고을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몹시도 상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여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다음 해 홍문관(弘文館)에 숙직할 때 대설을 만났다. 푸른 나무와 검푸른 추녀만이 어우러져 있을 뿐이었다. 달빛이 환해 금청교(禁淸橋)를 산보하노라니 자줏빛 옷을 입은 내시가 임금님의 보묵(墨)을 받쳐 들고 와서 문신들에게 눈을 반기는 시를 지어 올리라는 하명을 전했다. 절을 하고 받들어 시를 지어 바치고 나자 기분이 몹시도 즐거워 눈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시를 지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다음 해 산으로 돌아와 은거하노라고 문을 걸어 닫은 채 겨울을 날 때 또 대설을 만났다.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문을 나서서 매화가피었는지 더듬어 가다 내친걸음에 수리산(修理山)의 절에 올랐다. 선루(禪樓)와 요사채가 눈에 덮였고, 소나무가 눈에 묻혀 대숲을 가두어 거의길이 끊겼다. 문을 두드리자 장작처럼 깡마른 스님이 향불을 사르고 불경을 읽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도 호젓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눈을 감상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축(己丑)년 올해 나는 또 이 누각에 올라 눈이 온 것을 축하했다. 십 년 이래 한 몸이 노닌 자취가 또렷하게도 마음과 눈에 떠오르건만, 머리를 돌려 보면 종적조차 찾을 길 없다. 마치 눈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같다.
인간 세상 세월이란 이처럼 손아귀에 잡고 즐길 수 없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 만에 어디에 몸을 부쳐 몇 길의 눈을 만나 몇 번이나 즐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내가 이제 이 글을 지어 여기에 남겨 두면 곧 관복을 벗고 떠나리라. 고향에 돌아가 지낼 때 육칠월이 되면 불우산은 허공에서 불타고 시방세계는 가마솥 같으리라. 초가집 처마 밑이나 토방 위에서 나뭇잎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새 한 마리 울지 않을 때 낮잠 끝에 목침에 기대 누워이 글을 읽는다면 맨발로 꽝꽝 언 얼음을 밟는 기분이 들리라.(도움말 한국산문선)

*조령(鳥嶺)은 현재 조령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산보다 고갯길로 더욱 유명했으며,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도 매우 많다. 이 사건은 역사적 지명으로 연결된다.
신라의 오령은 조령·죽령(竹嶺)·화령(化嶺)·추풍령(秋風嶺)·팔량령(八良嶺)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고구려와 한강으로 진입하는 관문역할을 한 고갯길들이다. 조령을 넘어가면 바로 충주가 나오고 한강 상류로 연결된다. 
조선 태종 때 지금의 문경새재 길이 열렸는데 새로 난 길이라 '새재'라 했는데 한자로 조령(鳥嶺)이라 하고 있다. 
조령은 또 죽령과 함께 두 고개의 남쪽에 있는 경상도를 영남으로 불러 영남이란 지명의 유래가 됐다. 다시 말해 조령·죽령 이북은 충청도, 남쪽은 경상도로서 두 지역의 경계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조령과 죽령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령은 매우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시문집 '번암집'에 실린 ‘조령’이란 시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남쪽에 극히 험한 고개 있으니(炎維有絶險)/ 조령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곳(鳥嶺天下獨)/ 태곳적의 쇠가 닳아 절벽 이루고(壁磨太始鐵)/ 두터운 지맥 끊겨 벼랑이 됐네 (崖絶厚地脉)/ 지난 날 신라와 고려시대에 (新羅及高麗)/ 하늘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天以限南北)/ 벌벌 떨며 공중에 자도 만들고(凌兢斲飛棧)/ 기어올라 북극성 뚫으려 해도(仰攀穿斗極)/ 신령한 도끼날이 도리어 무뎌(神斧力反脆)/ 단번에 돌 모서리 깎지 못하여(未遽剗石角)/ 숲에서는 음산한 기운 풍기고(林木集送氣)/ 자주 하늘 컴컴해져 비를 뿌렸네(往往天潑黑, 후략)//'

채제공보다 훨씬 앞서 조선 초기 인물인 김시습(1435~ 1493)도 조령을 지나며 ‘유조령 숙촌가(踰鳥嶺 宿村家)’란 시를 남겼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嶺分南北與西東)/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路入靑山縹緲中)/ 이 좋은 봄날에 고향에도 못 가는데(春好嶺南歸不得)/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鷓鴣啼盡五更風)//’

조령은 예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험한 고갯길로서 남에서 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죽령이 그 역할을 했으나 조선 들어 한반도에 8대 대로를 개통하면서 영남대로의 핵심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죽령과 계립령 하늘재가 주요 통로였다. 죽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라 죽죽장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기 위해 넘었던 최초의 길로서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된다.
왜군이 한반도를 침범해 왔을 때 신립 장군이 조령관문을 버리고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충주 탄금대를 방어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많은 개인 문집에서도 잘못된 방어라고 질책하는 항소가 수십 차례 등장한다.
한편 흔히 알려지기로는 옛날부터 ‘새도 넘나들기 험한 고개’라 하여 조령으로 사용하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지명을 한글로 바꾸면서 새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 했다는 설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에 그만한 높이의 고개는 매우 많다. 우리말에서 ‘새’는 원래 풀을 의미한다. 채소의 옛말이자 방언인 남새밭이나 초가집을 말하는 샛집, 그리고 억새 등에 포함된 새는 전부 풀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조령에만 풀이 많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고갯길에는 다 풀이 있기 마련이다.
'새'는 풀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이란 뜻도 있다. 조령과 동쪽으로 마주보는 주흘산이 동서로 뻗어 있는 중간에 있는 험한 사잇길이었기 때문에 '새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언어는 당시 편리한 대로 사용하고, 문자는 형식을 갖춰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개통하면서 새로 난 신작로란 의미로 새재로 명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민간에서 말을 할 때는 '새재'라 쓰고, 문장으로 남겨야 할 때는 초재 또는 초점, 조령으로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축(己丑)년:1769년을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