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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 완주 만마관을 복원하라

'층층성벽 굽은 보루는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 동녘을 지나오니 한 누각이 나타나네 유수의 고을에는 정전 이미 묵었고 대방의 나라 요새로서 예부터 철벽 이었다네
쌍계에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에 꽃은 만발하고 전운은 걷혔구나 봉화불 오르지 않고 노래와 춤 가득하니 수양버들 가지에는 아직 목란 배가 묶여 있네'

 다산 정약용이 지은 '남원 광한루에 올라(登南原廣寒樓)'엔 광한루에 오르기 전 지나왔다는 만마관이 등장한다.
'만마관(萬馬關)'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지어질 당시 전주와 호남평야의 미곡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의 출입구였기에 그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곳 이었다. 왜적이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전주로 들어올 때 침공을 저지하는 1차 방어요새가 바로 이 만마관이었다.
만마관을 지나왔던 농민혁명군은 성 안의 백성들에 의해 활짝 열린 풍남문을 통과하여 전주성에 입성한다. 
잦은 왜구 침략으로 전주부성 보호와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 곡물 수탈을 막기 위해 순조 11년(1811년)때 축성된 만마관(萬馬關). 이 요새는 완주군 상관면 원용암마을 국도 제17호 선상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 본체의 모습은 없어지고 안타깝게도 무너진 성터의 흩어진 돌무더기 흔적만이 남아 있다.

당시 부대시설로는 진장아문, 저서지고, 장대, 화포청 등 10여칸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며 왜적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요새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산지’의 기록에 의하면 순조 11년 전라관찰사 이상황이 부의 동남 7리에 만마관을 축성했고 1813년 관찰사 박윤수가 견훤고성지에 산성을 축성하고 진을 설치했다고 기록됐다.

전라감사 이상황이 전주부의 만마동은 예로부터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뜻하는 것처럼 1만 마리의 말을 감추어 두고 지킬 만큼 주요한 지점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며 이곳 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장계를 올려 만마동 남쪽에 만마관을 만들게 되었다.

여지도서 '남고진 사례'에 따르면 만마관은 남고진에서 동쪽(실제로는 남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남관진에서 5리)에 있으며 성의 문 위에 지은 다락인 문루가 6칸이고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제 장식이 달린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반원이 되게 만든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조선왕조실록 고종 10권을 보면 전주부 만마관 등의 공사에 자금을 헌납한 진제필을 변경 장수에 임명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이 만마관 축성시 자금을 헌납해 관직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김조순의 문집 풍고집은 1868년 간행을 했는데 이 속에 만마산성 신축기가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만마산성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 ,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 만마관은 1910년대 파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1907년경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완주 만마관 사진은 아직도 남아있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고전한 곳으로, 군인들의 모습이 서 있으며, 부서져가는 형상이다.

자기네가 고전했던 만마관, 자기네를 궤멸했던 적장 흔적과 대승의 흔적을 기념 사진첩에 삽입한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은 일본군에는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식민화하려는 작전인 동시에 역사적인 임무였다.

만마관 안내판이 국도17호선(춘향로) 원용암 마을 바로 위에 서있다. 이곳 주변으로는 축성에 사용되었음직한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보인다. 질주하는 차량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상관면(上關面)의 '관(關)'은 빗장을 의미한다. 군사장 중요한 지역으로 진(鎭)을 두어 방어하거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상관면은 신리 약 9km 남쪽에 협곡을 이루며 옛 전주부의 관문 역할을 하던 만마관(萬馬關)의 위(북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남관진은 상관의 남쪽에 있는 군진을 뜻한다. 남관초등학교 교차로 서쪽에는 1873년(고종10)에 세워진 남관진창건비가 있다.

전주와 완주에는 완산승경(完山勝景)이 있다. 가운데 20번째로 '만마도관(萬馬道關)'이 있다. 이는 만마관(萬馬關)과 도관(道關)이라는 지명은 모두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과거에 만마관은 유명한 요새지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관 마을 중턱 협곡을 끼고 성을 쌓았다. 이 성을 가리켜 '만마도관'이라 불렀으며 완산승경 가운데 하나다. 높이가 70-80 미터에 이르는 산성과 관문을 갖춘 '난공불락의 요새지'가 바로 '만마도관'이다. 만마도관은 '만마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마도관이 있었던 곳은 전주-남원 간 국도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높은 산이 좌우로 내려져 있는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의 남관초등학교를 지나 약 2km 가량 더 가면 만마관과 도관 마을이 나온다. 전라선 철로도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이 바로 '만마도관:의 현장이다.

지금은 전주-남원 간 4차선 국도가 열려있고 철도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좌우로 산이 걸쳐 있는 협곡이었다. 요새지가 들어서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전쟁이 났을 때 이곳을 막으면 적군이 더 이상 쳐들어올 수 없는 지형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행히도 만마도관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이 일대에는 성벽을 쌓았던 돌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을 쌓았던 돌무더기만이 옴스란히 남아있다.

'만마도관'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남관초등학교 앞에는 남관진(南關鎭)이 있었다. 이곳은 중요한 군사시설이 들어선 곳이다. 조선 말기 왜구를 무찌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바로 남관진이다.

그러나 남관진도 모두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선지 오래다. 남관진 창건비만이 홀로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현장인 만마관과 남관진을 복원하는 일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1840년도의 지도를 보면 만마관 뿐 아니라 위봉산성의 건물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만마관은 전주부성, 즉 전라감영의 남쪽을 지켰던 축성으로써 남원과 나주, 광주를 비롯해 멀리는 제주도까지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했기에 지금의 관촌(館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통행하기 일쑤였다.

김경곤 만마관 복원 추진 위원장은 “만마관 복원사업은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의 재조명 차원에서 지자체와 정부차원에서 공모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전주를 대표하는 역사적 랜드마크로 탄생된다면 천년고도의 역사적 자긍심과 관광객 유치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