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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경국대전과 '대동지지'의 기생

경국대전"과 '대동지지'의 기생


조선 후기 최고 최대의 유흥가 청계천 광통교(을지로입구)를 사이에 두고 미술을 총괄하는 도화서와 나란히 마주 보던 장악원은 관아의 크기나 구성원의 숫자, 영향력 측면에서 다른 관아를 압도했다. 전성기 한때 1141명의 구성원을 가진 조선 최대 규모의 관아였다.

그러나 장악원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과 비중은 관아 크기나 구성원 수로 따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제와 함께 양반 사회를 유지한 실질적인 골격인 기생제의 핵심이 바로 장악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의 낮 문화가 과거와 관직 중심이라면 밤 문화는 노비와 기생 중심이었다.

음악을 다루는 장악원이 기생제와 무슨 상관인가? 기생 중에서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이른바 인기 높은 전문 직업인 ‘예능 기생’은 십중팔구 장악원 소속 여악(女樂)이었다. 기생은 신분을 대물림하는 관비(관가에 속한 계집종)이지만, 악기를 다루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울 뿐 아니라 시와 글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우받는 특수 계층이었다. 장악원 소속 여악은 조선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150명에 이르는 여악은 1만여 지방 기생 중에서 가려 뽑은 ‘날고뛰는’ 서울 기생이었다.

세종 때 서울 기생의 정원은 125명이었으나 그 수는 가변적이었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기녀 150명을 뽑아서 중앙에 올리는 조항이 명문화돼 있다. 여악은 중국 사신과 변방에 파견된 군인의 뒷바라지를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사대부 지배 계층의 여흥과 탈선 행각에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1860년대에 편찬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보면 전라도 감영 소속 기생은 34명, 강원도 감영 22명, 나주 22명, 순천 26명, 영광 23명, 남원 15명, 진도 4명으로 인원이 들쑥날쑥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에서 명기를 따로 뽑아 운현궁에 전속시켰다. 한때 “평안도 기생, 충청도 양반, 전라도 아전이 조선의 3대 적폐”라고 큰소리쳤던 사람이지만 막상 권력을 잡으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장악원이 서울 기생의 유일무이한 경로는 아니었다. 18세기 유득공은 조선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에서 “내의원 혜민서에는 의녀가 있고, 공조 소속 상의원(왕실의 복식을 담당하는 관아)에는 침선비(바느질하는 기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팔도에서 선발해 올린 기녀들이다. 잔치에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라고 서울 기녀를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 혜원 신윤복의 ‘청금상련’이라는 그림을 보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가리마를 쓰고 담뱃대를 문 기녀가 의녀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머리에 쓰던 쓰개가 가리마다. 임진왜란 이후 궁중 행사와 연희, 사신 접대가 줄면서 장악원 여악 대신 의녀와 침선비로 대체한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 왕실과 관아 전용에서 벗어난 기녀들이 서울과 평양, 전주 등 대도시 시정(마을)으로 진출하면서 기방이 탄생했다.

여악의 반대 개념에서 남악이라고 불린 무동(춤추는 남자아이)이나 악생과 악공 등 지방에서 올라온 연주자들의 서울 생활은 ‘집도 절도 없는’ 극빈자 신세였다. 온갖 행사에 불려다녀야 했지만 보수와 대우가 형편없었다. 정기 실기시험에 대비해 연습에 매달리다가 겨우 민간의 잔치나 행사에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장악원이 폐지되면서 관기와 연주자들의 기방 진출 물꼬가 트였다. 여악은 1908년 궁에서 상의사(상의원) 침선비를 내보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세기 말까지 상업적 유흥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생의 공연과 요리가 제공되는 곳은 궁중이나 관아 아니면 승경지의 누정 또는 양반집 사랑채에 불과했다.

1902년 대한제국 궁내부는 협률사를 조직해 극장을 짓고 기생을 불러 공연을 시키면서 기생 문화를 일반에 개방했다. 장악원 해체 이후 권번(기생조합)의 탄생과 명월관으로 대표되는 요정이 생겨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 대부분이 간단한 기생 교육을 받은 뒤 요정에 취업했다. ‘명월관 기생’에도 창을 하는 소리기생과 몸을 파는 화초기생 두 종류로 분류됐다.

우리나라 연예인의 원조, 장악원 여악이 명월관 기생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현재 장악원 푯돌에는 “음악의 편찬 교육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라고 새겨져 있다. 잘못 적힌 서울 시내 푯돌을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글·사진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