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21> 고창출신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매약상 등장, 전라감영 심약당은 구 유의원 자리
'쇄미록(瑣尾錄)(1591~1601)의 1592년과 1593년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임진왜란 직후 산속에 피난을 가 있으면서 약으로 쓰기 위해 오미자 5~6말(末)을 따고(1592. 9. 12), 온 가족이 학질에 걸렸을 때 치료약으로 쓰기 위해 뽕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다(1593. 9. 20)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로부터 약초의 채취가 관료와 관노비, 일반 농민 외에도 의약에 대한 지식을 공부한 사대부에 의해서도 수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장수에서 임진왜란 맞은 오희문 '쇄미록'을 썼다.
1668년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병이 들 때엔 자국산의 약초를 복용하는데, 보통 백성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모든 의원(醫員)은 거의 상류인간에 쓰여진다. 그리하여 의원을 쓸 형편이 못 되는 빈민들은 (그 대신) 맹인[判數] 복자(卜者)를 쓰곤 한다"고 적고 있다.
일반 백성의 약초 채취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수행되는 것은 아니고, 생활공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종류의 약초들을 인지해 채취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7세기 말까지 조선 민간사회 약재유통 방식은 직접 채취하거나,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친구나 지인을 통해 주고받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심약과 함께 지방을 다니며 약재의 진상을 직접 관리했던 16세기의 상황과 달리, 17세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국가에 대한 약재의 수납은 직접 진상이 아니라 약계를 하는 공인이 담당하게 된다. 즉, 약초의 채취는 국가에 납부하거나 가내소비를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다가, 약재의 생산과 유통이 상업적 이윤을 창출할 여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개인문집이나 일기자료에서도 약초채취 양상이 발견되곤 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1567~1577)의 1571년 3월 기록에 따르면, 저자인 유희춘은 당시 전라관찰사로 활동하면서 심약(審藥)을 대동하고 전라도 각지를 순행했다고 적고 있다. 심약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임명해 지방으로 파견한 종9품의 의학 관료로, 지방 약재의 진상을 책임지며 지방과 중앙의 의료를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심약의 임기는 18세기 중반 영조 대의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의 기록에 따르면 강원과 경상우병영은 2년, 다른 지역은 15~16개월로 일관성이 없었다. 18세기 후반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는 제주심약만 2년이고 다른 심약은 모두 1년 단위로 체직(遞職)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종실록' 성종 1년(1470) 기사에는 '심약을 약재 채취시기에 보내어 진가(眞假)를 살피고 봉진하라'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때가 성종 1년 2월 23일 기사다. 이로부터 심약의 업무는 약재의 진상을 주로 하였고, 약초를 채취하는 일은 심약 단독으로 수행하기 보다는 앞서 검토한 관노비를 대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감염병 사태를 알아보니, 1670년 1월 4일, 염병으로 전라도에서 598명이 감염돼 43명이 사망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는 당장 읍이나 마을 밖 들판의 작은 초막으로 데려가 거기서 살게 한다. 간호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환자에게 접근하지 않으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 환자의 앞쪽에 있는 땅에 침을 뱉는다.
간호해 줄 친구가 없는 환자는 그대로 내버려진 채 죽게 된다. 또한 하루라도 빨리 환자를 치유하고 소생시키기 위해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 정부는 도성과 지방에 의관과 의녀, 그리고 의서와 약재를 보내어 병든 자를 치료하도록 했다. 감영 소재지에 있는 심약이라는 의관에게도 치료에 만전을 기하라고 주문했다.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이라는 약제를 복용하도록 권했다.
전라감영에는 심약당이 있었다. 구 유의원자리였다.
전라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왼쪽 상단부터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審藥堂)과 법률을 다루는 검율당(檢律堂), 그리고 그 밑으로 진상청(進上廳)이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한지(韓紙)를 만들던 지소(紙所)와 한지를 인출하는 인출방(印出房)이 배치됐으며, 그 남쪽 방향으로 선자청(扇子廳) 4채가 매우 크게 자리했었다
17~19세기에는 약재시장이 형성되고, 전국 각 지방에 약국이 등장하면서, 104 팔기 위해 약초를 채취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지방 약국의 경우, 유력한 사족들이 약계(藥契)를 조직해 자체적으로 약재를 조달했는데, 지방에서 개인이 약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방의 약계에서는 약초를 어떻게 조달하고 있었을까?
지방의 약계에서 운영하는 약국의 인적구성을 보면, 약초채취를 담당하는 직책을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약국의 직원으로 의원, 약간(藥干), 고직(庫直), 의생(醫生)이 딸려있는 형태로 중앙관아의 전의감, 혜민서 약방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가운데 '약간'이 약의 채취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이들은 부(府)에서 선발해, 다른 군(郡)으로 옮길 수 없었고, 만일 인사에 문제가 생기면 새로 뽑아 충원하도록 해, 늘 약국을 지키도록 했다.
18세기 중후반이 되면 서울과 지방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의원과 약국들이 급증하게 된다.이러한 현상은 약재를 공급하는 방식이 조선 전기와 다른 형태였을 것임을 추정케 한다.
1780년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한 기사는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에서 홍역을 치료할 대책을 마련하면서 의료의 혜택을 받는 대상을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사람들로 한정하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제때에 간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 4월 20일(계사) 2번째 기사 가난한 자들의 홍역 구제책을 시행하게 하다'를 통해서다.
즉, 이 시기 이미 일반적인 질병은 사설의원과 약방을 통해 약물을 처방받아 구입해 치료하는 일이 가능할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의원과 환자 모두가 약국을 통해 약물을 공급받고 있었다면, 약국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많은 종류의 약재를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었을까?
고창출신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매약상이 등장한다. 황윤석이 서울에서 생활할 때, 그와 거래하던 매약상은 부안에 거주하며 서울, 김포, 전주, 부안을 떠돌며 약을 팔았다.
황윤석은 1779~1780년, 1786~1787년에는 충청도에서 수령으로 근무했다. 이 시절에는 경약상(京藥商) 김규진이라는 자를 통해 약을 제공받았다. 경약상이라는 명칭으로부터 김규진이라는 인물은 서울의 약을 지방에 가져다 파는 일을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매약상들의 활약을 통해 서울과 지방은 약재의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매약상은 중간 상인에 해당할 것인데, 이들이 약재를 구입하는 생산자 집단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 옛날 부안에서 거주하던 매약상의 후손은 어디에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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